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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궁 시험장 사건
병자호란이 발발하기 직전, 1636년 7월 9일에 용궁(龍宮)에서 있을 과거시험을 위해 예안현의 유생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김광계의 막냇동생 김광악(金光岳), 아들 김렴(金𥖝), 조카 김려, 삼종제 김광수(金光遂), 그리고 재종숙 김령(金坽)의 아들들, 금씨 집안사람들도 모두 7월 초에 과거시험장을 향해 떠났다. 다들 너나할 것 없이 과거 시험장에서 가까운 곳에 묵을 곳을 정하였는데, 한 집에 10명 넘게 기거하게 되는 경우도 있어서 시험을 보는 사람들은 서로 예민한 마당에 거동도 불편하였다. 이 때 과거 응시자의 신원을 확인하고 응시자격을 확인하는 녹명관은 웅천(熊川) 수령 박사성(朴思誠)으로 정해졌다. 그런데 이 때 마침 안동과 예천, 그리고 예안 출신자들은 과거를 보는 데 제한을 두어야 한다는 주장이 불거졌다. 이유는 향교에서 절도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과장(科場)에서 이곳 출신들을 내쫓느니 마느니 하며 소란이 벌어졌고, 시제(試題)도 도합 10번 넘게 바뀌어서 날이 저물어서야 겨우 시제가 정해져서 과거를 보는 유생들은 밤새도록 글을 지어 동이 틀 무렵에서야 제출했다.

과거가 끝나고 피곤한 유생들이 종이 끄는 말에 타고 비로소 예안현으로 돌아오자 이번 향시의 급제자와 함께 각종 비리와 부정행위가 소문으로 떠돌기 시작했다. 이번 향시에서 예안현 출신으로 급제한 사람은 김광계의 조카 김려, 아들 김렴, 삼종제 김광수였으며, 진사시에서는 금시문(琴是文)이 합격하였다. 사실 예안에서 합격한 사람보다는 영천, 예천, 감천 사람들이 가장 많았는데, 이 때 과장 밖에서 은밀하게 지은 글을 과장 안으로 들여 친한 사람이 합격하게 했다. 이렇게 글을 들인 사람들은 이상언(李尙彦), 이개한(李開漢), 정기종(鄭起宗), 이산한(李山漢) 등이었다고 소문이 파다하였다.

진사시의 수석인 금시양은 평소 그 학문이 깊지 못하다는 이야기가 있어 그의 합격을 비웃는 사람들이 있었고, 또한 생원시의 수석인 상주 출신 김중황(金重黃)은 애초에 글을 알지 못하여 이산한이 몰래 글을 지어 들여 주었다고 하였다. 이산한의 수법은 과장 안에 미리 들어와 대나무 숲에 숨었다가 글을 전하는 것이었다. 또한 급제자 총 50명 중에서 급제를 한 사람들은 보통 부(賦)에서 뽑힌 사람들이었고, 오직 시(詩)에서는 4명만 뽑혀 그 평가 기준 역시도 구설수에 오르내렸다. 병자호란 직전의 향시는 이렇게 오명으로 얼룩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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