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
  • 검색

상세검색

디렉토리검색
검색어
시기
-
병자호란의 전후처리에 대해 한탄하다
1637년 5월 9일, 『주자대전』을 읽고 있던 김광계는 여러 손님을 맞이했다. 벗 금발(琴撥)의 아들 금호겸(琴好謙), 재종질 김확(金確)의 아들인 김익중(金益重)과 김확의 사위 성이염(成以恬)과 종형제 김광술(金光述)이 우르르 김광계의 방으로 들어왔다. 이 날 서울에서 병자호란의 전후처리와 관련된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지난 4월 16일에 인조가 모화관으로 나아가 남한산성을 지킨 병졸에게 술과 음식을 베풀어 위로하였는데, 이 때 시정의 백성들이 어가(御駕)가 지나는 길가에서 통곡하였다. 전란으로 부모와 처자를 모두 잃고 이에 대해 호소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 때 어가가 궁궐을 나간 뒤, 유성이 명정전(明政殿)앞에 떨어졌다. 또한 명나라의 20만 명의 군사가 한성으로 들어온다는 소문 때문에 도성이 흉흉하다고 하였다.

또 기왕 이 자리에서 남한산성 이야기가 나와서, 항복 당시의 이야기까지 흘렀다. 왕이 항복할 때, 청 장수 용골대 등이 홍타이지에게 간언하길, 이미 서로 화친하게 되었으니 서로 사로잡은 포로들은 돌려주자고 하였으며, 또한 조선이 명을 따른 지 오래되었으니 명의 잔당을 칠 때 조선의 병사들이 명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하였다. 이에 홍타이지는 청이 요구한 내용을 조선이 이미 잘 따르고 있으므로 조선이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지나친 염려라고 용골대 등의 장수를 달랬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나니 자리에 모인 김광계 등 여러 사람은 청이 의외로 의리를 알고 있음에 감탄하였고, 한편으로는 조선 조정에서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누구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분통을 터뜨렸다.

이런 자리가 있은 뒤로부터 나흘이 지나 5월 13일에는 서울에서 약장수 이양일(李陽一)이 왔다. 그는 서울 소식을 전해주었는데, 지난 4월 16일에 모화관에 인조가 갈 때 길가에서 백성들이 울며 “우의정 최명길을 청에 보내어 사로잡힌 남자와 부녀자들을 속환시켜 달라”라고 애걸하였는데, 인조는 빠르게 가기를 재촉하여 듣지 않고 갔다고 하였다.

또, 5월 16일에 의병에게 쓰인 의량목을 세러 향교에 나간 김광계는 신효남(申孝男)⋅윤욱(尹煜)⋅김시만(金時萬) 등에게 또 다른 소식을 들었다. 지난번 명나라 군대가 주둔해 있던 가도(椵島 : 평안북도의 서해안에 있는 섬)가 청군에 의해 함락될 때 명의 장수 30여 명이 모두 사로잡혔는데, 이 때 청군이 모두를 항복시키려고 한 명을 참수하여 협박하였으나 단 한 사람도 항복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졌다. 한편, 의병장 전식(全湜)이 이조참의가 되었는데 사실상 그는 조령을 넘다가 적군이 괴산에 도달했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한 자였다. 그렇기에 그가 당상관이 되었다는 소식은 모두에게 쓴웃음을 짓게 하는 소식이었다.

닫기
닫기
관련목록
시기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장소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