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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을 갈던 여인, 알고 보니 딸이로다! - 타향에서 포로로 잡혀간 딸과의 극적 상봉
1645년 4월 13일, 사신단 일행은 묘시(卯時:오전 5〜7시)에 출발하였는데, 만주인 40명이 호위하였다. 산 뒤의 지름길로 가서 봉수대 아래에서 점심을 먹었다. 가는 길에
송점(松店)
을 지났는데, 오랑캐 여자들이 모여서 구경하였다. 그 중 바위에 기대어 서 있는 사람이 슬프게 바라보았다. 옹후(甕後) 고개 2개를 넘자 여인들이 밭에서 파종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쪽으로 달려왔다. 보니 우리나라 사람이었다.
“너는 조선 여자 아니냐?” 하고 물으니
“온양사람입니다.” 라고 답했다.
“조선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느냐?” 라고 다시 물으니
“돌아가고는 싶지만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였다.
강을 8번 건넜는데, 7번째 건넌 곳이
옹후하(甕後河)
였다. 저녁에 7번째 강가에서 노숙하였다. 배꽃이 만발하고 두견화도 아직 남아 있었다. 대군(인평대군)이 두견화로 전을 부쳐 나누어주었으니, 풍토와 절기가 이같이 달랐다.
봉황(鳳凰)
이후 4〜5리 사이에는 모두 봉수대가 있었다.
14일, 묘시(卯時:오전 5〜7시)에 출발하였다.
통보(通堡)
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일명
진이(鎭夷)
라고도 한다. 들판에 성이 하나 있는데 명(明)나라 때 건축한 것이고, 산에 성이 하나 있는데 만주 사람들이 세운 것이다.
장두리(庄頭里)
에서 돼지와 거위, 그리고 말여물 등을
참공(站供)
으로 보냈다.
하마구(蝦蟆狗)
를 끌고 가던 오랑캐 아이 하나가 앞에 와서 앉고는 발을 들고 손을 쳐들었는데, 마치 거지가 구걸하는 형상이었다. 대나무를 주니 곧 일어서서 갔다. 하마(蝦蟆)는 개의 별종으로, 가장 작은 것은 큰 고양이와 비슷하지만 커다란 개를 대적할 수 있다고 한다.
오랑캐 여자 수십 명이 와서 인사를 했다. 그 중 한 아이가 매우 예쁘고 눈매가 또렷하여 나이를 물으니 손가락으로 열넷을 꼽았다.
부사(副使)
가 과자와 차를 주었다. 그들은 모두 옷깃을 여민 뒤 무릎을 꿇고 받았으며 오른손으로 오른쪽 귀밑머리를 만지며 일어났다. 이는 오랑캐 여자들이 답례하는 모습이다.
출발하여
논동(論洞)
에 도착한 뒤 부사와 성이성은 봉수대를 지키는 사람의 집에서 잠시 쉬었다. 집주인은 한족으로, 성명은
증정춘(曾正春)
인데 자녀가 7명이라고 하였다.
역관을 시켜
“복 받은 분이네요.” 하니
대답하기를
“이 몸이 오랑캐가 되어 봉수대를 지키며 사는데 무슨 복이 있나요?” 하였다.
나장탑(羅將塔)
에 도착하니 의주 군관(義州軍官)
홍지남(洪地南)
이 북쪽에서 달려와서는
봉림대군
이 이미 초6일에 산 쪽에 도착하였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길가에 3명의 오랑캐가 밭을 갈고 있었는데, 흙을 부수던 여인이 바로 서울사람
예남(禮男)
의 딸이었다.
예남이 마침 일행 중에 있어 홀연 서로 만나 얼싸안고 통곡했다. 돈을 주고 데려오려 해도 그럴 수 없고 그냥 떠나자니 그러기도 어려워 길 가던 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저녁에 연산관(連山館)에 묵었는데, 사방 10리가 안 되는 곳으로 지명이
풍시령(風時嶺)
이다.
연일 안개가 끼어 기운이 매우 불안정한데다 사신 행렬이 연속 2번 지나가며 세금 징수가 있어서 부사와 성이성은 봉수대로 갔다. 막 자려는데 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것이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이날은 70여 리를 갔다.
