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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암사에 승려를 유치하다
김광계와 그 형제들은 평소 운암사(雲巖寺)에 자주 거처하며 공부를 하거나, 몸이 좋지 않은 경우 정양을 하였다. 운암사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 전하지 않지만 자주 오갈 수 있을 만큼 지척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광계는 운암사 관리에 꽤 신경을 썼는데, 이곳을 최대한 비워두지 않으려 했던 것 같다. 이곳이 김광계의 소유였는지도 알 수 없고, 또한 김광계가 어떠한 자격으로 관리를 하고 있었는지 그의 일기를 통해서는 확실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운암사에 거처하고자 하는 승려는 김광계의 허락을 구하였던 것으로 보아 김광계가 꽤나 확실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1638년 9월 2일, 운암사 인근을 다니며 단풍을 구경하던 김광계에게 운암사에 거처하던 승려가 와서, 절의 우물이 말라서 더 이상 거처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김광계는 서운한 마음도 들고, 절을 비워두게 되는 것이 못내 찜찜했다. 결국 이틀 후, 운암사의 모든 승려가 절을 떠나버렸다.
빈 건물은 금방 여기저기가 망가지기 마련이다. 두 달 후인 11월 13일, 김광계는 조카 김방(金磅)을 데리고 가서 그간 운암사의 깨지고 헐린 부분을 보수하였다. 다행히 영윤(靈允)이라고 하는 승려가 와서 거처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보수가 끝나고 종일 운암사에 앉아 영윤을 기다렸으나 오기로 한 사람은 오지를 않았다. 결국 포기하고 달빛에 길을 비추어가며 집으로 돌아왔다. 영윤은 이틀 뒤에서야 김광계의 집에 도착해서 하루를 묵어갔다.
1년이 지난 1639년 11월 3일에는 태엄(泰嚴)이라는 승려가 운암사에 거주하기를 청하였다. 김광계는 태엄을 집에서 하루 묵게 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아들 김렴(金嚴)에게 태엄을 운암사로 안내하고 안팎을 청소하도록 하였다. 그 뒤에도 1641년에 운암사에 거주하는 승려의 중개가 있었는지 석륜(釋倫)이라는 승려가 운암사에 거주하고자 찾아왔으며, 다음 해에는 태암(泰巖)이란 승려가 찾아와 살려고 하여 다시금 동생
김광실(金光實)
과 아들, 조카들을 대동하고 운암사를 청소하였다. 청소는 번거로운 일이지만 어쨌든 운암사가 비지 않아 다행이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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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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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이야기
출전 :
매원일기(梅園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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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광계(金光繼)
주제 : 사찰
시기 : 1638-09-02 ~ 1642-07-08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경상북도 안동시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김광계, 김광실, 김방, 김렴
참고자료링크 :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김렴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김광계
◆ 유학자들의 공부방으로서도 쓰였던 암자
