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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과 싸우는 것이 우선입니다! - 병자호란에 맞서는 원칙주의 성리학자 김상헌의 강한 주장
1636년 12월 17일에 청나라가 침입하여 임금이
남한산성(南漢山城)
으로 피난하였다. 김상헌이
행재소(行在所)
에 뒤따라가서 임금을 알현하고 아뢰기를, “오늘날의 계책은 당연히 먼저 싸우고 화친은 뒤에 하여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대신 이하의 신하들이
세자(世子)
를 청나라의 병영에 볼모로 보내어 청나라 군대를 퇴각시키려 하므로, 선생이 간절히 책망하기를, “어찌 신하로서 세자를 적에게 주는 의(義)가 있겠소?”라고 하였다. 그의 말하는 태도가 준엄하여 대신들이 어쩔 줄을 모르고 곧장 대궐에 나아가 죄를 벌해줄 것을 청하였다. 이 때문에 세자가 청나라에 볼모로 가는 것을 면하게 되었다. 청이 쳐들어오자 청과 싸우자는 척화론과 청과 화의를 맺자는 주화론이 있었다.
주화론자들이 세자를 볼모로 보내어 청에게 화의를 청하려고 하였던것을 김상헌이 적극 저지한 것이다. 당시 척화론은 조정의 대세였고 대표주자는 김상헌이었다. 명분을 저버릴 수 없고 청과는 화친할 수 없다는 성리학적 명분론의 원칙을 지키자는 주장이었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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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이야기
출전 :
법성일기(法城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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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미상
주제 : 전쟁과 피란, 전쟁과 외교
시기 : 1636-12-17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서울특별시
일기분류 : 분쟁일기
인물 : 김상헌
참고자료링크 :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 병자호란의 원인과 경과
병자호란이 일어나기전 명나라는 거듭된 황제의 실정과 환관의 전횡, 그리고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국력이 쇠퇴했고, 청은 강력한 기병전력을 바탕으로 명나라를 만주에서 몰아내고 중원을 압박해 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국내에서는 중립외교를 표방하던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세력은 광해군을 몰아낸 명분이 있어야 했기에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깎아내리게 된다. 인조 즉위교서에는 명나라가 임진왜란때 나라를 구해준 은총이 있는데 광해군이 명나라를 배반했다고 적혀 있다. 인조반정의 주력인 서인세력은 어쩔수 없이 친명정책을 펼치게 된다.
이러한 정세속에 병자호란은 후금의 압박과 약탈 등의 정묘조약 파약 행위와 군신관계 요구의 조선에서의 거절 등으로 일어났다.
정묘약조 이후 조선은 후금의 요구에 따라 중강과 회령에서 각각 후금에게 세폐를 보내고 약간의 필수품을 공급하였다. 하지만 후금은 당초의 맹약을 깨고 식량을 공급해줄 것을 강요하고 병선 및 군사적인 지원을 요구해 왔다. 뿐만 아니라 후금군은 수시로 압록강을 건너변경 민가를 약탈하기도 했다. 그러자 조선 내에서는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치자는 여론이 비등해지기 시작했다.
조선에 대한 후금의 압박과 횡포는 날로 심해져 1636년부터 정묘약조 때 맺은 ‘형제의 맹약’을 ‘군신 관계’로 개약하자고 하면서 황금과 백금 1만냥, 전마 3천 필 등 종전보다 더 무거운 세폐를 요구하고, 정병 3만을 지원해 달라고 요구해왔다. 이 때 후금은 만주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명의 북경 부근을 위협하고 있었다.
1638년 12월 1일 청 태종은 청군 7만, 몽고군 3만, 한족 군사 2만 등 도합 12만을 이끌고 직접 압록강을 건너 쳐내려왔다. 청군은 임경업이 지키고 있는 의주 백마산성을 피해 직접 한양으로 진군하였다.
청군이 쳐들어오자 도성 내의 주민들은 피난길에 오르기 시작했다. 인조는 급히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세자빈 강씨, 원손, 둘째아들 봉림대군, 셋째아들 인평대군을 인도하여 강화도로 피난하도록 했다.
인조는 강화도로 도망하지 못하자 조정 대신들은 사후 대책을 논의한 끝에 최명길로 하여금 적진에 들어가 시간을 끌게 하고 인조는 세자와 백관을 대동하고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했다.
남한산성에서 청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더 이상 해결책을 모색할 수 없게 되자 대신들 사이에서 다시 강화론이 대두되었다. 대신들은 주전파와 주화파로 갈라져 다시 한 번 심한 논쟁을 벌였고, 주전파가 난국을 타개할 방책을 내놓지 못하자 주화파의 주장에 따라 청군 진영에 화의를 청하도록 결정했다. 이에 최명길이 국서를 작성하고 좌의정 홍서봉, 호조판서 김신국 등을 청군 진영에 보냈다. 그러나 청 태종은 조선 국왕이 직접 성 밖으로 나와 항복을 맹세하고 척화 주모자 3인을 결박하여 보내라고 하였다. 내용이 너무 가당찮다는 생각으로 인조와 대신들은 청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가운데 주전론과 주화론이 팽팽하게 맞서 다시 수일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에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있자 성안은 술렁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강화도에서 포로가 된 윤방과 한흥일 등의 장계가 전달되자 인조는 별수 없이 항복을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조의 항복이 목전에 다가오자 예조판서 김상헌, 이조참판 정온 등은 청과의 화의를 반대하며 자결을 하려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 원문 번역
이조 판서에 제수되고, 청렴함과 신중함으로써 특별히 숭정崇政의 품계에 올랐으나, 또 어떤 일로 주상의 뜻에 거슬리어 체직되어 석실로 돌아왔다. 이해 12월에 청나라가 침입하여 주상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난하였다. 선생이 행재소行在所에 뒤따라가서 임금을 알현하고 아뢰기를, “오늘날의 계책은 당연히 먼저 싸우고 화친은 뒤에 하여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대신 이하의 신하들이 세자世子를 청나라의 병영에 볼모로 보내어 청나라 군대를 퇴각시키려 하므로, 선생이 간절히 책망하기를, “어찌 신하로서 세자를 적에게 주는 의義가 있겠소?”라고 하였다.
그의 말하는 태도가 준엄하여 대신들이 어쩔 줄을 모르고 곧장 대궐에 나아가 죄를 벌해줄 것을 청하였다. 이 때문에 세자가 청나라에 볼모로 가는 것을 면하게 되었다. 예조 판서 겸 비변사당상禮曹判書兼備邊司堂上이 되어 주상에게 나아가 한 뜻으로 굳게 지킬 계획을 극력 진술하였다. 주상이 이르기를, “이제 앞으로 무엇을 믿겠는가?”라고 하자, 대답하기를, “천도는 믿을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포위가 더욱 급해지자, 주상은 성황사城隍祠와 백제 시조묘百濟始祖墓에 기도를 하라고 명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사람이 궁지에 처하면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므로, 병들어 아프거나 슬플 때면 반드시 부모를 부르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몸소 개원사開元寺에 납시어 원종元宗의 영정에 기도하소서.”라고 하였다.
이미지
숭덕제(홍타이지)
청나라국기
남한산성
남한산성 성곽
남한산성 남문
남한산성 남문
남한산성 동문
남한산성 서문
남한산성 서문 성곽 전경
남한산성 북문
남한산성 수어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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