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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영해 부사의 가족을 죽였나
1638년 6월, 김광계의 처남 이시명(李時明)은 그의 고을 영해에 부사로 부임해 온 류대화(柳大華)와 반목하다가, 류대화 및 관속들과 향소의 임원이 모두 도망가게 한 일로 조사를 받고 있었다. 그 부친의 구명을 위해 여기저기 뛰어 다니던 아들 이상일(李尙逸) 역시도 아버지를 두둔하는 글을 안동부에 올렸다가 옥고를 한 번 치러야 했다. 이상일의 도움 요청을 받은 김광계와 그의 재종숙 김령(金坽)은 딱히 이 사건에 휘말리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이시명과 류대화가 모두 각각 잘못한 바가 있었고, 또 조사관을 맡은 영덕 수령이 알아서 잘 조처해 주리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김광계는 이 사건과 관련하여 상당히 큰 곤란을 겪을 뻔하였다. 성격이 불같은 김광계의 동생 김광보(金光輔)가 술을 한 잔 마시고 조정 관료인 심지원(沈之源)에게 편지를 썼기 때문이었다. 내용은 “영해 수령 류대화의 벼슬살이는 탐욕스럽고 비루합니다. 평생에 절친한 사람은 김령과 박중식(朴仲植)만한 사람이 없는데, 그들 모두 그의 사람됨을 비루하게 여겨 거절한지 이미 오래입니다” 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내용을 일가친척을 방문했던 김령의 아들들이 전해 듣고 김령에게 전하였다. 김령은 온 몸에 소름이 돋도록 섬뜩하여 당장에 그 편지를 가로채어 보내지 못 하도록 김광계에게 말을 전하도록 하였다.

6월 말엽에는 결국 이시명과 서얼 조카, 정승서 부자 등이 모두 함께 잡혀갔다. 그러고 얼마 되지 않아 7월 8일에는 영해 부사에서 사퇴한 류대화가 가족을 이끌고 가흥(可興)을 지나다가 도적을 만났다. 류대화는 죽음을 모면하였으나 그의 두 아들은 모두 살해되어 시신이 찢겨 울타리에 걸쳐졌고, 그 처와 종들을 포함하여 죽은 자가 여섯 명이었다. 그러면서도 재물은 하나도 가져가지 않았고, 놋그릇이 깨지고 옷가지는 찢겨 불탄 것으로 보아 이 사건의 범인은 류대화와 원한 관계에 있는 사람일 것이라고 여겨졌다. 인근의 사람들은 영해 읍민들을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사건은 좀처럼 해결되지 않았다. 그리고 열흘이 지난 뒤, 갇혀 있던 이시명은 귀양을 가기 전 잠시나마 풀려나 김광계를 방문하여 그간의 고초를 이야기하고 사례하였다. 이후 8월에도 조정에서 이 사건과 관련한 논의가 있었지만 이시명은 억울하게 말려든 것으로 결론이 지어졌고, 귀양에서도 풀려나게 되었다. 사건이 일단락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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