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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명이 회합하여 서원 건립을 논의하고 통문을 돌리다
1703년 2월 2일에 서원 건립 논의를 위해 각 서원과 사림에서 회합에 참석한 사람이 140명이었다. 진사 김중안(金重安)·이성귀(李成龜)·이속(李(王+束))이 반수(班首)가 되고, 생원 남초형(南楚衡)·유학 금최(琴最)가 공사원이 되어, 신설하느냐 합향하느냐, 두 가지 의제로 종일 반복 논의하여 마침내 신설하기로 결정하였다. 도내에 통문을 발송하니, 통문을 짓는 일은 이용징(李龍徵)·유석태(柳錫泰)가, 통문을 베끼는 일은 김귀석(金龜錫)·권경운(權景運)이 맡았다. 통문을 작성하여 보내고 이미 서원을 신설하기로 결정되어 이보(李簠)가 작성한 초안의 끝에 합향의 내용은 제거하고, 신설의 내용으로 고쳐 작성하니, 통문에 서명하는 자가 매우 많아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이날 모인 자리에서 신설서원의 원장을 추천하였는데 수망(首望)에 생원 김하진(金夏鎭), 부망에 생원 유경휘(柳慶輝), 말망에 생원 이후천(李厚天)이 추천되어 말망인 이후천이 채택되었다. 이때 진사 이후천은 마침 교촌(校村)에 있었다. 조사(曹司)에게 관사에 망기(望記)를 보내고, 서원의 이름을 도연서원(陶淵書院)으로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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