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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담으로 교류하는 사신들
왕자정(王柘庭)
ㆍ
유인천(劉引泉)
및 모든 사람들과 오늘 약속하고
낙지헌(樂志軒)
으로 갔는데,
경암(絅菴)
과
추양(秋陽)
이 차례로 이르렀다. 그 문에 들어서니 주인이 나와서 맞아들이고,
접장(蝶莊)
및
효렴(孝廉)
진범천(陳範川)
은 이미 먼저 와 있다. 진범천이 붓을 들고 수작하기를,
“전부터 귀국의 인물과 문장의 훌륭함을 들었소. 저 스스로 보잘것없는 학문으로 감히 제대로 받들어 모시지 못함이 부끄럽습니다만, 귀하의 성명(姓名)은 어떻게 부르나요? 천생(賤生, 주로 남자가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일인칭 대명사)의 이름은 홍치(鴻治)이고 호는 범천(範川)입니다. 효렴(孝廉)으로 발탁되었으나 아직까지 관직을 받지 못하고 있지요.”
하기에, 이해응은 읍하고 쓰기를,
“그 진 효렴 선생이 아니십니까? 일찍이 자정(柘庭)과 인천(引泉) 두 선생을 통해 높으신 성화를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오늘 모시게 되었군요. 저의 성은 모(某), 이름은 모(某), 호는 모(某)라 합니다. 그리고 귀하의 본 고향은
순천부(順天府)
입니까?”
했다. 진범천은,
“절강 가흥(浙江佳興) 사람입니다.”
하기에, 이해응은,
“절강 가흥 지방은 본래 수려한 고장으로 문인 재자(文人才子)가 근자에도 다른 지방보다 우세한 곳이 아닌가요?”
하매, 진범천은,
“절강은 산천이 수려하고, 인물과 문장도 가장 풍성합니다. 그러나 저는 본래부터 글을 읽지 않았으니 스스로 부끄럽습니다.”
한다. 이해응은,
“
서호(西湖)
와
호구(虎邱)
는 귀하의 무대인데, 과연 몇 번이나 유람하셨습니까?”
하니, 진범천은,
“제가 사는 가흥에서 서호까지는 200여 리(里)이고 호구는 더욱 가깝습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일로 인해 경사(京師)에 체류하고 있습니다. 제가 1, 2년 동안 집에 있을 때 우연히 그 지방을 유람한 적이 있으나 보고 싶었던 곳을 다 보지 못했습니다. 항상 모든 선배들의 말씀이 여기에 미치면 더욱 속세의 면목(面目)이 부끄럽고, 산수(山水)에 대해 웃기는 사람을 면치 못한다 합니다.”
하면서 진범천은 또,
“지난번 귀국
박제가(朴齊家)
의 문집을 보았는데, 그중 책문(策文, 정치에 관한 계책을 물어서 답하게 하는 글) 한 편은 극히 고박(古博 옛 풍미가 있고 해박함)하였으며, 시(詩) 역시 청아(淸雅)하고 능숙한 솜씨던데요. 아마 같이 한번 겨루어 보셨겠지요?”
한다. 이해응은,
“박(朴)은 과연 정유(貞蕤 박제가의 호)인데, 그 시문(詩文)을 어떻게 보셨소? 영재(泠齋)
유득공(柳得恭)
과 같이 경사(京師, 서울)에 놀면서 지은 것이 많은데 보셨나요?”
하니, 이해응은,
“박제가의 시는 친구들과 같이 보았소. 그가 일찍이 경중(京中, 서울)에 놀았기 때문인지 그 시집(詩集)의 태반이 경중 문인들과 주고받은 것이더군요. 그리고 그 문집은 절강(浙江) 사는 진씨(陳氏)란 사람이 대각(代刻, 대신해 새기다)했는데, 진씨란 사람은 박제가와 서로 아는 터이지요.”
하면서 그는 또,
“지금 우리나라 문인 아사(文人雅士)들이 모두 공무(公務, 국가나 공공 단체의 일)에 바빠서 같이 놀 여가가 없습니다만,
선산(船山)
이나
수민(壽民)
등 모두가 시주(詩酒, 시와 술을 아울러 이르는 말)의 호걸이지요. 선생께서 오래 묵지 못하심이 애석합니다.”
한다. 이해응은,
“선산(船山)은 장 한림(張翰林)이 아닙니까? 저 역시 뵙기를 원했습니다. 대개, 사대부(士大夫)의 출세란
규중(閨中)
에 사는 여인과 같아서 좋은 중매가 없으면 인연을 얻기가 불가하지요. 잠깐 사이에 돌아갈 시기가 임박했으니, 저의 좋은 인연은 여기에서 끝난 건가요?”
