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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군대가 바다를 건너온다는 소문이 돌다
1637년 윤 4월 29일, 청의 흥성함에 도가 땅에 떨어졌다고 생각하며 『주자대전』을 읽고 있던 김광계에게 갑자기 박자경(朴子敬)과 윤시우(尹時遇)가 찾아왔다. 김확(金確)과 금씨 아재도 뒤따라 김광계를 부르며 왔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고 책을 치우며 묻자, 명나라 군사들이 곧 바닷길을 따라 들어올 것이라는 소문이 돈다고 다들 말하였다. 먼저 명의 진 도독(陳都督)이 표문을 보내 유시하기를, “흠명 제독 편선 행사 괘 평로 장군 인 총병관 태자 소사 중군 도독부 좌도독(欽命提督便宣行事掛平虜將軍印摠兵管太子少師中軍都督府左都督)은 동일한 원수를 가진 조선을 분발시켜서 적노(賊虜)를 토멸하는 일로 표문을 보냅니다.

역도들이 감히 날뛰어 귀국을 유린하였는데 다만 힘이 약하여 지탱하기 어려워 겉으로는 순종하였지만 속으로 거역하였던 것이니, 한 가닥 중국 조정을 향한 충의만은 진실로 용서할 수 있습니다. 지금 방어사 임경업(林慶業)이 있는데 경업은 재질과 지모가 매우 장하고 겸하여 충성과 용기도 넉넉하여 진실로 간성(干城)으로 의지할 수 있으며 보장(保障)으로 믿을 만하니, 즉시 본관을 총병직으로 승격시켜 원래 관직의 사무를 관리하게 하여 맹세코 적을 섬멸하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가도 전투에서 명이 패한 것은 오랑캐가 저지른 일이니 조선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 때 명군을 이끌고 있는 것은 진 도독과 조 총병(祖摠兵), 소 총병(蕭摠兵) 등이었는데, 이들은 요동반도와 조선 사이의 여러 섬에 흩어져 주둔하였다. 장수의 수는 천 명이고 군사가 20만이라 전해졌다. 또한 그들 중 4만 명이 한양에 들어오겠다고 했다는 소문이었던 것이다.

이 때 조정에서는 진 도독의 표문을 모두 믿을 수 없고, 일종의 허장성세일지도 모른다고 하여 국경에 답서를 비치해 두자고 하였다. 그리고 답서에는 “조선은 이미 명을 위해 청과의 화친을 배척하다가 전 국토가 노략질 당하고 두 왕자가 심양에 끌려갔으니 국왕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다. 이러한 표문이 오간 것을 청이 알게 되면 다시금 큰 일이 날 수 있으니 더 이상 우리가 전란을 입지 않게 하라”는 내용을 적게 하였다는 이야기에 이르자, 이에 대해 모여 앉은 사람들은 조정 신료들이 어찌 대처해야 할 줄 모르고 황망해하기만 한다고 한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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