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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의 망나니 이도
김광계의 일기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동생 김광보의 주사는 이미 친족 사이 뿐 아니라 동네에서도 유명했다. 김광보는 술에 취해 제사 때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는 재계를 하지 못하기도 하고, 항의할 일이 있으면 거친 말로 편지를 쓰기도 하여 감광계로서는 동생을 단속하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1635년, 김광보가 49세가 되던 해 2월 23일에는 역동서원에서 원장인 김광계와 그의 양자 김렴, 이하 여러 유생들이 향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때 향사를 주관하는 헌관으로는 이홍중(李弘重), 김확, 김광보가 선발되어 있었다. 모두 향사 이틀 전에 서원에 도착하여 재계를 하기는 하였으나, 김광보는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채로 도착하여서 망신스럽기가 그지없었다. 다음날에도 김광보는 술을 마셨고, 드디어 2월 26일이 되어 향사를 지냈는데, 이후 있었던 음복자리에서까지 김광보는 술을 마시고 미친 사람이나 바보처럼 굴었다. 연일 술을 마시고 전혀 제정신으로 있는 때가 없어서 여러 사람의 비웃음을 사고 만 것이다.

김광계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3년 후인 1638년, 김광계 형제의 어머니 기제사가 임박한 5월 23일에도 김광보는 술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했다. 김광보는 20일에 안동으로 갔다가 여러 사람을 만나 술독에 빠져 있다가 문득 어머니 제사라는 사실을 깨닫고 부랴부랴 취한 채로 김광계의 집에 온 것이었다. 김광계의 집에서는 다른 형제들과 조카들이 재계를 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김광계는 어머니 제사인데도 스스로를 살피지 않은 동생이 너무나 답답하게 여겨졌다. 이미 2달 전에 김광보는 재종숙 김령에게 가서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술을 마셔서, 김령은 김광보의 술병이 고질병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제사 후 며칠 뒤, 인근 지역인 영해에서 수령과 지역 양반 사이에 분쟁이 있었는데, 이 때 김광보는 중앙 관료인 심지원(沈之源)에게 편지를 써서, “영해 수령의 벼슬살이는 탐욕스럽고 비루하다. 그와 절친한 몇 안 되는 사람들은 그의 사람됨을 비루하게 여겨 거절한 지 오래 되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거친 문구에 벼슬살이를 오래 하여 노회한 김령은 깜짝 놀라 자신의 아이들을 김광계에게 보내 김광보가 보낸 편지를 보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전하였다. 김광계는 동생의 경솔함 때문에 며칠간 문을 닫아걸고 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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