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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담으로 교류하는 사신들
왕자정(王柘庭)유인천(劉引泉) 및 모든 사람들과 오늘 약속하고 낙지헌(樂志軒)으로 갔는데, 경암(絅菴)추양(秋陽)이 차례로 이르렀다. 그 문에 들어서니 주인이 나와서 맞아들이고, 접장(蝶莊)효렴(孝廉) 진범천(陳範川)은 이미 먼저 와 있다. 진범천이 붓을 들고 수작하기를,
“전부터 귀국의 인물과 문장의 훌륭함을 들었소. 저 스스로 보잘것없는 학문으로 감히 제대로 받들어 모시지 못함이 부끄럽습니다만, 귀하의 성명(姓名)은 어떻게 부르나요? 천생(賤生, 주로 남자가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일인칭 대명사)의 이름은 홍치(鴻治)이고 호는 범천(範川)입니다. 효렴(孝廉)으로 발탁되었으나 아직까지 관직을 받지 못하고 있지요.”
하기에, 이해응은 읍하고 쓰기를,
“그 진 효렴 선생이 아니십니까? 일찍이 자정(柘庭)과 인천(引泉) 두 선생을 통해 높으신 성화를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오늘 모시게 되었군요. 저의 성은 모(某), 이름은 모(某), 호는 모(某)라 합니다. 그리고 귀하의 본 고향은 순천부(順天府)입니까?”
했다. 진범천은,
“절강 가흥(浙江佳興) 사람입니다.”
하기에, 이해응은,
“절강 가흥 지방은 본래 수려한 고장으로 문인 재자(文人才子)가 근자에도 다른 지방보다 우세한 곳이 아닌가요?”
하매, 진범천은,
“절강은 산천이 수려하고, 인물과 문장도 가장 풍성합니다. 그러나 저는 본래부터 글을 읽지 않았으니 스스로 부끄럽습니다.”
한다. 이해응은,
서호(西湖)호구(虎邱)는 귀하의 무대인데, 과연 몇 번이나 유람하셨습니까?”
하니, 진범천은,
“제가 사는 가흥에서 서호까지는 200여 리(里)이고 호구는 더욱 가깝습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일로 인해 경사(京師)에 체류하고 있습니다. 제가 1, 2년 동안 집에 있을 때 우연히 그 지방을 유람한 적이 있으나 보고 싶었던 곳을 다 보지 못했습니다. 항상 모든 선배들의 말씀이 여기에 미치면 더욱 속세의 면목(面目)이 부끄럽고, 산수(山水)에 대해 웃기는 사람을 면치 못한다 합니다.”
하면서 진범천은 또,
“지난번 귀국 박제가(朴齊家)의 문집을 보았는데, 그중 책문(策文, 정치에 관한 계책을 물어서 답하게 하는 글) 한 편은 극히 고박(古博 옛 풍미가 있고 해박함)하였으며, 시(詩) 역시 청아(淸雅)하고 능숙한 솜씨던데요. 아마 같이 한번 겨루어 보셨겠지요?”
한다. 이해응은,
“박(朴)은 과연 정유(貞蕤 박제가의 호)인데, 그 시문(詩文)을 어떻게 보셨소? 영재(泠齋) 유득공(柳得恭)과 같이 경사(京師, 서울)에 놀면서 지은 것이 많은데 보셨나요?”
하니, 이해응은,
“박제가의 시는 친구들과 같이 보았소. 그가 일찍이 경중(京中, 서울)에 놀았기 때문인지 그 시집(詩集)의 태반이 경중 문인들과 주고받은 것이더군요. 그리고 그 문집은 절강(浙江) 사는 진씨(陳氏)란 사람이 대각(代刻, 대신해 새기다)했는데, 진씨란 사람은 박제가와 서로 아는 터이지요.”
하면서 그는 또,
“지금 우리나라 문인 아사(文人雅士)들이 모두 공무(公務, 국가나 공공 단체의 일)에 바빠서 같이 놀 여가가 없습니다만, 선산(船山)이나 수민(壽民) 등 모두가 시주(詩酒, 시와 술을 아울러 이르는 말)의 호걸이지요. 선생께서 오래 묵지 못하심이 애석합니다.”
