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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우만의 창의(倡義) 통문을 받아보다
1895년 1월 15일,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義兵)이 일어났다. 이병수(李炳壽)는 전라도 장성의 참봉인 기우만(奇宇萬)이 1896년 1월 보낸 통문(通文)을 받게 되었다. 기우만이 보낸 통문을 급히 뜯어 읽어 내려가던 이병수의 손은 떨리기 시작했다.

‘통곡 밖에 다시 무슨 말을 하랴. 임금은 방금 별관에 옮겨 계시니 분이 치밀어 차라리 죽고 싶다. 신하로서 어찌 편안히 침상에 누워 있겠느냐? 와신상담(臥薪嘗膽)을 하면서도 국모(國母)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마음만 흥분할 뿐이지 임금의 치욕을 보고 있구려.
지금 왜놈들이 난리를 일으키는 것을 보면, 옛날이나 똑 같은 우리의 원수로세. 임진년(壬辰年) 일을 차마 말하랴. 전감(前鑑)이 멀지 않고 악독한 성질을 아직도 지녔으니 후환을 족히 증명하겠다. 이웃의 예를 닦는다고 핑계하고 기밀을 노리니 폐간(肺肝)이 빤히 드려다 보이고, 마침내 역적을 두호하여 앞잡이를 삼으니 심장을 알 수 있다.
더구나 그놈들이 이리떼 노릇을 할 뿐만 아니라, 또한 간흉들의 앞잡이마저 있단 말인가? 부강(富强)이란 말은 바로 임금을 속이는 감언이요, 개화란 것은 마침내 인륜을 무너뜨리는 전조다. 국모를 시해하고 임금을 협박하여 못할 짓이 없으니 삼강오륜이 끊어지고, 의복을 변경하고 머리를 깎되 거리낌이 없으니 문명 야만이 한이로구나. 양사(兩司) 종공(宗工)은 업신여김을 막아내지 못하니 조정에는 신하다운 신하가 없고, 외방 부백(府伯)은 그릇된 명을 받들어 머리 깎기를 독촉하니 나라에는 사람다운 사람이 있다 하랴.
하물며 지금 임금을 배반하고 적에 붙어서 삶을 꾀하는 자는, 옛날 난신적자(亂臣賊子)에 비해 더욱 심하구나. 4천년 예의의 나라에 생장하고, 5백년 양육의 은혜를 입었거늘, 차마 조종(祖宗) 부모의 국가를 오랑캐 금수(禽獸)의 지역으로 만든단 말이냐? 억압으로 명령을 내리게 하여 두발(頭髮) 의복의 제도를 바꾸니 이른바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으며, 협박하여 어가(御駕)를 궁중에서 몰아냈으니 그야말로 다 빼앗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다는 것이다. 춘추(春秋) 대의를 강론할 땅이 없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으랴? 난신적자가 임금을 끼고 도니 은인자중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살리기 좋아하는 대덕(大德)을 입었으니 저 삭발령(削髮令)을 철회하라는 조서가 내린 것이다. 역적의 두목이 이미 형을 받았으니, 주상 전하의 노하신 뜻을 볼 수 있다. 지난날 잠깐 구름에 가렸대서 어찌 일월의 광명이 손상되겠느냐? 이제 와서 아름다운 명(命)이 발휘되니 천지의 대덕(大德)에 유감이 없다.
그러나 개화당들이 아직도 날뛰어 임금께서 오래도록 환궁하지 못하시는데, 적개심을 가진 장수 하나가 없으니 평소의 호위가 허소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농사 지어 밥 먹고 우물 파서 물 마시는 것이 모두 왕의 은덕이 아닌바 아니거늘, 위태로울 때 편안하게 못하고 넘어질 때 부축하지 못하면 장차 저 정승을 어디다 쓸 건가? 목숨으로써 보답한다지만 죽을 자리에 죽으면 죽음이 빛이 나고, 역적을 토벌하는 것이 충성이나 시기를 놓치면 충성이 무슨 도움이랴?
온 나라로 말하면 3백여 고을이요, 우리 도(道)로 말하면 50여 고을이다. 누구나 나라를 위해 원수 갚을 마음이 없겠는가? 대소 관민(官民)을 따질 것 없다. 불타는 집 대들보에 앉은 연작(燕雀)과 같아서야 되겠느냐? 나라를 잊으면 제 몸뚱이를 잊은 셈이니, 일찌감치 나갈 길을 택하자. 임금 위해 죽는 것이 곧 의(義)에 죽는 것이다.
우만(宇萬)은 군사의 일을 배우지 못한 데다 겸하여 위인마저 몹시 용잔하지만, 하늘에서 받은 양심만은 똑 같은지라 해바라기처럼 향일(向曰)의 정성은 지녔기로, 이에 감히 천박함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여러분께 두루 고하노니 심지어 이교(吏校) 서민이나 공상(工商) 하천(下賤)까지도 일치단결만 하면 적을 없앨 수 있다. 천리나 되는 나라에서 침략자를 무서워한단 말은 듣지 못했다.
임금께서 파천해 계시니 시일을 기다릴 수만도 없으며, 더구나 역당이 망명해 달아나서 뿌리를 뽑지 못했음에랴. 천안(天顔)의 한 방울 눈물은 천만 신하가 배를 갈라도 속죄하기 어렵고, 대월을 벗어나신 옥보(玉步) 두어 걸음은 억만 백성이 뼈가 가루되어도 미칠 수 없다. 왜놈이 다시 떼로 들어오니 그 행동이 망측한지라, 군사를 엄밀히 단속하여 대기해서 실수 없도록 하자.
하물며 머리 깎은 수령들의 행패도 여전하고, 또 개화당의 발악도 여전하다고 한다. 귀신이나 사람이나 똑같이 분히 여기는 바이거늘, 충신과 역적이 어찌 열을 나란히 할 수 있느냐? 공을 시기하고 정의를 방해하는 행동은 역적의 무리로 규정지으며, 원수를 갚고 적을 토벌하는 의(義)는 이미 글월에 밝혔으니, 통문이 도착하는 즉시 빨리 날짜를 정하여 각기 소속 관하에서 대의에 호응하는 민병(民兵)을 모집하되, 선비들은 그 규율을 봉행하고, 이교(吏校)들은 그 두령에게 복종하라. 지휘와 절제는 스스로 계획을 정하고 궁시(弓矢)와 총칼을 모두 대비해서, 난폭한 자를 제거하여 이 위급한 내란을 밝히고, 왜놈, 양놈을 몰아내어 영원히 외적의 수모를 막아내기로 하자. 우만(宇萬)은 비록 자격이 모자라서 하진(下陣)에 있지만, 자원해서 채찍을 쥐고 전구(前驅)가 되겠다. 통문이 도착하면 그대로 시행하고 속히 회답을 바란다.’