조선은 유학(유교)을 나라의 중심 학문으로 삼고 불교를 천시하였다. 고려시대에 번성했던 불교 사찰은 조선이 들어선 이후 한양을 비롯한 도시에서 사라져갔고 주로 깊은 산 속에만 존재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사찰들이 신앙이나 불교 전파와는 전혀 다른 용도로 사용되곤 했다. 정구의 「유가야산록」에 나오는 어린 아이와 같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몸을 의탁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생활에 여유가 있는 선비들도 좋은 환경 속에서 공부하기 위해 절을 찾는 경우도 많았다. 이럴 때는 승려들이 선비의 수발을 들어야만 했다. - 노역(勞役)과 군역(軍役)에 동원된 승려들 조선은 농사를 짓고 세금을 내는 인구를 확보하기 위해 사람들이 승려가 되는 길을 막고자 했다. 그러나 승려가 되는 인구를 억제하기는 어려웠다. 조선 전기에는 도첩(度牒)을 발급받지 못한 승려에게 요역 노동을 부과하는 방식을 취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려들은 자발적으로 일어나 일본군과 싸웠다. 이를 의승병(義僧兵)이라고 한다. 지배층은 이를 이용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승려들에게 산성 수호 임무를 맡겼고 이들을 각종 토목공사에 동원하기도 하였다. 승려들의 역(役)은 나라에서 없어서는 안 될 수취체제, 인력동원체제의 한 부분이 되었다. 백성들이 나라의 수취를 견디지 못하면 도망을 선택할 것이고 그들이 부담하지 못한 세와 역은 승려들에게 부과될 수 있었다. 정구는 승려들이 암자를 비우고 떠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 원문 정보
二日 辛酉 與以直·琴叔往遊雲巖, 山紅水碧, 眞佳節也. 第居僧以旱氣太甚, 泉井枯渴, 不爲久留之計, 極可悶也. 四日 癸亥 禹必大來見. 雲巖寺僧以無水爲辭, 皆出去, 空寺可嘆. 往候司諫叔侍病. 邇來病勢頗重, 不進食飮, 夜不得眠, 極可憂慮. 蹔見柳敬之. 來時路逢而實. 十三日 辛未 與磅往雲巖寺, 修治破毁之處, 以道僧靈允欲來居故也. 終日待之而不來, 甚可恠也. 夜乘月還. 十五日 癸酉 庶叔來見. 山人靈允來宿. 三日 丙辰 孟堅來見. 𥖝昨往溫溪, 將向覺華寺, 擬寫璿源錄, 中路聞書役已畢還來. 僧泰嚴來宿, 欲寓雲巖云. 四日 丁巳 風雪交飛. 使𥖝與嚴僧, 掃除雲巖. 十八日 甲午 庶叔來見. 雲巖·泰巖僧來見. 又僧釋倫者來, 欲入定雲巖也. 八日 丙子 僧泰巖者欲復來居雲巖, 與以健及兒輩往雲巖, 修掃誅[茅]去草, 僧輩亦往. 陶山有司權旋春與李榮煥來見.
◆ 원문 번역
무인년(1638, 인조 16) 9월 2일 신유 이직以直과 금씨 아재와 함께 운암雲巖을 가서 유람하였는데, 붉은 산과 푸른 강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다만 거주하고 있는 중이 너무 심한 가뭄으로 우물이 말라버려서 오래 머물 계획을 세울 수 없다하니 너무 안타깝다. 9월 4일 계해 우필대禹必大가 보러 왔다. 운암사의 중이 물이 없는 것을 핑계로 다 떠나버려 절이 비었으니 한탄스럽다. 사간 재종숙이 앓고 있어 가서 문병하였다. 요즈음 병세가 상당히 위중하여서 음식을 들지 못하고,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으니 몹시 우려스럽다. 류경지柳敬之를 잠깐 만나보고, 돌아올 때 길에서 이실而實을 만났다. 11월 13일 신미 방磅과 함께 운암사雲巖寺에 가서 깨지고 헐린 곳을 보수하였는데, 중 영윤靈允이 와서 거처하려고 해서이다. 종일 영윤을 기다렸으나 오지를 않으니 몹시 괴이하다. 밤에 달빛을 타고 돌아왔다. 11월 15일 계유 서숙이 보러 왔다. 중 영윤靈允이 와서 잤다. 기축년(1639, 인조17) 11월 3일 병진 맹견이 보러 왔다. 어제 염이 온계로 갔는데, 장차 각화사覺華寺로 가서 『선원록璿源錄』을 베끼려고 하였으나 길가는 중에 이미 글씨 쓰는 일을 끝냈음을 듣고 되돌아왔다. 중 태엄泰嚴이 와서 잤다. 운암사雲巖寺에 머물고 싶어 하였다. 11월 4일 정사 바람이 불기도 하고 눈보라가 치기도 하였다. 염을 시켜 중 태엄과 함께 운암사를 소제하게 하였다. 신사년(1641, 인조19) 1월 18일 갑오 서숙庶叔이 보러 왔다. 운암사雲巖寺과 태암사泰巖寺의 중이 보러 왔다. 또 중 석륜釋倫이라는 자가 왔는데, 운암사에 들어가 머물려고 하였다. 임오년(1642, 인조20) 7월 8일 병자 중 태암泰巖이라는 자가 다시 운암사雲巖寺로 와 살고 싶다기에 이건以健 및 아이들과 함께 운암사로 가서 띠를 베어내고 풀을 뽑고 청소를 하였다. 중들도 갔다. 도산서원 유사 권선춘權旋春이 이영환李榮煥과 함께 보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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