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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의 제자가 명과 청의 전쟁 소식을 전하다
1637년 4월에도 아직 병자호란의 혼란이 진정되지 않아서 예안현에는 한양에서 피난을 온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4월 4일에는 이경선(李慶先)이 김광계와 김령(金坽)의 집에 각각 들렀다. 이경선은 이응진(李應進)의 손자로, 이응진은 김령의 부친 김부륜과 퇴계 이황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이경선은 한양에 살다가 전란을 맞이하여 봉화로 난을 피했는데, 이번에는 예안에 있는 도산서원 사당에 왔다가 김령과 김광계에게 인사차 찾아온 것이었다. 김령은 병을 무릅쓰고 이경선에게 인사하고, 아들들을 시켜 사랑채에서 술과 밥을 대접하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경선이 오래 머물러 있기에는 편치 않았던 것 같다. 이경선은 김령의 집을 나와 김광계의 집으로 갔다.

어느덧 저물녘이었다. 그는 먼저 김광계의 아들 김렴(金𥖝)을 만나, 그의 안내를 받아 김광계를 만났다. 한창 『상서』를 베껴 쓰고 있던 김광계는 이경선을 환대하고 함께 데리고 자며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 날 아침에는 침락정(枕洛亭)에서 환송연을 하였다. 이때에는 술자리는 결코 놓치지 않는 김광계의 동생 김광보(金光輔)도 일부러 오천에서 와서 함께 침락정 마루에서 술을 몇 순배 마셨다. 그러다가 그대로 보내기엔 아쉬웠는지 강을 건너 김확(金確)의 서당까지 갔다. 그러자 어디에선가 우처인(禹處仁)이 술을 들고 나타났다. 이에 김확도 분위기를 읽고 종에게 술을 가져오게 하여 서로 권하며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날이 저물자 결국 이경선은 길을 떠나지 못하고 김렴과 함께 역동서원에 가서 자게 되었다.

이러한 환대 덕인지 이경선은 돌아간 뒤에도 예안에 편지를 간혹 썼다. 4월 23일에 김령의 집에 온 편지에는 명·청간의 전투에 대한 소식이 쓰여 있었다. 인조의 항복 후, 청은 가도(椵島 : 평안북도 서해안에 있는 섬)에 주둔한 명을 치기 위해 1637년 2월에 병력을 요청하였는데, 이 때 수군장(水軍將)이 임경업(林慶業)이었다. 하지만 그는 선봉에 서기를 주저하였으며 은밀히 명나라 도독 심세괴(沈世魁)와 내통하여 명군의 피해를 줄이고자 하였다. 4월 8일, 결국 표면적으로는 청의 편에 설 수밖에 없었던 임경업은 청군 장수 마부대[마부달(馬夫達)]와 함께 출전하여 가도의 동쪽과 서쪽 방면을 협공하였다. 이에 명나라 사람들이 몰살되었고, 시신이 바다를 덮어 배가 다니는 데 방해가 될 정도였다. 남은 천여 명의 명나라 사람들은 높은 봉우리에 올라가 항전하였는데, 청의 8왕자 홍타이지가 격문을 띄워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결국 그들을 이끄는 심세괴도 전사하였다. 예안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명의 몰락을 절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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