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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으로 나뉜 운명의 명암
1637년 5월 26일, 전날 어머니의 제사를 지내고 아침부터 아우 및 조카들과 함께 음복을 하고 있던 김광계에게 김시익(金時翼)이 찾아왔다. 김시익은 김광계에게 오기 전에 김령(金坽)에게 먼저 들러 온 터였다. 그는 전란의 여파로 아직 안정되지 않은 서울 소식을 가지고 왔다. 병자호란으로 인해 서울의 양반들 중 한 명도 집이 완전한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서울의 대다수의 집은 전란으로 불타고 허물어져 사족 뿐 아니라 민가의 피해도 막심했다. 조밀하게 붙어 있는 집들 중 한 채에만 불이 나도 곧 근처의 모든 집에 불이 쉽게 번지는 것도 문제였고, 모든 건물이 거의 목재로만 되어 있는 것도 피해를 가중시켰다. 건물의 피해도 참혹했거니와, 사람이 상한 것은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강화도로 분조한 세자를 따라 도망간 사람이든, 왕을 따라 남한산성으로 도망간 사람이든 가족 모두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때 사족의 부인들 중 청군의 포로가 된 사람들이 있었는데, 천만 다행으로 스스로 도망쳐 집으로 돌아왔다고 할지라도 남편이 정조를 의심하여 그녀들을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결국 그녀들은 갈 곳을 찾지 못하고 거리를 떠돌다가 조선인에게 강간을 당하게 되었다. 이 일을 형조(刑曹)와 한성부(漢城府)에서 알고 강간범들을 다스리려고 하였으나 강간을 당한 여성들은 자신의 명예를 지키고 가족에게 돌아가기 위해 강간을 당하지 않았다고 증언하여 강간범들은 처벌을 피하게 되었다.

그나마 청군이 밀려 내려온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곧바로 남쪽으로 피난을 간 사람들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또한 비록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남한산성에서 왕을 수행한 자들은 당상관(堂上官)인 가선대부(嘉善大夫)와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그 수는 200여 명에 달하였다. 또한 남한산성을 수비한 군졸들도 모두 수령이 되었다.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이렇듯 나라가 맞은 위기는 누군가에게는 기회가 되었다. 하지만 사회의 약자이자 대다수를 이루는 힘없는 농민들과, 일종의 특권층이었던 사족이라 할지라도 그 권리를 스스로 주장할 수 없었던 여성들은 그들의 인생을 무참히 짓밟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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