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전통과 기록
유교문화관
조선의 교육
조선의 가례
옛문서 생활사 박물관
사행록 역사여행
안동 하회마을
조선의 전통건축
스토리 테마파크
스토리테마파크
웹진
공모전
콘퍼런스
테마스토리
가정
가족, 친족과의 왕래와 갈등
개인의 일생과 통과의례
그리운 가족
노비들의 삶
경제
가계경영과 노동
고달픈 세금과 부역
시장과 거래
자연재해와 흉년의 기록
공동체
공동 목표를 위한 조직과 협동
관리와 공조 및 대립
사람 사이 갈등과 범죄
이웃과 어울리는 삶
근대화와 식민지의 시대
구국에 나선 의인들
나라를 위한 무장투쟁
신문물의 물결과 변화하는 조선
이역만리에서의 독립운동
혼란한 정국
나라의 정치
관직생활
국가의 경조사
국왕의 명령
왕실 사람들의 이야기
조정의 갈등과 대립
조정의 사건과 사고
외교와 사행
사행길의 사건사고들
사행길의 여정
외교정책의 수행
외국 사람들과의 만남
외국의 자연과 문물의 경험
전쟁, 혼란의 기록
전장에서 들려오는 소식들
전쟁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들
전쟁의 진행과 양상
피난과 궁핍의 기록
풍류와 놀이, 여행의 기록들
유람과 감상
유람과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
유흥의 기록
자연과 고적에 얽힌 이야기
하층민의 놀이와 즐거움
학문과 과거
과거 급제의 영예
과거의 부정부패
끝없는 학문의 세계
어렵고 힘든 과거시험
인물스토리
관리
가족, 동료와 교류하는 관리
나라의 변란을 맞이한 관리
무인의 길을 걷는 관리
바른말을 하는 관리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관리
선정을 베푸는 청렴한 관리
외교를 수행하는 관리
인사발령을 받은 관리
정치적 갈등에 직면한 관리
죄를 지은 관리
지방을 다스리는 관리
직무를 수행하는 관리
양반
가정의 대소사를 챙기는 양반
고을일에 참여하는 양반
과거시험을 치르는 양반
나랏일을 걱정하는 양반
난리를 만난 양반
대립과 갈등에 놓인 양반
사람들과 교유하는 양반
일상을 고찰하는 양반
일신상의 문제가 생긴 양반
풍류와 유람을 즐기는 양반
풍문과 소식을 듣는 양반
학문하는 양반
여성
기생
양반가의 여성
왕실의 여인들
풍류와 유람을 즐기는 양반
하층민 여성
왕실
국난을 만난 국왕
국정을 돌보는 국왕
왕실의 사람들
왕을 보필하는 세자
한 집안의 가장인 국왕
외국인
군대를 이끌고 온 외국장수
외국의 외교관
조선인을 만난 외국인
중인
의료를 담당하는 의원(의관)
향리
하층민
고된 삶을 사는 노비
기술자의 삶, 장인
무속인
부역과 노동에 지친 백성
장사로 삶을 영위하는 상인
천대받는 승려
배경이야기
경제
군제와 군역
농업과 가계경영
산업과 시장
세금과 부역
환경과 재해
교육과 과거
과거
교육기관
학문과 출판
인물
문화
고사, 고적
관습, 풍속
군제와 군역
놀이
예술
의례
의식주
종교
질병과 의료
사회
가족과 일상의례
신분
지역공동체
질병과 의료
전쟁과 외교
국제정세
민간인 교류
외교
전쟁
정치와 행정
사건
사법
왕실
정쟁
정치행정제도
지방제도
일기정보
서명별
전체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저자별
전체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멀티미디어
내용유형
공간자료
사건자료
소품자료
인물자료
절차자료
참고자료
미디어유형
3D
그래픽
애니메이션
이미지
공지사항
활용사례
로그인
소개
웹진담담신청하기
활용가이드
용어사전
전통과기록
페이스북
블로그
▲ top
전체
출전
이야기소재
배경
멀티미디어
유교넷일기
상세검색
디렉토리검색
전체
전체
출전
이야기소재
배경
멀티미디어
유교넷이야기
검색어
시기
-
검색
다시입력
테마스토리
가정
경제
공동체
근대화와 식민지의 시대
나라의 정치
외교와 사행
사행길의 사건사고들
사행길의 여정
외교정책의 수행
외국 사람들과의 만남
외국의 자연과 문물의 경험
전쟁, 혼란의 기록
풍류와 놀이, 여행의 기록들
학문과 과거
Home
>
테마스토리
>
외교와 사행
> 사행길의 여정
페이스북
스크랩
옛 성인 기자의 도읍, 평양 - 기자궁 옛 터에 여전히 궁궐이 우뚝하다
1803년 11월 2일, 평양(平壤)은 옛 성인
기자(箕子)
의 도읍이다. 그 유풍과 발자취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있으니, 그 기이한 구경거리를 샅샅이 찾아보지 않을 수 없다. 마침내 주작(朱雀)ㆍ함구(含毬) 2개의 문을 통해 길을 나섰다.