하니, 진범천은,
“선산(船山)의 성은 장(張)이고 이름은 문도(問陶)인데 모든 자격을 갖춘 사람이지요. 원래 초순에 한 번 모이기로 약속되었으나, 2월 2일에 황제가
한림원(翰林院)
에 거둥하시게 되어, 모두 맡은 일이 있기 때문에 서로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한다. 이해응은,
“제 친구 우야(于野)
이광직(李光稷)
이 역시 시주(詩酒, 시와 술을 아울러 이르는 말)의 호걸인데, 왕년에 상국(上國, 중국)에 왔다가 장선산과 어울려 날마다 읊고 마시면서 서로 깊이 사귀었다고 합니다. 이번에 이 친구가 또 동행했는데 선산을 보지 못하여 염념불망(念念不忘, 자꾸 생각이 나서 잊지 못함)하고 있지요.”
하니, 진범천은 또 경암(絅菴)ㆍ추양(秋陽)으로 더불어 서로 수작한다. 자정(柘庭)이 글을 써서 이해응에게 보이기를,
“선생은 범천(範川)의 사람됨을 아십니까? 범천은 우리나라 갑인년(1734, 영조 10) 과거에 장원한 사람입니다. 나이는 젊으나 문식(文識)이 뱃속에 꽉 찼지요. 그리고 뛰어나게 명민합니다. 저는 일전에 약속을 지키지 못하여 더욱 부끄럽습니다. 지금 여러 선생들이 모이는 기회를 얻어 가르침을 받들고자 하나 역시 용렬한 자질(資質)로서 속이 좁고 멍청합니다.”
한다. 이해응은,
“오늘 유인천은 무슨 일로 못 오셨습니까?”
하니, 왕자정(王柘庭)은,
“사람을 시켜 모셔 오도록 했는데, ‘신병(身病, 몸에 생긴 병)이 있어 약속을 어기게 되었다.’ 합니다. 유인천은 사람이 호걸스럽고 명민합니다. 또한, 오늘의 약속도 실로 유인천의 지성스런 주선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신병만 아니었던들 어찌 그가 원하던 이 모임에 오지 않았겠습니까? 제 마음 역시 간절하고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부탁하신
석암(石菴)
의 글씨는, 내가 대신 부탁하여 얻어 드릴 수 있으되, 석암이 2일
한림원 대전(翰林院大典)
에 참석하게 되면, 시책(詩冊)을
제진(題進)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전례(典禮)
가 박두했기 때문이지 다른 일은 없습니다. 이번 한림원 대전에는 금상(今上, 지금의 임금 청 고종)이 거행하는 것이라, 요직에 있는 분들이 모두 한 차례씩 잔(酌)을 올리게 되어 있습니다. 떠나실 시기가 만약 이 대전 후이라면 특별히 부탁하신 바를 주선해 드리겠습니다.”
한다. 이해응은 유인천에게 보낼 편지를 쓰고, 이어 서간(西澗)의 시문(詩文)을 내어 보이면서,
“이것이 유인천과 약속한 것입니다.”
하니, 왕자정은,
“삼가 존명(尊命, 남의 명령을 높여 이르는 말)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한다. 이해응은,
“황제(皇帝)가 한림원에 거둥하면 시책(詩冊)을 제진(題進)하는 것이 상례입니까?”
하니, 왕자정은,
“전례입니다. 황제가 새로 등극하여 거둥하게 되면 한림원 출신들은 조야 인사를 막론하고 모두 시책을 제진하지요. 하물며, 한림원을 맡은 신하야 더 할 말이 있겠습니까?
한림아문(翰林衙門)
은 옛 제도로서 선배들이 모두 중하게 여겼으며,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그 아문에 가르침을 청하니, 각각 한 가지 일만을 맡은 다른 아문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면서 주찬(酒饌, 술과 안주를 아울러 이르는 말)을 차려 왔는데, 각종의 진수(珍羞, 진귀하고 맛이 좋은 음식)가 전에 비해서 매우 성대하였다. 이해응은,
“진솔(眞率)한 모임에 어찌 이렇게 성대히 차리셨습니까?”
하니, 그는,
“차(茶)가 끓어 향기롭고 손님이 오셨는데 어찌 즐거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한다. 이해응은 다시 진범천(陳範川)에게,
“귀하의 집은 어디쯤 있나요? 알려 주셔서 끝까지 우의(友誼)를 지속하는 길을 만들었으면 감사하겠습니다.”
하니, 진범천은,
“저의 집은 멀어서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지금 성 안에 있기 때문에 성을 빠져 나가기가 불편한 점이 많습니다. 새달 초순경에 선생께서 여가가 있으시면 날짜를 정하여 알려 주십시오. 자정(柘庭)도 다음에는 우리 집으로 약속하는 것이 어떻겠소?”
한다. 왕자정(王柘庭)은,
“진범천은 효렴으로 발탁되어 지금 전관(典館)의
등록관(謄錄官)
으로 있지요. 아까 ‘벼슬에 있지 않다.’ 한 말은 겸사(謙辭, 겸손의 말)였습니다. 만약, 저를 버리지 않으신다면 저의 집에서 모이기로 합시다.”
