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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가볍고 소매 무거운 승려들
부친의 상을 당해 1년간 꼼짝 못하고 집에 머물고 있던 금난수에게 청량산의 승려 경희(慶熙)가 방문하였다. 그는 금난수가 유람을 가고 싶은데 가지 못한 적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지, 자신이 이번에 다녀온 풍악산(楓岳山), 곧 금강산의 기이한 경치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금강산은 백두산과 더불어 손꼽히는 명산이었다. 그래서인지 금강산에는 다섯 가지 이름이 붙어 있었다. 첫째 금강(金剛), 둘째
개골(皆骨)
, 셋째 열반(涅槃), 넷째 풍악(楓嶽), 다섯째 기달(怾怛)이 그것이다. 일만 이천봉이 뼈처럼 서 있으며, 108곳의 절이 있고, 그 절들 중에서도 이름난 절이 많았다. 그 명성이 자자한 이름을 금난수가 들어본 적이 없을 리 없었다. 금난수는 승려의 이야기에 매혹되어 한참 동안 금강산의 경치에 대해 상상해 보았다.
경희가 왔다간 사흘 뒤에는 만월사(滿月寺)의 승려 희칙(熙則)이 금난수를 찾아왔다. 그는 경희만큼 기이한 이야기를 가져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소매 속에는 금난수를 기쁘게 할 만한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박승간(朴承侃)
과
박승임(朴承任)
형제의 시축을 가지고 온 것이었다. 두 형제는 퇴계 이황의 문인이었는데, 금난수와는 연배 차이가 꽤 나는 선배였다. 그들은 명산을 유람하고 유산기를 남기기도 했다. 그들의 시를 읽고 있자니 그간 상을 치른다고 놓고 있었던 풍류와 시권기가 다시금 물씬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멀티미디어
관련이야기
출전 :
성재일기(惺齋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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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금난수(琴蘭秀)
주제 : 교류
시기 : 1576-06-09 ~ 1576-06-12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경상북도 안동시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금난수, 경희, 희칙, 박승간, 박승임
참고자료링크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금난수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박승임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박승간
◆ 조선시대 승려들에 대한 선비들의 생각
위화도 회군 후 이성계 일파의 급진 세력이 힘을 갖게 되면서, 조선의 선비들은 삶의 근본 문제를 설명할 수 있는 유교의 종교화를 도모하였다. 그들은 조상(祖上)을 신으로 공경할 수 있도록 의례를 정비하고, 유교식으로 가묘(家廟)를 세우고, 상례와 제례를 거행하도록 만들어, 조상에 대한 숭배가 생활 속에서 종교적 행위로 뿌리 내릴 수 있도록 하였다. 그들은 종교적 기반이 확대되자 기존에 승려집단이 수행해오던 사제로서의 역할을 자신들이 대신하여 수행하려고 하였다. 정도전의 『불씨잡변(佛氏雜辨)』에서 볼 수 있듯이, 불교에서 말하는 전세나 내세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불교의 논리를 허황하고 망령된 것으로 비난하고 공격하였다. 또한 정치적 힘을 이용하여 승려집단을 탄압하고 불교세력을 약화시켰다. 고려시대부터 승려를 선발해 오던 승과제도를 폐지하고, 국사, 왕사 등의 승관제도도 폐지하고, 승려가 되기 위해 국가로부터 허가를 받아야 하는 도첩제도를 대폭적으로 강화하였다.
조선 선비들이 불교를 탄압하는데 성공을 거두자, 승려집단의 사회적 지위는 무속집단과 같은 천인으로 격하되었고, 그들이 수행하는 사회적 역할도 크게 변화하였다. 그들은 기복(祈福), 기원(祈願), 치병(治病) 등의 방식으로 유가(儒家)를 보조하는 주변적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그들이 수행해 오던 종교적 역할의 많은 부분이 무속과 습합하여 민간 신앙의 형태로 변형되었다. 따라서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 볼 수 있었던 지배층과 연관한 귀족적 불교문화의 많은 부분이 단절을 피할 수 없었다.
이런 강력한 선비집단으로 인하여, 조선시대 불교는 가히 굴욕의 시대나 다름없었다. 우리가 아는 것 이상으로 승려들이 천시 당했고 사찰은 수난의 시대로 접어든다. 조선 중기에 남명의 제자들이 단속사에서 크게 분탕질을 한 일이 있었다. 스님들은 몽둥이찜질을 당하였고, 불경은 불태워졌다. 조선 최대의 도학자이고, 정의파 선비로 손꼽히는 남명 선생도 깡패 제자를 두둔하여 “젊을 때는 그럴 수도 있지 뭐”하면서 너그러이 용서해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조선시대에는 곳곳의 사찰은 폐쇄되었고, 사찰 소유의 토지들은 몰수당하였다. 양민이 출가하여 스님이 되는 일은 금지되었고, 도첩제에 의해서 승려의 숫자도 제한하였다. 승려는 함부로 도성을 출입할 수도 없었다.
