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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떠난 거자들 중 급제할 사람은 나야 나
과거시험을 보러 서울로 간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여정을 감내해야만 함을 의미하였다. 주위 사람들의 걱정과 염려도 당연했고, 또 오랜 시간이 걸리는 여정이었기 때문에 여장을 꾸리는 일 역시 만만치 않았다. 금난수는 마침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난 뒤에도 가볍게 떠날 수는 없었다. 일단 부형들에게 인사하고, 도산에 들러 퇴계 선생에게 인사하고, 월천에 들러 처가에, 온계에서 고모댁에 인사하고서야 마침내 서울로 출발할 수 있었다.

금난수는 일단 말구종과 짐말까지 함께 대동하여 육로로 이동하였다. 의동(義洞), 영천(榮川), 장천역(鏘川驛)을 거쳐 죽령(竹嶺)을 넘는 것이 일단 첫 관문이었다. 죽령 너머 골짜기 입구에서 아침을 먹고 수고한 말에게도 먹이를 먹이고 있자니 서울에서 내려오는 권의중과 이연량이 금난수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하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기에 회포는 풀지 못하였다.

단양(丹陽)에서 하룻밤을 잔 뒤, 강가에서 아침을 먹고는 양식으로 삼으려 함께 가지고 온 쌀 10말을 장귀복(張貴福)에게 맡겨 배로 싣고 가도록 하였다. 금난수 자신은 누암(樓巖)에서 그 배를 타기로 약속하였다. 이 날 황강역(黃江驛) 역사에서 자게 되었는데, 서울에 산다고 하는 이홍이라는 사람과 같은 방에서 함께 자게 되었다.

다음날에는 배를 타야 했기 때문에, 타고 온 말은 은석(銀石)에게 맡겨 육로로 끌고 서울에 가도록 하였다. 마침내 먼저 출발한 배를 타기 위해 도착한 누암에서는 배를 기다리며 객주(客主) 안금산(安今山)의 집에 거처하기로 하였다. 이틀을 기다렸지만 이상하게도 배가 오질 않았다. 강가에서 이제나저제나 배를 기다리다 보니 어느새 서울로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 열 명이 나루에 모이게 되었다. 과거시험까지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에, 누암이 남쪽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중간 기착점이었던 만큼 거자들이 속속 모여든 것이었다. 금난수도 더 이상 자기 배를 기다리지 않고 이들과 함께 오후에 출발하는 서울 가는 배에 탑승하였다.

이 배는 이틀 밤낮을 쉬지 않고 가서, 마침내 7월 28일 아침에 한강에 도착하게 되었다. 길을 떠난 뒤로 꼬박 8일이 걸린 것이다. 한낮이 되어서야 도성 문 안으로 들어갔고, 일단 고된 여정에 피곤한 몸을 뉘일 곳은 함께 배를 타고 온 권경룡의 집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하루 이상 머무르지는 않고 다음날 바로 예안 경저(京邸)에 김덕전, 권경로와 함께 거처를 정하였다. 금난수 일행에 앞서 송이로가 일찍부터 이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제 과거시험 날까지 열흘 남짓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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