4월 18일, 묘시(卯時:오전 5〜7시)에 출발하여
석문령(石門嶺)
을 넘어
냉정촌(冷井村)
에서 점심을 먹었다. 우물물이 솟아 나오는데 물이 아주 차고 맑았다. 마을 이름은 이것 때문에 지어진 것이다. 어린 아이 하나가 장막 앞에 와 서서는 자신을 소개했다. 자기는 종실
계양령(桂陽令)
의 자손으로 나이는 10살이며 포로로 잡혀 한인 집에 팔렸는데, 지난 해 도망을 나왔다가 잡혀 곤장 100대를 맞고 지금 막 도망가려는데 그 기회를 얻었다고 하였다. 대군의 군관
이준한(李俊漢)
이 그의 6촌이어서 그와 뒷날에
속환(贖還)
하기로 약속을 하였으나, 그 아이가 목메어 울며 차마 떠나질 못했다.
4월 28일, 진시(辰時:오전 7〜9시)에 출발하여 서쪽으로 30리를 가니 새로 만든 다리에 도착하였다. 다리 공사를 끝낸 후 대단히 사치스럽고 큰 비석을 세웠는데, ‘관대하고 온화한 인성황제[仁聖皇帝]께서
영안교(永安橋)
를 세우라 명하셨다.’라고 적혀 있었다.
안산(安山) 사람
이수(李守)
는 부사(副使)가 군수(郡守)로 있을 때
통인(通引)
이었는데, 오랑캐에 잡혀
심양(瀋陽)
에 있다가 부사와 만났다. 부사에 대한 정성이 매우 지극하여 이날은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배를 많이 가지고 와 말을 타고 갈 때의 갈증을 풀게 해주어 양 2마리를 선물로 주었다.
5월 1일, 묘시(卯時:오전 5〜7시)에 출발하여
오리포(五里鋪)
에서 점심을 먹었다. 오리포 안에는 조선 사람이 많았는데, 그 중 한 여자는
서흥(瑞興)
검수(劍水)
사람이었다. 황해도 지역 사람들이 왔다는 말을 듣고는 달려와 인사하고
“누가 황해도 사람인가요? 심양에 잡혀온 사람들은 혹 고향 소식을 들었으나 나는 너무나 먼 곳에 있어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알지 못해요. 지금 근처의 사람을 만나니 가족을 만난 듯 하네요.”라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가 술을 가지고 와 마시게 했다. 성이성이 듣고는 불러서 그 뜻을 불쌍히 여겨 과일과 담배를 주었다. 여자가 받고는 먹지 않으며 말했다.
“이것은 조선 물건이네요.” 하면서
그리고는 눈물을 줄줄 흘린 뒤 말했다.
“돌아가실 때도 이 길로 가시나요?”
여자는 가난하기는 하지만 술을 빚어 기다리겠다고 하였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멀티미디어
관련이야기
출전 :
연행일기(燕行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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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성이성(成以性)
주제 : 사행, 학문
시기 : 1645-04-13 ~ 1645-05-01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일기분류 : 사행일기
인물 : 성이성, 인평대군, 예남, 예남의 딸, 오랑캐아이들, 부사, 증정춘, 홍지남, 이준한, 이수, 서흥 검수 여인
참고자료링크 :
승정원일기
웹진 담談 12호
조선왕조실록
◆ 병자호란 당시의 포로들의 처지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조선의 남자들은 전쟁터로 나가고 여인들은 청(淸)나라 군대의 포로로 끌려갔다. 끌려갔던 양반 사대부가의 아낙과 규수들은 높은 속환가를 지불하고 돌아오고, 일부 운이 좋은 여성들은 조선 정부의 노력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그러나 돈 없고 권세 없는 일반 백성들의 아낙과 딸들은 대부분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
청군도 납치한 남녀노소 양민을 전리품으로 보고 속가(贖價 : 포로를 풀어주는 대가로 내는 돈)를 많이 받을 수 있는 종실과 양반의 부녀를 되도록 많이 잡아가려 했다. 그러나 잡혀간 사람들은 대부분 속가도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속가는 싼 경우 1인당 25 내지 30냥이나, 대개의 경우 150 내지 250냥이었고, 신분에 따라 1,500냥에 달하는 경우도 있었다. 여기에 순절하지 못하고 살아서 돌아온 것은 조상에게 죄를 짓게 된다고 해 속환 사녀(士女)의 이혼 문제가 정치·사회 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한편, ‘우리가 끌고 가는 조선인 포로들 가운데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탈출에 성공하는 자는 불문에 부친다. 하지만 일단 강을 건너 한 발짝이라도 청나라 땅을 밟은 다음에 도망치는 자는 조선이 도로 잡아 보내야 한다.’ 1637년 1월, 청 태종(太宗)이 조선의 인조(仁祖)로부터 항복을 받을 당시 조선 조정에 제시했던 포로 관련 조건이었다.
