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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일행, 이를 닦는 솔을 선물받다
배삼익 일행이 늦게 망룡교(莽龍橋)를 출발하여 장가점(章家店)ㆍ
신점(新店)
ㆍ
칠가령(七家嶺)
을 지나 칠가(七家)에 있는 유이(劉二)의 집에 유숙하였다. 유이가 이를 닦는 솔을 선물로 주었다.
다음날 오후에 대란하(大鸞河) 가에서 휴식을 하고 배로 양하(兩河)를 지나 저녁에 영평부(永平府) 남쪽 주희등(周希登)의 집에서 유숙하였다. 양하 주변의 전답과 집들이 남김없이 침수되어 있었고 성안도 마찬가지였으며 사망한 여인과 어린아이들도 많았다.
어떤 이는 담장과 벽을 수리하느라 목재를 수습해 가기도 하고 혹은 산에 올라 나무에 둥지를 틀고 거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직접 본 것들이 너무도 참혹하니, 예로부터 이와 같이 심한 물난리는 없었던 듯하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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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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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조천록(朝天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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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배삼익(裵三益)
주제 : 사행, 학문
시기 : 1584-07-29 ~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일기분류 : 사행일기
인물 : 배삼익
참고자료링크 : (참고자료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 조선시대 사람들의 양치질
옛 문헌을 살펴보면 ‘니 닥 샤’, ‘초여집’, ‘양치’ 등과 같은 표현이 나오는 것을 보아, 예전에도 지금의 ‘칫솔’에 해당하는 기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양칫소금(양치할 때에 쓰는 소금)’이라는 단어가 아직도 쓰이고 있는 것을 보면 지금의 ‘치약’을 대신하여 ‘소금’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튜브형 ‘치약’이 일반화되기 바로 전에는 ‘치분(齒紛)’ 또는 ‘치마분(齒磨紛)’이라는 ‘가루로 된 치약’이 쓰이기도 하였다. 예전에 지금의 ‘칫솔’과 같은 기구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누구나 쓸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지체가 높거나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나 쓸 수 있는 사치품이었을 것이다. 삶이 고달픈 대부분의 백성들은 이 닦는 일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을 것이며, 이를 닦는다 하더라도 ‘손가락’이면 족했을 것이다.
물론, 예전에는 ‘소금’이 귀하여 이를 닦을 때 늘 ‘소금’을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소금’이 없는 경우에는 그저 입에 물을 넣고 입속에 있는 음식 찌꺼기를 헹구어내는 데 그쳤다. ‘입안을 헹구는 일’이 소박한 의미의 양치질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입안을 가시어 내는 일’을 ‘양지’ 또는 ‘양지’에 접미사 ‘-질’을 덧붙여 ‘양지질’이라 하였다. ‘양지’는 한자 ‘楊枝(양지)’로 ‘버드나무 가지’라는 뜻이다. 이 버드나무 가지는 이쑤시개로 안성맞춤이다. 아주 이른 시기에는 잘게 자른 버드나무 가지를 가지고 ‘이’를 청소하였다. 바로 이것이 ‘이 닦기’의 초기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양지’는 이미 조선시대에 ‘입안을 헹구는 일’이라는 의미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17세기 말 이후에는 ‘양치’로 어형까지 변해 나온다. ‘양지’가 ‘양치’로 변하면서, ‘양지질’도 의당 ‘양치질’로 변하였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1584년 7월
29일. 맑음.
늦게 망룡교(莽龍橋)를 출발하여 장가점(章家店)ㆍ신점(新店)ㆍ칠가령(七家嶺)을 지나 칠가(七家)에 있는 유이(劉二)의 집에 유숙하였다. 유이가 우리들에게 양치하는 솔을 선물로 주었다.
30일. 맑음.
오후에 대란하(大鸞河) 가에서 휴식을 하고 배로 양하(兩河)를 지나 저녁에 영평부(永平府) 남쪽 주희등(周希登)의 집에서 유숙하였다. 양하 주변의 전답과 집들이 남김없이 침수되어 있었고 성안도 마찬가지였으며 사망한 여인과 어린아이들도 많았다.
어떤 이는 담장과 벽을 수리하느라 목재를 수습해 가기도 하고 혹은 산에 올라 나무에 둥지를 틀고 거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직접 본 것들이 너무도 참혹하니, 예로부터 이와 같이 심한 물난리는 없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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