통문을 읽는 내내 이병수의 심장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통문과 함께 동봉된 문서에는 통문을 받은 이들이 즉시 해야 할 지시사항이 적혀 있었다.

‘기(記),
통문이 도착하는 대로 즉각 회답을 보내 줄 것.
통문이 도착한 후로 큰 고을은 7일 이내로, 작은 고을은 5일 이내로 경내에 두루 돌리어 각각 알게 하라.
거의(擧義)의 빠르고 더딘 것은 각각 다를 것이니 본읍 풍의(風儀) 두령의 성명과 시설의 방책을 일일이 갖추어 본 의소로 보내 주되 교임(校任) 및 공형(公兄)도 역시 이름을 기록해서 후일 문부(文簿)의 참고가 되게 할 일.
방금 주상 전하께서 파천해 계시고 나라 일이 극히 위급하매 의병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데, 호남(湖南)만은 아직까지 아무런 동향이 없으니 이는 의기가 유독 손색이 있어 그러는 것이 아니라, 동학 난리 뒤에 민력이 아직 소생되지 못하여 시일이 지연되는 것이니, 충신 의사들은 밤낮으로 마음을 썩이는 현실이다. 이제 통문을 발송하여 군중의 울분을 풀어드리려 하노니, 울분이 오래 가면 반드시 터지는 법이라, 끝장의 성공이 적이 기대되는 바다. 장차 각 읍의 군세(軍勢)가 자못 떨치고 약속이 대강 정해지면 서로 협력하여 근왕(勤王)에 나서기로 하며, 그 때는 당연히 2번째 통문이 있을 것.
2번째 통문이 있기 전에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와 임금께서 환궁하시고 역당(逆黨)이 처단되고 전장(典章)이 복구되고 외국 병대가 물러가게 된다면 의당 빨리 통보하여 군사를 해산하게 할 것이며, 해병(海兵)의 왕래가 뜻밖에 있으니 그에 대응하는 절차는 때로 계획을 세워 편안할 때라도 위태로움을 잊어서는 안 되게 할 것.’

통문을 손에 든 이병수는 잠시 눈을 감고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누구부터 만나야 할지 머릿속은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나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방문을 나서는 이병수의 손에는 통문이 꼭 쥐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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