하기에, 이해응은,
“삼가 가르침을 따르겠습니다.”
했다. 왕자정은,
“제 아우(접장(蝶莊))가 오래 전부터 사모하면서 조석으로 받들어 모시지 못함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집은 성 안에 있는 데다 피부에 병이 있어 출입하기에 몹시 불편하지요. 요즈음은 여러 선생들이 읊어주신 시문으로 인해 억지로 아픔을 참고 받들어 모시고 싶은 심회(心懷,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이나 느낌)를 달래고 있는데, 그믐이 되도록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율시(律詩, 여덟 구로 되어 있는 한시체(漢詩體)) 한 수를 드리오니, 이 변변치 못한 시를 차운(次韻, 남이 지은 시의 운자(韻字)를 따서 시를 지음 또는 그런 방법)하시어 선물로 주시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는데, 그 시(詩)는,
아름다운 경치 봉궐과 가지런하여 / 觀光齊鳳闕
좋은 말 계림(조선)에 나갔네 / 佳語出鷄林
글을 빌기에 구름 모이듯 하고 / 乞字看雲集
술을 마시기에 밤이 깊어지도록 / 傾觴到月陰
정신적인 그 사귐 나를 좋아했고 / 神交由我好
조용한 눈웃음 신선 맘을 알리 / 眉語識仙心
다시 황화 읊음에 감동하노니 / 更感皇華詠
아름다운 손이 덕음을 주네 / 嘉賓惠德音
이와 같이 쓰고, 끝에는,
“정월 22일, 낙지헌(樂志軒) 동화 선생(東華先生 동화(東華)는 우리나라를 존칭하는 말)이 모이신 즉석에 삼가 원운(原韻)에 의해 답을 올리면서, 아울러 교정하여 주심을 간청합니다.
접장거사(蝶莊居士)
는 초(草, 기초를 잡음)합니다.”
하였기에, 이해응은,
“눈을 닦고 보니 참으로 뛰어난 신조(神造, 신이 만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후의를 저버리지 못하여 감히 졸한 솜씨를 보입니다.”
하면서 그 운(韻)에 따라 수답(酬答, 묻는 말에 대답함)하였는데, 왕씨 형제는,
“아름다운 글귀를 받들어 읽으니, 이보다 더 좋은 보물은 없습니다. 삼가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하면서 작별했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멀티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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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계산기정(薊山記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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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미상
주제 : 사행, 학문
시기 : 1804-01-24 ~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중국 북경
일기분류 : 사행일기
인물 : 이해응, 왕자정, 왕접장 유인천, 진범천, 박제가, 유득공, 이광정
참고자료링크 :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 연행록에 보이는 중국학자와의 교유
사행원들은 중국의 선비들과 많은 교류를 가지며 필담을 서로의 나라에 대한 정보를 나누고, 시를 주고받으며 교류하였다. 여러 선비들과 깊은 교유를 가졌던 홍대용과 박지원, 박제가, 유득공의 일화를 통해 사행길에서 조선의 선비들과 중국의 선비들이 어떤 문학적 교류를 했는지 살펴볼 수 있다. ○ 천고의 기이한 만남 : 홍대용의 북경 여행 1766년 2월 북경의 유리창(琉璃廠) 거리에서는 한중 교류사의 새 지평을 여는 천고의 기이한 만남이 이루어진다. 이는 36살의 나이로 연행에 올랐던 담헌 홍대용과 항주에서 온 세 선비와의 사귐이다. 연암 박지원은 홍대용의 묘지명에서 그들의 아름다운 사귐을 이렇게 기억해 낸다. 언젠가 그는 숙부가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에 갈 때 따라가 유리창에서 육비(陸飛)·엄성(嚴誠)·반정균(潘庭筠) 등을 만났다. 세 사람은 다 집이 전당(錢塘)에 있는데 모두 문장과 예술에 능한 선비였으며, 그들이 교유한 이들도 모두 나라 안의 저명한 인사였다. 그러나 모두들 덕보를 ‘대유’(大儒)라 하여 떠받들었다. 