성은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이 있는데 각각 성 1개에 문이 1개씩 있었다. 외성을 나가는 길로
정전(井田)
의 옛터를 방문하였다. 밭길은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였고, 질서 정연한 구역은 그린 것과 같았으며, 사방은 등성이가 없어 툭 트여 있었다. 모퉁이에 돌을 세워 1정(一井)의 한계를 표시하고 있었다. 밭 두덩에는 기자궁(箕子宮)의 옛터가 있었는데 궁전이 우뚝하였다. 동구(洞口)에 ‘인현리(仁賢里)’란 비석이 세워져 있었고, 궁전 문에는 ‘팔교문(八敎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동구를 경유해서 문으로 들어가면 제단이 설치되어 있고 거기에 돌을 쌓아 한 면에 ‘구주단(九疇壇)’이라 새겼다. 또 비석이 세워져 있었는데, ‘기자궁구기(箕子宮舊基)’라는 5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비석에는 음각(陰刻, 조각에서, 평평한 면에 글자나 그림 따위를 안으로 들어가게 새기는 일, 또는 그런 조각)으로 기록한 글이 있었는데, 옛 관찰사 이정제(李廷濟)가 지은 것이다.
여기서부터 또 앞으로 얼마쯤 가면 기자의 우물이 있고 우물 옆에는 돌을 세워 ‘
기자정(箕子井)
’이라고 새겨 놓았다. 우물의 깊이는 대략 10길(길 : 길이의 단위. 한 길은 사람의 키 정도의 길이다) 가량이나 되는데, 우물 난간에서 굽어보면 다만 푸른 물빛만이 보일 뿐이다. 구삼문(九三門)을 경유해서
내전(內殿)
으로 들어가니 그 당급(堂級)의 제도는 서울의 학교와 같아 북쪽은 삼익재(三益齋), 남쪽은 양정재(養正齋), 좌우의 재방(齋房)은 의인재(依仁齋)ㆍ지도실(志道室)이었다. 재실에는
경의생(經義生)
이 있어 1개의 큰 족자를 받들고 나와 펼쳐 보여 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정전구혁도(井田溝洫圖)였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멀티미디어
관련이야기
출전 :
계산기정(薊山記程)
전체이야기보기
저자 :
미상
주제 : 사행, 학문
시기 : 1803-11-02 ~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평안남도 평양시
일기분류 : 사행일기
인물 : 이해응, 이정제
참고자료링크 :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 조선시대 평양의 기자관련 유적
이해응이 연행 사신으로 가던 1803년까지만 해도 평양에는 기자동래와 관련된 기자궁, 구주단. 기자궁구기(箕子宮舊基), 기자정 등이 있고 궁궐이 잔존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어쩌면 조선 이전부터 기자를 숭상하여 건립된 것들로 보인다. (기자는 殷(은)이 망한 기원전 1146년대의 사람이다.) 한(漢)나라 이후의 기록 중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사실을 전하는 최초의 문헌은 복생(伏生)의 ≪상서대전 尙書大典≫이다. 이에 의하면 기자는 무왕에 의해 감옥에서 석방되었지만, 고국인 은나라가 망했으므로 그곳에 있을 수 없어 조선으로 망명했으며, 무왕이 그 소식을 듣고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왕 13년에 기자가 주나라 왕실에 조근을 왔고, 이 때 무왕이 기자에게 홍범을 물었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한서》의 지리지 연조(燕條)에는 은나라가 쇠하여지자 기자가 조선에 가서 그 백성에게 예의와 농사, 양잠, 베짜기 기술을 가르쳤더니, 낙랑조선(樂浪朝鮮) 사회에서 범금팔조(犯禁八條)가 행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들을 근거로 '위략(魏略)'에서는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긴 준왕(準王. 