한다. 이해응은,
“선산(船山)은 장 한림(張翰林)이 아닙니까? 저 역시 뵙기를 원했습니다. 대개, 사대부(士大夫)의 출세란 규중(閨中)에 사는 여인과 같아서 좋은 중매가 없으면 인연을 얻기가 불가하지요. 잠깐 사이에 돌아갈 시기가 임박했으니, 저의 좋은 인연은 여기에서 끝난 건가요?”
하니, 진범천은,
“선산(船山)의 성은 장(張)이고 이름은 문도(問陶)인데 모든 자격을 갖춘 사람이지요. 원래 초순에 한 번 모이기로 약속되었으나, 2월 2일에 황제가 한림원(翰林院)에 거둥하시게 되어, 모두 맡은 일이 있기 때문에 서로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한다. 이해응은,
“제 친구 우야(于野) 이광직(李光稷)이 역시 시주(詩酒, 시와 술을 아울러 이르는 말)의 호걸인데, 왕년에 상국(上國, 중국)에 왔다가 장선산과 어울려 날마다 읊고 마시면서 서로 깊이 사귀었다고 합니다. 이번에 이 친구가 또 동행했는데 선산을 보지 못하여 염념불망(念念不忘, 자꾸 생각이 나서 잊지 못함)하고 있지요.”
하니, 진범천은 또 경암(絅菴)ㆍ추양(秋陽)으로 더불어 서로 수작한다. 자정(柘庭)이 글을 써서 이해응에게 보이기를,
“선생은 범천(範川)의 사람됨을 아십니까? 범천은 우리나라 갑인년(1734, 영조 10) 과거에 장원한 사람입니다. 나이는 젊으나 문식(文識)이 뱃속에 꽉 찼지요. 그리고 뛰어나게 명민합니다. 저는 일전에 약속을 지키지 못하여 더욱 부끄럽습니다. 지금 여러 선생들이 모이는 기회를 얻어 가르침을 받들고자 하나 역시 용렬한 자질(資質)로서 속이 좁고 멍청합니다.”
한다. 이해응은,
“오늘 유인천은 무슨 일로 못 오셨습니까?”
하니, 왕자정(王柘庭)은,
“사람을 시켜 모셔 오도록 했는데, ‘신병(身病, 몸에 생긴 병)이 있어 약속을 어기게 되었다.’ 합니다. 유인천은 사람이 호걸스럽고 명민합니다. 또한, 오늘의 약속도 실로 유인천의 지성스런 주선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신병만 아니었던들 어찌 그가 원하던 이 모임에 오지 않았겠습니까? 제 마음 역시 간절하고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부탁하신 석암(石菴)의 글씨는, 내가 대신 부탁하여 얻어 드릴 수 있으되, 석암이 2일 한림원 대전(翰林院大典)에 참석하게 되면, 시책(詩冊)을 제진(題進)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전례(典禮)가 박두했기 때문이지 다른 일은 없습니다. 이번 한림원 대전에는 금상(今上, 지금의 임금 청 고종)이 거행하는 것이라, 요직에 있는 분들이 모두 한 차례씩 잔(酌)을 올리게 되어 있습니다. 떠나실 시기가 만약 이 대전 후이라면 특별히 부탁하신 바를 주선해 드리겠습니다.”
한다. 이해응은 유인천에게 보낼 편지를 쓰고, 이어 서간(西澗)의 시문(詩文)을 내어 보이면서,
“이것이 유인천과 약속한 것입니다.”
하니, 왕자정은,
“삼가 존명(尊命, 남의 명령을 높여 이르는 말)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한다. 이해응은,
“황제(皇帝)가 한림원에 거둥하면 시책(詩冊)을 제진(題進)하는 것이 상례입니까?”
