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
  • 검색

상세검색

디렉토리검색
검색어
시기
-
감히 우리 노선생을 모욕하다니
1635년 8월, 영남지역 유생들 사이에서는 영의정 윤방(尹昉)이 조정에서 이이(李珥)와 이황(李滉)에 대해 한 말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앞서 5월에 이이와 성혼(成渾)을 문묘에 배향하자는 관학 유생 270명의 상소가 올라왔었는데, 뒤이어 바로 이에 대한 반대 상소가 올라왔다. 그것을 조정에서 논의하던 중 인조가 신하들에게 말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인조는 “이이에게 상중(喪中)에 낳은 아들이 있다고 들었다.” 라고 말하였다. 본래 상중에는 행동을 조심히 해야 하는데, 이 때 낳은 아들이 있다는 것은 상주에게 큰 윤리적 결함이 있다는 것과 같았다. 윤방이 임금께 “어디에서 그런 말을 들으셨습니까.”라고 여쭙자, 인조는 “이귀(李貴)에게 들었으니 어찌 헛된 말이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윤방은 “이귀는 만년에 모든 것이 가물가물하였습니다. 이것은 이 아무개에 대한 말인데, 잘못하여 이이의 일로 된 것입니다.” 라고 답하였다. 이러한 이야기가 영남에 돌았으나, 실상은 이 말을 윤방이 한 것이 아니라 최명길(崔鳴吉)이 하였다고 한다.

이미 9월 초에 조정 관리들 중에서도 항의의 상소를 올리는 자들이 있었고, 도산서원이 있는 예안 지역에서도 당연히 이황에 대한 모욕적인 이야기에 대해 상소를 올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10월 4일에는 영남의 유생들에게 함께 소를 올리자는 통문이 돌았다. 그러나 김광계는 상소에 참가하는 것에 소극적이었다. 김광계의 조카 김초가 서울에서 내려와 이 사건에 대해 항의해 봤자 소용없다는 식으로 집안 어른들에게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김광계의 재종숙인 김령은 이에 대해 매우 불만스럽게 생각했고, 도산서원 원장인 김광계가 반드시 이 일에 참여해야 한다고 설득하였다. 10월 8일에는 김광계에게 김령의 아들들이 와서 소에 대해 언급하고, 함께 향교로 가서 소에 대해 의논하자고도 하였다. 결국 다음날부터 김광계는 향교로 가서 상소에 대한 의논을 하기 시작하였다. 12일에는 김령의 집에 가서 논의하고, 다음날에는 도산서원에서 여러 유생들과 매일같이 상소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10월 20일에는 드디어 상소문 초안을 작성하기 시작하였고, 23일이 되어서야 상소문 초안이 완성되었다.

닫기
닫기
관련목록
시기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장소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