그들과 더불어 필담한 수만 마디의 말은 모두 경지(經旨)·천인 성명(天人性命)·고금출처대의(古今出處大義)에 대한 변석(辨析)이었다. 굉사(宏肆)하고 준걸(儁傑)하여 이루 말할 수 없이 즐거웠다. 그리고 헤어지려고 할 때, 서로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한 번 이별하면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니, 황천에서 만날 때 아무 부끄러움이 없도록 생시에 더욱 학문에 면려(勉勵)하기를 맹세하자’ 하였다. 덕보는 엄성과 특히 뜻이 맞았으니, 그에게 풍간(諷諫)하기를, ‘군자가 자기를 드러내고 숨기는 것을 때를 따라 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그때 엄성이 크게 깨달아 이에 뜻을 결단하였다. 그후 남쪽으로 돌아간 뒤 몇 해 만에 민(閩)이란 땅에서 객사를 하였는데, 반정균은 덕보에게 부고를 하였다. 덕보는 이에 애사(哀辭)를 짓고 향폐(香幣)를 갖추어 용주에게 부치니, 이것이 전당으로 들어갔는데, 바로 그 날 저녁이 대상(大祥)이었다. 대상에 모인 사람은 서호(西湖)의 여러 군에서 온 사람들인데 모두들 경탄하면서 이르기를, “명감(冥感)의 이른 바다”라고 하였다. 엄성의 형 엄과(嚴果)가 분향 치전(致奠)하고, 애사를 읽어 초헌(初獻)을 하였다. 엄성의 아들 엄앙(嚴昻)은 덕보를 백부라고 써서 그 아버지의 『철교유집(鐵橋遺集)』을 부쳐왔는데, 전전하여 9년 만에 비로소 도착하였다. 유집 중에는 엄성이 손수 그린 덕보의 작은 영정이 있었다. 엄성은 민에서 병이 위독할 때, 덕보가 기증한 조선산 먹과 향기로운 향을 가슴에 품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마침내 먹을 관 속에 넣어 장례를 치렀는데, 오하(吳下)의 사람들은 유별난 일이라 하여 성하게 전하며, 이것을 두고 다투어가며 서로 시문으로 찬술(撰述)하였으니, 이에 대한 사실은 주문조(朱文藻)란 사람이 편지를 하여 그 형상을 말해주었다(박지원, 「홍대용묘지명」, 『국역 담헌서』4). 연행록의 화폭에 화려하게 그려진 교유의 기록은 이로부터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이 교유의 기록들이야말로 조선 후기 실학의 시대를 꽃피우는 자양이었다. 이것은 16세기 접어들면서 소중화 의식, 바꿔 말하자면, 중화 문명과의 동질성을 통해 조선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려 했던 인식의 청산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연행길에 오른 북학파의 지식인들은 구체적 경험을 통해 그들의 사유를 승인할 수 있었다. 교유에 바탕을 둔 연행의 경험을 계승하고 축적하면서 조선의 실학은 새로운 학문의 방법을 받아들여 그 학적 면모를 갖추게 되는 한편, 시대를 이끌어 가는 윤리와 철학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1765년 영조(英祖) 41년 홍대용은 계부 홍억(洪檍)의 연경사행(燕京使行)에 수원(隨員)으로 따라간다. 장도에 오른 그의 소망은 “압록강을 건너면서 보이는 것이 새로운 것이 없지는 않았지만 내가 크게 원하는 바는 하나의 아름다운 수재(秀才)나 마음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서 그와 더불어 실컷 이야기를 해 보고 싶은 것”이었다. 그의 소망은 기적처럼 이루어지는데, 1766년 연경에서 엄성·반정균·육비 세 사람을 만나 의형제의 사귐을 맺게 된다. 이 기이한 사연은 「건정동필담(乾淨衕筆談)」으로 지어져 북학파 선비들이 돌려 읽으며 장차 소원하는 바가 된다. 2월 초1일에 비장(裨將) 이기성(李基成)이 망원경을 사려고 유리창에 갔다가 두 사람을 만났는데 용모가 단정하고 문인의 기질이 있다. 그런데 모두 안경을 썼으니 아마 근시이던 모양이다. 이(李)가 청하여 말하기를 “내가 친척이 있어서 안경을 구하는데 거리에서 진짜 물건을 사기 어렵다. 당신이 쓴 안경이 근시안에 매우 적합할 것 같은데 내게 팔 수 없겠는가? 당신은 혹 여벌이 있을 것이고 새로 구한다 해도 쉽게 살 수 있을 것이 아닌가?” 하니 그 한 사람이 벗어 주면서 말하기를 “그대에게 구하는 사람은 아마도 나와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인 모양이다. 내가 안경 하나를 아끼겠는가? 팔기는 무엇을 팔아. 가지고 가게.” 하고 뿌리치고 가버린다. 