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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란에 임해 강경자주론을 주장한 김상헌, 타 무리로부터 지속적인 공격과 탄핵을 받다
1638년 7월 29일, 가을에 장령(掌令) 유석(柳碩) 등이 앞으로 선비 무리를 일망타진(一網打盡)할 계획으로, 아울러 시기를 타고 틈을 만들려고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군신의 의(義)는 천지간에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니, 삶과 죽음, 명예와 욕됨이 이치로 보아 혼자만 달리 할 수 없는 것인데, 김상헌은 몸을 뽑아 멀리 달아나 스스로 ‘몸을 청결하게 하고 절개를 온전히 하며 더러운 임금은 섬기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임금을 팔아 명성을 사고 당파를 만들어 나라를 그르침은 한낱 지엽적인 일에 불과합니다. 임금도 아랑곳없는 그 부도덕한 죄를 바로잡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나라의 국경 멀리에 위리안치(圍籬安置)시키소서.”라고 하였다.
척화파인 김상헌은 유석(柳碩) 이계(李烓) 등으로부터 병자호란 이후에도 ‘김상헌이 혼자만 깨끗한 척하면서 임금을 팔아 명예를 구한다’라는 등 계속하여 공격을 받고 탄핵을 받았다. 인조로부터 조정에 다시 들어오라는 명을 받았으나, 조정에서 군대를 보내 청이 명을 치는 것을 돕는다는 말에 분연히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청나라로부터 위험인물로 지목되어 1641년 심양(瀋陽)에 끌려가 이후 4년여 동안을 청에 묶여 있었다.
김상헌은 청에 대하여 존명사대(尊明事大)의 명분을 내세워 반대했다. 이 명분은 태조의 위화도 회군의 명분이며, 인조반정·북벌론의 명분이기도 하다. 김상헌의 척화행위가 자기만 위한 것이라는 비난을 받는 가운데 1640년(인조 18)에 청나라에서 김상헌이 삼전도비(三田渡碑)를 훼손했다는 풍문을 듣고 김상헌을 잡아갔다. 그리하여 김상헌에 대한 의혹이 일거에 사라졌다. 이러한 김상헌의 척화사상은 그가 죽은 후에 송시열의 북벌론(北伐論)의 뿌리가 되었다.
국란을 당하여 이에 대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강경론과 온건론, 자주론과 의타론으로 국론이 분열되기 쉽다. 김상헌은 병자호란을 당해 강경·자주론을 주장했고, 그 의리가 인정되어 조선후기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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