고조선 마지막 왕)을 기자의 후예로 기술하였으며 '삼국지'는 이것을 인용하였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였지만, 최근에는 이를 부정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먼저 문헌상으로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것을 입증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기자는 기원전 1100년 전후의 인물인데, 기원전 3세기 이전에 쓰여진 《논어》 《죽서기년(竹書紀年)》 등에는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기록은 없고 기자의 존재 자체만 언급하고 있다. 기자동래설이 사실이라면 이들 기록에 그에 관한 언급이 있을 법한데 그렇지 않다. 그런데 기자의 동래 사실을 전하는 사서(史書)들은 한결같이 모두 기원전 3세기 이후에 쓰여진 것들이다. 따라서 이를 근거로 한 기자동래설은 기원전 3~2세기 무렵에 중국인들이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조작해낸 것으로 의심하는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중 세종12년 기사에 산천단 순심 별감(山川壇巡審別監) 정척(鄭陟)이 아뢰기를, “평양 기자묘(箕子廟) 신위(神位)에 쓰기를, ‘조선 후기자(朝鮮侯箕子)’라고 하였사오니, 청하건대 ‘기자’ 두 글자를 삭제하옵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그렇다. 기(箕)는 나라 이름이고 자(子)는 작(爵)인데, 이를 칭호(稱號)로 함은 불가하다. 그러나 그저 조선후라고 일컫는 것도 미안한 듯하니 ‘후조선(後朝鮮) 시조 기자(箕子)’라고 하는 것이 어떠할까. 상정소(詳定所)로 하여금 의논하여 아뢰게 하라.”하니, 좌의정 황희·우의정 맹사성·찬성 허조 등은 ‘후조선 시조 기자’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는데, 희(喜) 등의 의논에 따랐다. 기자숭배사상은 16세기 사림파들에 의해 크게 부각되었으나 위 글을 통해 이미 15세기 이전에 기자묘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세종대왕에 의해 후조선 시조로 규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자정전은 기자(箕子)가 평양에 설치했다는 정전(井田)을 말하는데, 주나라의 정전법과는 달리 전(田)자 모양의 할지법(割地法)에 의해 구획된 토지이다. 기자정전의 잔형 중에서 가장 정제된 형태를 갖춘 구역은 평양 외성의 함구문(含毬門)과 정양문(正陽門) 사이에 있던 64구(區)이다. 이 기자정전의 기본 구조는 64무(畝)의 면적인 '구'와 십(十)자 모양의 일묘로(一畝路)구성된 전(田)이 가로 세로 각 4열씩 모두 16개가 배치되고, 각 전 사이에 3묘 넓이의 삼묘로(三畝路)가 갖추어진 형태였다. 기본 구조의 외곽 삼면에는 통행을 주목적으로 한 9묘 넓이의 큰 길이 형성되어 있으나, 이는 기본 구조의 구성 요건은 아니었던 듯하다. 