기성은 자기가 경솔히 말했다가 공연히 남의 물건을 가지게 된 것을 후회하여 곧 안경을 가지고 쫓아가서 돌려주면서 말하기를 “아까 한 말은 장난으로 한 말이요, 구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쓸데없는 물건을 받을 수 없다.” 하니 두 사람이 모두 불쾌해 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조그만 물건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같은 병을 앓는 사람끼리는 서로 도와 줄 의리가 있는 것이다. 무엇을 이렇게 조심스럽게 사양하는가?” 한다. 기성은 부끄러워서 감히 다시 말을 못하고 그 내력을 물었더니 절강(浙江)의 거인(擧人)으로서 과거 보러 북경에 올라와 정양문(正陽門) 밖 건정동(乾淨衕)에 하숙하고 있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기성은 그날 저녁에 그 안경을 가지고 내게로 와서 그 사유를 말하고 나에게 화전(花箋)을 구해 가지고 가서 그들에게 보답하겠다고 한다(항전척독(杭傳尺牘), 「건정동필담(乾淨衕筆談)」, 『국역 담헌서』). 이렇게 하여 만난 것이 엄성(嚴誠)과 반정균(潘庭均)이다. 엄(嚴)은 자가 역암(力闇)이요, 호는 철교(鐵橋)이며 나이는 35세였고, 반(潘)은 자가 난공(蘭公)이요, 호는 추루이며 나이는 25세였다. 이로부터 이들은 거의 날마다 찾아오고 찾아가고 하면서 경의(經義)·성리(性理)·시문(詩文)·서화(書畵)·역사(歷史)·풍속(風俗)·과학(科擧) 등에 관하여 흉금(胸襟)을 터놓고 필담을 교환하였다. 2월 23일의 모임에는 한 사람의 친구가 더 생기게 되었으니 그는 육비(陸飛)이다. 그의 자는 기잠(起潛)이요, 호는 소음(篠飮)이요, 나이는 48세다. 이렇게 만난 그들은 2월 한 달 동안 모두 일곱 번이나 만났다. 그리고 만나지 못한 날은 매일 편지를 주고받았다. 홍대용은 그때의 만남을 “한두 번 만나자 곧 옛 친구를 만난 듯이 마음이 기울고 창자를 쏟아 형님 동생 하였다.”고 했으니, 그 우정의 깊음을 미루어 볼 수 있다. 그들은 주자학·양명학과 조선역사에 대해 끝없는 대화를 나누었고 또 무수한 시문을 주고받았다. 홍대용은 자기보다 한 살 아래인 엄성과 특히 가까웠다. 엄성은 민(閩)이란 땅에서 병이 위독할 때 홍대용이 선물로 준 조선산 먹을 꺼내어 향기를 맡다가 가슴에 올려놓은 채 운명하였다. 그의 죽음을 듣고 하늘이 자신을 괴롭힘이 너무도 혹독하다며 통곡한 홍대용이 보낸 애사와 향폐는 엄성이 죽은 지 두 해째 맞는 제사에 당도하여 항주의 선비들을 경탄시켰다. 엄성은 홍대용과 이기성의 초상화도 그려 주었다. 엄성은 본래 그림을 잘 그렸고 특히 백묘 인물화에 능하여 자화상을 그린 일도 있었는데 그가 그린 홍대용의 초상 또한 백묘인물화였다. 반정균은 홍대용을 「담헌기(湛軒記)」라는 글에서 이렇게 칭송했다. 홍대용은 기상이 높고 문견이 넓으니, 중국 서적 중에 보지 않는 것이 없고, 율력·전진의 법과 염락관민의 종지를 궁구하지 않음이 없다. 또한 시문으로부터 산수에 이르기까지 능치 못함이 없고 이론을 들으매 옛사람을 일컫고 의리를 근본으로 삼으니 짐짓 유자의 기상이 있다. 이는 중국에서도 쉽지 않은 인품이거늘 어찌 진한의 황원한 지경에서 얻을 수가 있을 것인가?(반정균, 「湛軒記」, 홍대용, 『국역 담헌서』) 담헌은 연경에서 결의형제를 맺었던 항주(杭州)의 선비 육비·엄성·반정균 등과 기타 중국인 벗들과 귀국 후에도 서신이 끊이질 않았다. 이 교환한 서신 모음이 『항전척독(杭傳尺牘)』이다. 그 내용을 보면 육비와 4통, 엄성과 4통, 엄성의 형 구봉(九峯)과 3통, 엄성(嚴誠)의 아들 엄앙과 2통, 반정균과 4통, 서광정(徐光庭)과 1통, 등문헌(鄧汶軒)과 4통, 손용주(孫蓉洲)와 5통, 조매헌(趙梅軒)과 2통, 주랑재(朱郎齋)와 1통 등 총 30통의 서신으로 되어 있다. 그 내용은 경의·역사·문예·서화·수양·예속·유불도의 비교, 주륙(朱陸)의 이동, 육왕(陸王)의 비판 등이다. 「건정동필담(乾淨衕筆談)」은 건정동에서 엄성·반정균·육비 세 사람을 만나서 필담한 ‘담초(談草)’이다. 그들은 하루하루 서로 만나는 회수가 잦아지며 피차의 학문·취미·성격·가계 등을 서로 알게 되자 더욱 정분이 두터워지고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마침내 지기로서의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던 것이다. ○ 양 한 마리를 잊다 : 박지원의 『열하일기』 홍대용의 연행 이후 13년이 지난 1778년에 이덕무와 박제가가 연경에 갔고, 2년 뒤인 1780년엔 연암 박지원이 중국을 다녀와서는 문체반정을 이끈 문제작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저술했다. 