양반과 나라를 위해서 온갖 부역과 잡역을 담당하는 의무를 무겁게 걸머졌다. 산성을 수축할 때는 예외 없이 산승들이 동원되었다. 팔공산에 축조되어 있는 여러 산성에서는 스님들의 피와 땀이 얼마나 많이 엉켜있는지 모른다. 국가와 관아를 위해서 종이를 만들어 바쳤다. 관수용 기름도 짜서 바쳤다. 그 지방의 특산품이라면서 산에서 나는 밤, 잣, 은행 같은 것을 따러 산속을 헤매고 다녀야 했다. 유생들이 놀이 삼아 절에 들르면 절은 그들의 유희 터가 되었다. 스님들은 뒷수발이나 하는 하인이 되어서 불경공부를 할 겨를도 없었다. 이들의 모멸과 핍박을 견디다 못한 스님들은 줄행랑을 놓았고, 절은 텅 비어서 폐사가 되었다. 이 폐사는 양반이나 세도가의 수중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집터가 되거나 묘터가 되었다.
부역에 시달린 승려들이 어찌나 고달프던지, 범어사엔 승려의 부역을 없앤 낭백스님의 전설이 내려온다. 금정산성(사적 제215호)은 임진왜란 때 동래부가 쑥대밭이 된 후, 1703년 인근 범어사·국청사·해월사의 승려와 부민을 동원해 다시 쌓아올렸다. 이를 몸소 겪은 조선 중엽 범어사 낭백스님은 ‘스님이 수도에 정진하도록 고급관리로 환생해 일절 부역을 타파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증거로 일주문 전 어산교에서 말에서 내려 스스로 봉한 선방의 문을 열겠다고 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순상국이란 중앙관리가 범어사에 와 어산교 앞에서 말에서 내린 뒤 낭백스님 방의 문을 열고 스님들의 부역을 없앴다고 한다. 낭백 스님이 환생하였던 것이다. 범어사 입구엔 이를 기리는 비석이 있다.
또한 조선 중기에 권성구가 쓴 ‘유청량산록’을 보면, 조선 선비들이 승려들을 어떻게 천시했는지 잘 나타난다.
“지이의 행낭 안에 콩 한 말이 있어 승려에게 두부를 만들어 올리게 하였다. 아침을 먹은 뒤에 절의 승려들에게 산행에 필요한 신발 한 켤레와 지팡이 하나를 준비하게 하였다. 다리가 이미 약해졌다고 생각해서였다. 산에 올라보니 불편하여 다시 승려에게 가마 두 개를 올리라 하였는데 하나는 지이를 위해서고 하나는 나를 위해서였다. 나와 지이는 나이가 조금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억압 속에서도 불교도들은, 조선 후기 양란(兩亂) 등의 동요를 계기로 일정하게 민심에 영합하며 교세를 신장시켰다. 17·8세기에는, 임란에서 보인 승군의 활약과 전후(戰後) 승려들의 남·북한산성의 축조 등의 역할로 인하여, 조선정부를 비롯한 지배층에게 승역(僧役)의 중요성과 불교인식을 재고케 하였다. 한편 불교계 내부에서도 교계를 정비하여, 먼저 승려들의 염불·참선·교학의 교육과정을 일반화시키고, 총림에는 강원, 선원, 염불원을 갖추었다. 또한 설봉(雪峯)·백암(栢菴)·월저(月渚) 등 당시의 고승들이 문집을 남겨 불교계의 학풍을 진작시켰다. 이런 일들이 사대부와의 교유(交遊)에 기폭제가 되어서, 조선 후기에 유학자들이 불교를 수용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즉 유학자들이 불서를 입수하고 승려들과 법담을 나누고 서신왕래 등의 교유를 함으로써 불교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이러한 유(儒)·석(釋) 교유는 고려조부터 시작된 일이나, 조선시대로 오면 승려들의 지위 격하와 지배층의 배척으로 인하여 완전히 지배-피지배의 관계가 되었었다. 그러나 후기에 들어서면서, 사상적 깊이가 있는 고승들과 사대부들의 만남을 통해, 불교사상의 담론이나 유불에 관련된 사상적 담론이 이뤄졌다. 비단 학문적 담론 외에도 서로 시를 주고받았고, 사찰의 제문, 기문 그리고 승려들을 위한 비문, 서발문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런 교류를 통해서, 조선 후기 유학자들은 조선 전기에 비해 파격에 가까울 정도로 불교를 수용했다. 즉 민족의 사상사를 면면히 이어온 불교사상을 통해, 주자학이 지닌 모순을 극복하고, 근대적 자아관 및 세계관에 접근하려고 했던 유학자들의 양태가, 조선 후기에 차츰 나타나기 시작했다.
◆ 원문 번역
병자년(1576년, 선조 9) 6월 9일 청량산 중 경희慶熙가 와서 풍악산楓岳山의 기이한 경치를 이야기하였다. 6월 12일 만월사滿月寺 중 희칙熙則이 박 영해朴寧海 승간承侃과 박 경주朴慶州 승임承任 중보重甫의 시축을 소매 속에 넣어와 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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