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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류산으로 떠날 계획을 세우다
1559년 봄에 금난수의 사촌 형인 정복시(鄭復始)가 단성(丹城) 현감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560년에는 류씨 아재 역시
삼가(三嘉)
현감이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소식을 들은 금난수는 단성에 두류산이 있다는 사실과, 가야산이 삼가로 가는 길의 성주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금난수는 평소 두류산과 가야산을 유람한 사람들의 유람기를 즐겨 읽었는데, 이러한 독서 끝에 한 번쯤 이 명산들에 방문하고, 삼가에 살고 있다는 남명 조식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때마침 퇴계 선생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하던
황준량(黃俊良)
이 성주 목사가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마침내 금난수는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남쪽 지방을 유람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읽어온 유람기를 따라 서른 살이 넘어서야 길을 나서게 된 것이다.
그는 우선 퇴계 선생에게 하직 인사를 올렸다.
“저는 재주가 옅어 과거 공부를 통해 입신양명을 할 수 없으니, 저의 분수를 알고 은거하여 농사를 짓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에 이러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어 한탄스럽습니다.” 라는 금난수의 말에, 퇴계 선생은 이렇게 답하였다.
“나는 그대가 세상의 실정을 알았으면 하네. 그대는 세상을 자신의 눈으로만 판단하고 스스로 입신하는 일을 삼갈 뿐이네.” 선생은 제자가 이번 유람을 통해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자신의 가능성을 스스로 꺾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다.
덧붙여 성주의 서원에 김굉필과 이조년을 함께 배향하자는 의견을 성주 목사이자 자신의 제자인 황준량에게 전해달라고 하였다. 금난수는 선생의 앞에서 물러나와 뜰에서 하직 인사를 올리고 길을 떠났다. 안동을 벗어나 세상을 보러 나아가는 첫걸음이었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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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이야기
출전 :
성재일기(惺齋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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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금난수(琴蘭秀)
주제 : 여행
시기 : 1560-11-09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경상북도 안동시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금난수, 정복시, 황준량, 이황
참고자료링크 :
조선왕조실록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정복시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이황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금난수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황준량
◆ 조선시대 양반들의 유산문화
조선시대 양반들은 유산을 최고의 여가문화로 여겼다. 또한 단순한 여가가 아니라 선현들의 유향을 느끼면서 학문 정진의 다짐을 하는 계기로 삼기도 했다. 양반들은 유람에 앞서 신변부터 먼저 정리했는데, 현직 관리는 소를 올려 임금의 허락을 받거나 사직서를 제출하고 관직을 그만뒀다. 식량은 2~3일분만 준비하고 여행을 하면서 조달했다. 조선시대에는 일반적으로 2끼 식사만 했지만 에너지 소모가 많은 여행 중에는 점심에 해당하는 ‘중화(中火)’를 먹었다고 유산기에 나와 있다. 붓·벼루 등 문방구도 필수품이었다. 종이는 휴대가 용이하도록 미리 잘라서 책으로 엮어 지녔다. 가족과 친지, 노복을 동반해 여행단의 규모는 대개 10~20명 수준이었다. 피리, 거문고 연주자와 산수화를 그릴 화공이 동행하기도 한다. 전·현직 고위관료의 경우 50~100명의 대규모 여행단을 꾸렸다. 여기에는 기생, 요리사, 악사까지 동반하기도 했다. 숙박은 관아의 객사나 공공여관인 역·원을 주로 이용했고 산에서는 사찰에 주로 묵었다. 여행에 시가 빠질 리 없다. 뛰어난 경치나 벗과의 만남·이별 등을 소재로 했다. 또한 사대부들은 산에서도 책을 놓지 않았다. 계곡에 발을 담그는 것도 동경의 대상이었다. 사대부들은 "갓끈과 발을 씻겠다"는 굴원의 고사에서 유래한 탁족을 통해 마음을 깨끗하게 씻을 수 있다고 여겼다. 드물게 세속의 때를 씻어내려고 목욕을 하기도 했으며 신병치료 등을 위해 온천욕을 즐긴 이도 있었다. 산중에서 그들은 평소와 다른 면모도 보여줬다. 엄격한 유학자였지만 승려들과의 토론도 마다하지 않았다. 무속신앙을 배척했지만 산을 오르기 전에 산신제를 올리기도 했다. 모두들 산으로 몰리니 폐단도 따랐다. 바위에 이름 등을 새기는 제명(題名)이 크게 유행하면서 성한 바위를 찾기가 힘들어졌다는 비판이 많았다. 제명은 먼저 붓으로 글씨를 쓰고 노복이나 승려가 이를 돌 등에 붙여 쪼아서 새겼다. 금강산의 경우 바위는 말할 것도 없고 절, 정자의 벽과 기둥 등을 가리지 않고 글씨를 새겼다.
◆ 원문 번역
11월 나는 어렸을 적부터 두류산頭流山의 웅장하고 빼어남과 가야산伽倻山의 기묘한 절경을 듣고 이전 사람이 유람한 기록과 등산한 뒤의 기억을 읊은 시를 보았다. 또 조남명曺南溟【휘諱는 식植이고 자字는 건중健仲이다.】의 사람됨을 듣고는 항상 남쪽 지방으로 유람을 하면서 가야산과 두류산을 올라보고 남명을 만나 마음과 눈을 넓게 틔어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길이 막히고 멀며 티끌 세상에 골몰하느라 남쪽 하늘로 고개를 돌려 바라만 볼 뿐 실행할 수 없었던 지가 십여 년이었다. 기미년(1559년) 봄에 정형鄭兄【이름은 복시復始이고 자는 이건以健으로 사촌 형이다.】이 단성 현감丹城縣監이 되고 그 다음해에 류씨 아재도 삼가 현감三嘉縣監이 되었는데, 단성은 바로 두류산의 동쪽 자락에 있고 삼가현과는 경계가 이어져 있으며, 삼가현은 곧 남명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길이 성주星州를 지나쳐 가고, 가야산도 성주 지경 내에 있으며, 이 해 가을에 황금계黃錦溪【휘는 준량俊良이고 자는 중거仲擧이다.】가 성주 목사가 되었다. 이는 내가 남쪽을 유람하는 데 있어서 큰 행운이기에 이때 마침내 마음을 먹고 길을 나섰다. 11월 9일 퇴계退溪 선생께 나아가 하직 인사를 하기를, “사람의 어질고 어리석음과 존귀하고 비천함은 비록 다르나 각자가 처신을 합니다. 수秀는 재주가 옅어서 과거 공부로 이름을 이룰 수 없습니다. 곧 산림에 자취를 감추고 거친 밭이나 가꾸는 일이 합당하니, 이것이 저의 분수입니다. 그러나 위로 부형이 계셔서 스스로 뜻을 이룰 수 없고, 시속을 따라 골몰하느라 본성을 잃어버릴 것 같은 한탄스러움이 있습니다.”하니,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그대에게 이렇게 말해 주겠네. 그대가 세상의 실정을 알고 행했으면 하네. 그대는 유독 마음으로만 알고 삼갈 뿐이네.”하시고, 또 성주의 서원 묘향廟享을 말씀하시면서 목사에게 말을 전해달라고 운운하셨다. 마침내 뜰에서 하직인사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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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자들의 고시원, 백운동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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