이러한 평양의 기자정전 구획에는 중국 하(夏)·은(殷)시대의 양전법(量田法)이 사용되었다고 보이는데, 길이 조금 넓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이 기자정전의 할지법은 후일 사마정전법(司馬井田法)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그런데 이와 같은 기자정전은 고구려의 평양 천도를 전후한 시기에 이루어진, 도성의 도시 계획에 따른 것이라는 설명도 있으며, 고구려 멸망 후 평양에 주둔했던 당나라 군사가 설치한 둔전(屯田)에서 전해 온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기자정전은 평양 외성(外城)의 남쪽에서 대동강변에 이르는 지역(지금의 평양역 부근)에 설치되었는데, 고려·조선시대를 거쳐 광복 전까지 잔형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평양시 기림리(箕林里)에는 기자릉과 묘사(정자각:丁字閣)와 비석(중수기적비:重修記蹟碑) 등의 유적이 있으며 이것들은 모두 고려와 조선 때 세워진 것이다. 기자묘는 고려 숙종 7년(1102)에 무덤 형태[분형:墳形]를 찾아 제사하고 성종과 고종 때 증축한 것이다. 그러나 후세에 내려와 봉묘(封墓)한 이 묘가 과연 단군조선을 이어 조선왕이 됐다는 이른바 기자(箕子)의 묘인지에 대한 정확한 근거도 없다.
◆ 원문 번역
1803년 11월 2일 평양(平壤)은 옛 성인 기자(箕子)의 도읍이다. 그 유풍과 발자취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있으니, 그 기이한 구경거리를 샅샅이 찾아보지 않을 수 없다. 마침내 주작(朱雀)ㆍ함구(含毬) 2개의 문을 통해 길을 나섰다. 성은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이 있는데 각각 성 1개에 문이 1개씩 있었다. 외성을 나가는 길로 정전(井田)의 옛터를 방문하였다. 밭길은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였고, 질서 정연한 구역은 그린 것과 같았으며, 사방은 등성이가 없어 툭 트여 있었다. 모퉁이에 돌을 세워 1정(一井)의 한계를 표시하고 있었다. 밭 두덩에는 기자궁(箕子宮)의 옛터가 있었는데 궁전이 우뚝하였다. 동구(洞口)에 '인현리(仁賢里)'란 비석이 세워져 있었고, 궁전 문에는 '팔교문(八敎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동구를 경유해서 문으로 들어가면 제단이 설치되어 있고 거기에 돌을 쌓아 한 면에 '구주단(九疇壇)'이라 새겼다. 또 비석이 세워져 있었는데, '기자궁구기(箕子宮舊基)'라는 5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비석에는 음각으로 기록한 글이 있었는데, 옛 관찰사 이정제(李廷濟)가 지은 것이다. 여기서부터 또 앞으로 얼마쯤 가면 기자의 우물이 있고 우물 옆에는 돌을 세워 '기자정(箕子井)'이라고 새겨 놓았다. 우물의 깊이는 대략 10길 가량이나 되는데, 우물 난간에서 굽어보면 다만 푸른 물빛만이 보일 뿐이다. 구삼문(九三門)을 경유해서 내전(內殿)으로 들어가니 그 당급(堂級)의 제도는 서울의 학교와 같아 북쪽은 삼익재(三益齋), 남쪽은 양정재(養正齋), 좌우의 재방(齋房)은 의인재(依仁齋)ㆍ지도실(志道室)이었다. 재실에는 경의생(經義生)이 있어 1개의 큰 족자를 받들고 나와 펼쳐 보여 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정전구혁도(井田溝洫圖)였다.
이미지
기자 초상
그래픽
평양성 고지도와 주요 건...
이해응의 기자유적 탐방경...
게시판 리스트
번호
제목
날짜
장소
멀티미디어
관련 이야기 소재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닫기
출전정보
출전정보가 없습니다.
저자정보
저자미상
저자정보가 없습니다.
원문보기
닫기
관련목록
시기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장소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