박지원은 정조 4년, 곧 1780년에 그의 삼종형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의 수행원으로, 청 고종(高宗)의 70수를 축하하기 위하여 중국에 들어가, 성경(盛京)·북평(北平)·열하(熱河) 등지를 여행하고 돌아와서 이 책을 엮었다. 여기에는 중국의 역사·지리·풍속·습속·고거·건설·인물·정치·경제·사회·종교·문학·예술·고동 등에 이르기까지 이에 수록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의 시야는 승지·명찰에 그치지 않고, 이용후생적(利用厚生的)인 면에 중점이 놓였다. 또한 『열하일기』는 중국의 수많은 문사와의 교류를 담고 있다. 특히, 열하의 태학에서 묵은 6일 동안의 기록인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은 중국의 학자 윤가전(尹嘉銓)·기풍액(奇豐額)·왕민호(王民皥)·학성(郝成) 등과 두 나라의 문물·제도에 대한 논평을 전개하다가 그 대화가 월세계(月世界)·지전(地轉)의 설에까지 이른다. 「경개록(傾蓋錄)」 또한 태학에서 청나라 학자와 응수한 기록이고, 「망양록(忘羊錄)」은 윤가전·왕민호 등과 함께 음악에 대한 견해를 나눈 기록이다. 그리고 윤가전과 함께 전일 태학에서 미진한 이야기를 계속한 기록이 「혹정필담(鵠汀筆談)」에 전한다. 그 가운데 「망양록」의 한 대목은 이들의 진정어린 교유를 정감 있게 보여준다. 아침에 윤형산(尹亨山) 가전(嘉銓)과 왕혹정(王鵠汀) 민호(民皥)를 따라서 수업재(修業齋)에 들어가 악기(樂器)를 훑어보고 돌아오다가 형산의 처소에 들렀더니 윤공은 양을 통째로 쪄 놓았는데, 이것은 오로지 나를 위해서 차린 것이다. 바야흐로 악률(樂律)이 고금에 같고 다른 것을 이야기하느라고 음식 차려 놓은 지가 오래지만 서로 먹으라 권하지 못했는데, 얼마 있다가 윤공이 양을 아직 찌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심부름하는 자가 대답하기를, 차려 놓은 것이 벌써 식었다고 하므로, 윤공은 자기가 정신을 못 차리고 두서가 없었다고 사과한다. 나는, “옛날, 공자는 소(韶)를 듣노라고 고기맛을 잊었다더니, 이제 나는 대아(大雅)의 이야기를 듣다가 양 한 마리를 잊었습니다.” 했더니, 윤공은, “이른바 장(臧)과 곡(穀)이 모두 양을 잊었다는 것이올시다.” 하여, 서로 크게 웃었다. 이에 그 필담(筆談)한 것을 모아서 망양록(忘羊錄)이라 이름한다. 윤가전은 양 한 마리를 쪄서 아침 일찍 방문한 박지원을 극진히 대접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음율의 고금 변증에 관한 이들의 필담은 그 정겨운 만큼이나 깊어 차려놓은 음식을 잊을 정도였다. 겨우 논의하던 바를 수습하여 윤가전이 미리 준비한 양 한 마리가 쪄진 것을 묻자, 시비는 이미 식은 지 오래라고 한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누다가 쪄 놓은 양을 잊었으니, 이 필담을 일러 「망양록(忘羊錄)」이라고 부른 것이다. ○ 북경 학계와의 교류: 박제가와 유득공 홍대용이 귀국한 지 8년이 되는 1773년(건륭 38)부터 중국에서는 『사고전서(四庫全書)』 편찬이라는 경이적인 대사업이 시작됐다. 이 사업은 건륭 황제가 필생의 힘을 기울인 문화 사업이다. 10년간 361명의 석학을 동원하여 총 36,000책을 4질 제작하여 네 곳의 서고에 보관케 했다. 본래 건륭제가 이 편찬사업을 벌인 목적은 금서를 색출하기 위한 것이나, 미증유의 이 학술사업으로 전국의 학자들이 연경에 모여 학술을 번창시켰다. 북학파들이 만난 학자들은 대개 이 『사고전서』 편찬위원들이었다. 박제가와 친했던 기윤(紀昀)은 『사고전서』 편찬의 총책임을 맡은 학계의 거물이었으며, 추사 김정희의 스승이 된 옹방강(翁方綱)을 비롯하여 우리 학자와 친밀하게 교류했던 이정원(李鼎元)·대심형(戴心亨) 등이 이 편찬사업의 담당자였다. 『사고전서』의 편찬사업이 진행되는 동안 자연히 전국의 책들이 연경의 유리창으로 쏟아져 들어 왔다. 엄청난 양의 책들이 배에 실려 연경에 들어오면서 유리창은 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유리창에는 수십 개의 서점이 있었는데, 조선 학자들에게 많은 책을 구해주고 정보도 제공해 주었다. 