◆ 원문 번역
1645년 4월 13일 날씨 맑음. 묘시(卯時: 오전5〜7시)에 출발하였는데, 만주인 40명이 호위하였다. 산 뒤의 지름길로 가서 봉수대 아래에서 점심을 먹었다. 가는 길에 송점(松店)을 지났는데, 오랑캐 여자들이 모여서 구경하였다. 그 중 바위에 기대어 서있는 사람이 슬프게 바라보았다. 옹후(甕後) 고개 2개를 넘자 여인들이 밭에서 파종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쪽으로 달려왔다. 보니 우리나라 사람이었다. 물었다. “너는 조선 여자 아니냐?” 대답하였다. “온양사람입니다.” 다시 물었다. “조선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느냐?” 대답하였다. “돌아가고는 싶지만 어떻게 하겠습니까?” 강을 8번 건넜는데, 7번째 건넌 곳이 옹후하(甕後河)였다. 저녁에 7번째 강가에서 노숙하였다. 배꽃이 만발하고 두견화도 아직 남아있었다. 대군이 두견화로 전을 부쳐 나누어주었으니, 풍토와 절기가 이같이 달랐다. 봉황(鳳凰) 이후 4〜5리 사이에는 모두 봉수대가 있었다.
1645년 4월 14일 날씨 맑음. 묘시(卯時: 오전5〜7시)에 출발하였다. 통보(通堡)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일명 진이(鎭夷)라고도 한다. 들판에 성이 하나 있는데 명나라 때 건축한 것이고, 산에 성이 하나 있는데 만주 사람들이 세운 것이다. 장두리(庄頭里)에서 돼지와 거위, 그리고 말여물 등을 참공(站供)으로 보냈다. 하마구(蝦蟆狗)를 끌고 가던 오랑캐 아이 하나가 앞에 와서 앉고는 발을 들고 손을 쳐들었는데, 마치 거지가 구걸하는 형상이었다. 대나무를 주니 곧 일어서서 갔다. 하마(蝦蟆)는 개의 별종으로, 가장 작은 것은 큰 고양이와 비슷하지만 커다란 개를 대적할 수 있다고 한다. 오랑캐 여자 수십 명이 와서 인사를 했다. 그 중 한 아이가 매우 예쁘고 눈매가 또렷하여 나이를 물으니 손가락으로 14를 꼽았다. 부사(副使)가 과자와 차를 주었다. 그들은 모두 옷깃을 여민 뒤 무릎을 꿇고 받았으며 오른 손으로 오른쪽 귀밑머리를 만지며 일어났다. 이는 오랑캐 여자들이 답례하는 모습이다. 출발하여 논동(論洞)에 도착한 뒤 부사와 나는 봉수대를 지키는 사람의 집에서 잠시 쉬었다. 집주인은 한족으로 성명은 증정춘(曾正春)인데 자녀가 7명이라고 하였다. 역관을 시켜 말하였다. “복 받은 분이네요.” 대답하였다. “이 몸이 오랑캐가 되어 봉수대를 지키며 사는데 무슨 복이 있나요?” 나장탑(羅將塔)에 도착하니 의주 군관(義州軍官) 홍지남(洪地南)이 북쪽에서 달려와서는 봉림대군이 이미 초6일에 산 쪽에 도착하였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길가에 3명의 오랑캐가 밭을 갈고 있었는데, 흙을 부수던 여인이 바로 서울사람 예남(禮男)의 딸이었다. 예남이 마침 일행 중에 있어 홀연 서로 만나 얼싸안고 통곡했다. 돈을 주고 데려오려 해도 그럴 수 없고 그냥 떠나자니 그러기도 어려워 길 가던 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저녁에 연산관(連山館)에 묵었는데, 사방 십리가 안 되는 곳으로 지명이 풍시령(風時嶺)이다. 연일 안개가 끼어 기운이 매우 불안정한데다 사신 행렬이 연속 2번 지나가며 세금 징수가 있어서 부사와 나는 봉수대로 갔다. 막 자려는데 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것이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이날은 70여 리를 갔다.