하니, 왕자정은,
“전례입니다. 황제가 새로 등극하여 거둥하게 되면 한림원 출신들은 조야 인사를 막론하고 모두 시책을 제진하지요. 하물며, 한림원을 맡은 신하야 더 할 말이 있겠습니까? 한림아문(翰林衙門)은 옛 제도로서 선배들이 모두 중하게 여겼으며,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그 아문에 가르침을 청하니, 각각 한 가지 일만을 맡은 다른 아문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면서 주찬(酒饌, 술과 안주를 아울러 이르는 말)을 차려 왔는데, 각종의 진수(珍羞, 진귀하고 맛이 좋은 음식)가 전에 비해서 매우 성대하였다. 이해응은,
“진솔(眞率)한 모임에 어찌 이렇게 성대히 차리셨습니까?”
하니, 그는,
“차(茶)가 끓어 향기롭고 손님이 오셨는데 어찌 즐거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한다. 이해응은 다시 진범천(陳範川)에게,
“귀하의 집은 어디쯤 있나요? 알려 주셔서 끝까지 우의(友誼)를 지속하는 길을 만들었으면 감사하겠습니다.”
하니, 진범천은,
“저의 집은 멀어서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지금 성 안에 있기 때문에 성을 빠져 나가기가 불편한 점이 많습니다. 새달 초순경에 선생께서 여가가 있으시면 날짜를 정하여 알려 주십시오. 자정(柘庭)도 다음에는 우리 집으로 약속하는 것이 어떻겠소?”
한다. 왕자정(王柘庭)은,
“진범천은 효렴으로 발탁되어 지금 전관(典館)의 등록관(謄錄官)으로 있지요. 아까 ‘벼슬에 있지 않다.’ 한 말은 겸사(謙辭, 겸손의 말)였습니다. 만약, 저를 버리지 않으신다면 저의 집에서 모이기로 합시다.”
하기에, 이해응은,
“삼가 가르침을 따르겠습니다.”
했다. 왕자정은,
“제 아우(접장(蝶莊))가 오래 전부터 사모하면서 조석으로 받들어 모시지 못함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집은 성 안에 있는 데다 피부에 병이 있어 출입하기에 몹시 불편하지요. 요즈음은 여러 선생들이 읊어주신 시문으로 인해 억지로 아픔을 참고 받들어 모시고 싶은 심회(心懷,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이나 느낌)를 달래고 있는데, 그믐이 되도록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율시(律詩, 여덟 구로 되어 있는 한시체(漢詩體)) 한 수를 드리오니, 이 변변치 못한 시를 차운(次韻, 남이 지은 시의 운자(韻字)를 따서 시를 지음 또는 그런 방법)하시어 선물로 주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는데, 그 시(詩)는,
아름다운 경치 봉궐과 가지런하여 / 觀光齊鳳闕
좋은 말 계림(조선)에 나갔네 / 佳語出鷄林
글을 빌기에 구름 모이듯 하고 / 乞字看雲集
술을 마시기에 밤이 깊어지도록 / 傾觴到月陰
정신적인 그 사귐 나를 좋아했고 / 神交由我好
조용한 눈웃음 신선 맘을 알리 / 眉語識仙心
다시 황화 읊음에 감동하노니 / 更感皇華詠
아름다운 손이 덕음을 주네 / 嘉賓惠德音
이와 같이 쓰고, 끝에는,
“정월 22일, 낙지헌(樂志軒) 동화 선생(東華先生 동화(東華)는 우리나라를 존칭하는 말)이 모이신 즉석에 삼가 원운(原韻)에 의해 답을 올리면서, 아울러 교정하여 주심을 간청합니다. 접장거사(蝶莊居士)는 초(草, 기초를 잡음)합니다.”
하였기에, 이해응은,
“눈을 닦고 보니 참으로 뛰어난 신조(神造, 신이 만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후의를 저버리지 못하여 감히 졸한 솜씨를 보입니다.”
하면서 그 운(韻)에 따라 수답(酬答, 묻는 말에 대답함)하였는데, 왕씨 형제는,
“아름다운 글귀를 받들어 읽으니, 이보다 더 좋은 보물은 없습니다. 삼가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하면서 작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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