학예의 열풍이 불고 있던 연경의 자장 내에 들어온 조선 학자들이 연경에 머물던 청나라 학자·예술가들과의 접촉이 상당히 높아졌다. 박제가는 알고 지낸 청조 문인이 100명이 넘었다. 게다가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이 이미 연경 학계에 소개되어 박제가의 명성이 상당하였다. 『한객건연집』은 이덕무·유득공·박제가·이서구의 시를 탄소(彈素) 유금(柳琴)이 1777년(정조 1) 선정하여 편집한 시집으로, 필사본이며 간행여부는 알 수 없다. 책머리에 청의 당대 제일가는 시인이던 서호 반정균, 우촌 이조원이 쓴 서문이 있어 편찬경위를 알 수 있는데, 1776년(영조 52) 사은부사로 청에 간 서호수의 막관인 유금이 이조원을 방문하여 『건객시집』을 보이면서 비정을 청했으며, 이조원에게 부탁하여 반정균의 비정도 청했다 한다. 그러므로 본집에는 사가의 시가 각기 수록된 뒤에 각인에 대한 이·반 두 사람의 평이 첨부돼 있어, 이들 사이의 교류 관계를 살펴 볼 수 있다. 이처럼 박제가가 연경학계에서 유명해지자 만난 일은 없지만 서신으로 교류하는 인사도 생기곤 하였다. 훗날 박제가의 셋째 아들인 박장엄(朴長馣)이 아버지가 중국 문인들과 교유한 시와 편지 등 시문을 2책으로 엮어 펴낸 『호저집(縞紵集)』에는 청조 문인이 무려 172명이나 등장한다. 『호저집』은 박장엄에 의해 편찬된 6권 2책의 필사본이다. 박장엄은 바로 초정의 셋째 아들로 자는 향숙(香叔) 호는 정벽(貞碧)이라 한다. 그는 1780년(정조4년)에 태어나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검서관을 역임하고 벼슬은 현령을 지냈다. 『호저집』은 그의 나이 30세 되던 1809년에 편찬한 것으로, 모두 6권 2책으로 되어 있다. ‘호저’라는 말은 오(吳)나라의 계찰(季札)이 정(鄭)나라의 자산(子産)에게 ‘흰 명주 띠’(縞)를 선사하자, 자산이 그 답례로 계찰에게 ‘모시옷’(紵)을 보낸 고사에서 연유된 것으로, 곧 국제간의 친한 벗들 사이에 주고받은 선물이나 그 교제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이는 박제가가 중국의 문인들과 창수한 시문이나 척독 등을 모아 엮은 것으로, 편찬자인 박장엄은 유완원(柳完元)의 「선우기(先友記)」의 편찬의도를 따라 이 책을 엮고 이름을 『호저집』이라 붙였다. 이 책은 4차에 걸친 초정의 연행시기로 나누어 편찬되었는데, 무술(1778)은 권1, 경술(1790)·신해(1781)는 권2, 신유(1781)는 권3에 각각 배열되어 있다. 상책은 교유 인물들의 과갑·명호·작리·사실 등을 전문한 바에 의해 고찰하고 이것을 모아 엮어 「찬집」이라 하였고, 하책은 서로 주고받은 시문·척독·제평 등을 합하여 각 인물별로 엮어 「편집」이라 했다. 상책은 교유인물의 파계와 연원 그리고 사승·붕우·출처 등의 제반 사실을 상세히 고찰하여 전기의 형식으로 재구성해 놓았고, 하책은 주고받은 글들을 순서에 따라 나열하고 있다. 『호저집』은 18·19세기 실학시대의 한중 문인지식층의 교유양상을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담헌으로부터 시작된 청조 문인들과의 교류가 양국 문인들의 단순한 지적 호기심으로부터 벗어나 점차 학술과 문화의 상호 교류를 통해 서로의 학문과 예술, 그리고 문화의 수준을 재고시켜보자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지니고 있음을 보게 된다. 따라서 그 교유양상도 단순하게 시문을 서로 수창하는 범주에서 벗어나 서로의 역사와 문화·풍속·학술의 변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부분에 걸쳐 아주 진지하게 학술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이처럼 조선 지식인 사회는 점점 청조 문화와 활발히 교류하였고, 청나라 학문과 예술의 신경향은 조선 사회에 충격을 주어 종래의 고답적인 사상과 학문과 예술을 크게 변화시켰다. 청조 문화와 문물에 대한 박제가의 적극적인 수용 태도는 조선 학계에 북학(北學)의 높은 바람을 일으키는 데 모자람이 없었다.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 서문에 쓴 박지원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북경 학계와 교유를 통해 초정이 다다른 학문적 지경을 여실히 보여준다. 유득공의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는 장대한 민족서사시라고 할 만한 것이다. 