1645년 4월 18일 날씨 맑음. 묘시(卯時: 오전5〜7시)에 출발하여 석문령(石門嶺)을 넘어 냉정촌(冷井村)에서 점심을 먹었다. 우물물이 솟아 나오는데 물이 아주 차고 맑았다. 마을 이름은 이것 때문에 지어진 것이다. 어린 아이 하나가 장막 앞에 와 서서는 자신을 소개했다. 자기는 종실 계양령(桂陽令)의 자손으로 나이는 10살이며 포로로 잡혀 한인 집에 팔렸는데, 지난해 도망을 나왔다가 잡혀 곤장 1백대를 맞고 지금 막 도망가려는데 그 기회를 얻었다고 하였다. 대군의 군관 이준한(李俊漢)이 그의 6촌이어서 그와 뒷날에 속환(贖還)하기로 약속을 하였으나, 그 아이가 목메어 울며 차마 떠나질 못했다. 오시(午時: 오전11시〜오후 1시)에 오미참(五美站)을 지나 행렬이 요동(遼東) 들판으로 나왔는데, 성곽과 백성이 모두 옛 모습이 아니었다. 천 년 전의 화서(華胥)도 유적이 없었고, 오직 광고사(廣枯寺)의 백탑(白塔) 만이 우뚝 솟아 있었다. 그 비문을 살펴보니 영락 4년인 기사년(1406)에 태감 하영(賀榮)이 이 성에 와서 진을 치고 중수했으며, 진사 황수(黃繡)가 비문을 지었고 김면(金冕)이 전각을 하고 허장(許莊)이 글씨를 써서 비를 만든 것이다. 저녁에 신성(新城) 5리 밖 태자하(太子河) 기슭에서 묵었는데, 미친 듯한 바람이 하루 종일 불고 큰 비가 밤새도록 내렸다. 그래서 나와 부사는 한인 유승의(劉承義) 집에 들어갔다. 주인이 다과를 내오고 또 등을 밝힌 뒤 조촐하게 술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그의 아들 문량(文亮)은 나이가 13살로 마침 『논어(論語)』를 읽고 있었다. 시험삼아 강독을 시켜보니 막히는 곳이 없어서 그에게 붓과 먹을 선물로 주었다. 이날은 50리를 갔다.
1645년 4월 28일 날씨 맑음. 진시(辰時: 오전7〜9시)에 출발하여 서쪽으로 30리를 가니 새로 만든 다리에 도착하였다. 다리 공사를 끝낸 후 대단히 사치스럽고 큰 비석을 세웠는데, ‘관대하고 온화한 인성황제[仁聖皇帝]께서 영안교(永安橋)를 세우라 명하셨다.’라고 적혀있었다. 안산(安山) 사람 이수(李守)는 부사(副使)가 군수(郡守)로 있을 때 통인(通引)이었는데, 오랑캐에 잡혀 심양(瀋陽)에 있다가 부사와 만났다. 부사에 대한 정성이 매우 지극하여 이날은 술과 안주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배를 많이 가지고 와 말을 타고 갈 때의 갈증을 풀게 해주어 양 2마리를 선물로 주었다. 점심을 먹고 출발하여 서남쪽의 길로 가니 큰 들판이 넓디넓게 펼쳐져 있어 끝이 없었고 단지 북쪽 하늘가에 몇 점의 산만이 구름같이 보일 뿐이었다. 저녁에 토성(土城)에 묵었는데 외성(外城)은 높이가 큰 둑에 불과했으나 옆으로 길게 이어지 것이 몇 백리가 되는지를 몰랐다. 5리〜10리마다 대보(臺堡)가 보였는데 몽고의 장성(長城)이라 전해진다. 이는 중국과 오랑캐 사이에 성으로 경계를 지어놓은 듯 하다. 이날은 60여 리를 갔다.
1645년 5월 1일 날씨 흐림. 묘시(卯時: 오전5〜7시)에 출발하여 오리포(五里鋪)에서 점심을 먹었다. 오리포 안에는 조선 사람이 많았는데, 그 중 한 여자는 서흥(瑞興) 검수(劍水) 사람이었다. 황해도 지역 사람들이 왔다는 말을 듣고는 달려와 인사하고 말하였다. “누가 황해도 사람인가요? 심양(瀋陽)에 잡혀온 사람들은 혹 고향 소식을 들었으나 나는 너무나 먼 곳에 있어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알지 못해요. 지금 근처의 사람을 만나니 가족을 만난 듯 하네요.”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가 술을 가지고 와 마시게 했다. 내가 듣고는 불러서 그 뜻을 불쌍히 여겨 과일과 담배를 주었다. 여자가 받고는 먹지 않으며 말했다. “이것은 조선 물건이네요.” 그리고는 눈물을 줄줄 흘린 뒤 말했다. “돌아가실 때도 이 길로 가시나요?” 여자는 가난하기는 하지만 술을 빚어 기다리겠다고 하였다. 심양에서 금주(錦州)로 가는 길은 3갈래가 있는데 북쪽 길은 멀고 남쪽 길은 지름길이며 여기는 중간 길이다. 돌 하나 나무 하나 보이지 않고 들판과 하늘이 서로 이어졌으며 새들도 오지 않으며 황사가 일어날 때 눈을 크게 뜨고 보면 제비만 날아다닐 뿐이다. 저녁에 신장에 도착하여 노숙하였다. 이날은 90리를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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