『이십일도회고시』는 유득공이 31세때 『동국지지(東國地誌)』를 읽으면서 단군조선의 왕검성, 가야의 김해, 백제의 부여 등 부족국가 이래로 수도가 된 적이 있는 21곳의 옛 도읍을 43수의 시로 읊은 역사회고시이다. 이것은 선후배들이 모두 감동한 명작으로, 박제가와 이덕무가 연경에 갈 때 일종의 민족적 긍지의 징표로 가져가 청조 문인들에게 자랑하며 보여주어 상찬을 받았다. 그 뒤 유득공이 연경에 갔을 때는 이 시로 인해 도처에서 많은 문사들의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유득공은 갖고 있던 자신의 수고본을 기윤에게 선물했는데, 나빙이 이걸 탐내서 자기도 한 부 달라고 졸라댔다. 그러나 유득공은 가진 것이 없어 줄 수 없었다. 그로부터 10년 뒤 박제가가 다시 연경에 갔을 때 나빙의 책상에 바로 그 유득공의 『이십일도회고시』가 한 부 놓여 있는 것을 보고 그 연유를 물으니, 자신이 기윤의 것을 빌려 정성껏 베껴서 책으로 꾸며가지고 애장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후 기윤이 갖고 있던 유득공의 자필본 『이십일도회고시』 원첩은 옹방강의 소유가 되었다가 그가 죽자 제자인 섭지선(葉志詵)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청말에 조지겸(趙之謙)의 소유가 되어 그가 『학재총서(鶴齋叢書)』를 출간할 때 이 시집도 간행하였다. 그래서 이 책은 청나라에서 먼저 출간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1934년에야 한남서림에서 출간된다. 유득공은 자를 혜보(惠甫), 또는 혜풍(惠風), 호를 영재(泠齋)·영암(泠庵)·고운당(古芸堂)이라 하고, 본관은 문화(文化)인데, 영조 25년(1749)에 진사 유운(柳運)의 서자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조 3년(1779)에 규장각(奎章閣)이 이룩되자 규장각 검서(檢書)로 발탁되었다. 유득공이 처음으로 연경에 간 것은 본 『연대재유록(燕臺再遊錄)』이 쓰여 지기 11년 전인 정조 14년(1790)이었다. 그의 처음 연행기인 『난양록(灤陽錄)』은 경술년 5월 24일 진하부사(進賀副使) 서호수(徐浩修)의 종관(從官)으로 박제가등과 함께 서울을 출발, 7월 15일 열하(熱河)의 잔치에 참석하여 몽고·회회(回回)·안남(安南)등의 왕과 만나고, 8월 13일 연경에 도착하여 황제의 만수절(萬壽節)에 참석했으며, 10월 10일에 압록강을 건너 온 것을 시(詩)로 감상을 쓰고 시의 해설같이 일정기(日程記)를 쓴 것이다. 그리고 기윤(紀畇)·반정균(潘庭筠)·이정원(李鼎元) 등 많은 그 곳의 학자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실려 있다. 유득공의 『연대재유록』에도 청나라 학자들과의 깊은 교유가 잘 그려져 있다. 연경에 도착한 이튿날 대학자이며 상서(尙書)인 기윤을 방문하여 『주자전서』의 구입에 대한 협조를 요청하자 기윤은 유득공의 시문을 보여주기를 청했다. 하여 몇 편의 글을 주어 평을 청하고 그쪽 학계의 실정과 서지(書志)에 대한 토론을 나누었다. 그러고 나서 유구에 사신을 갔다 온 이정원(李鼎元)을 만나 청과 유구·일본 등과의 외교관계를 알아보고는 『주자전서』를 구하는데 협조를 얻었다. 또 진전(陳鱣)이란 신진 학자를 만나 우리나라 사정에 대한 질정을 받는다. 진전은 『설문해자정의(說文解字正義)』 30권을 저술한 훈고학(訓誥學)의 대가였다. 그리고 역시 진전의 친구이며 『맹자해의(孟子解誼)』·『소미아교증(小爾雅校證)』 등 많은 저술이 있는 전동원(錢東垣)을 만났는데, 그가 『사고전서(四庫全書)』교감에 쓰겠다고 유득공의 저작을 굳이 청하므로 「발해고(渤海考)」 의례(義例)를 적어 주었다. 북학파의 지기 가운데 유득공은 뒤늦게 중국을 왕래하였지만, 당대의 대표적인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면서 자신의 대청관 내지 문화의식을 피력하였다. 그가 중국 문사들과 교유하였던 시기는 『북학의』와 『열하일기』가 당대 지식인층에 커다란 충격을 주고, 정조의 문체반정으로까지 비화되었던 때였다. 따라서 유득공의 저술과 교유의 내용은 이와 같은 현실의 모순과 문제의식을 진전된 형식으로 구체화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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