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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도성의 만월대에 올라 술을 마시다
금난수가 부임한 제릉은 옛 도성, 송도에서 가까웠다. 고려의 궁궐터인 만월대는 옛 나라의 쓸쓸한 자취를 느낄 수 있는 송도의 명물 중 하나였다. 금난수는 7월 15일에 제릉에 백중날 제사를 지내고는 곧바로 다음날 만월대를 보러 갔다. 저잣거리는 백중을 맞아 제사를 지낸 뒤 음복주를 마셔 취한 사람들과 춤을 추는 사람들로 들썩이고 있었다. 금난수 역시 이런 날 조용히 있을 수 없었다. 금난수와 함께 술병을 차고 만월대에 온 사람은 파주향교의 교수 김현도(金玄度)와 하굉량(河宏量)이었다.
만월대는 고려 궁궐의 높이 쌓은 대를 말하는 것이었는데, 이미 금난수가 방문했을 때만 하더라도 고려 궁궐 중 남아 있는 것이 없고 무너진 계단과 부스러진 섬돌이 널려 있을 뿐이어서 각 전각의 이름은 알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만월대’를 궁궐 전역을 통틀어 칭하는 말로 사용하였다. 만월대 동편에는 고려 왕들이 용 모양의 배를 띄우고 놀기도 하고 과거시험을 치르기도 하던 동지(東池)라는 연못이 있었는데 이미 논이 되어 있었다.
이들은 만월대 건덕전 터인 높은 곳에 올라앉아 송도의 경치를 내려다보며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곳에는 소나무 숲이 만들어져 있어 술을 마시기에 좋았다. 술도 떨어지고, 날이 저물 듯하여 일단 자리는 파하였지만 아무래도 그냥 돌아가서 잠을 자기엔 흥이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금난수는 불콰해진 얼굴로 개성 유수부에 들어가 개성유수를 만나 인사와 환담을 나누었다. 유수는 다음번에는 강화도에 가 보라며 금난수에게 추천해 주었다. 풍류를 좋아하는 금난수는 유수 덕에 바로 다음번 유람을 손쉽게 계획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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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이야기
출전 :
성재일기(惺齋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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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금난수(琴蘭秀)
주제 : 유람
시기 : 1579-07-16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황해북도 개성시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금난수, 김현도, 하굉량
참고자료링크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김현도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금난수
◆ 개성지역의 고려 궁터 만월대
만월대는 송악산 남쪽 구릉지에 있는 고려 궁터로, 1361년(고려 공민왕 10)에 모두 불에 타서 폐허로 남아 있던 것을 8·15광복 후 발굴하였다. 궁의 중앙 높은 축대 위에 정전인 회경전(會慶殿) 터가 있고, 이를 중심으로 궁성 동쪽 벽까지 약 135m, 서쪽 벽까지 약 230m이며, 남쪽 벽의 성문인 승평문(昇平門)까지 약 250m이다. 건물배치는 크게 보아 회경전 중심의 외전 일곽, 장화전 중심의 내전 일곽과 서북쪽의 침전 일곽으로 구분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구릉지에 위치한 지형적 특성상 높은 축대를 쌓고 건물들을 세웠으며, 건물들의 배치 또한 자유롭게 구성했다는 점이다. 회경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으로 된 본채의 좌우에 정면 3칸, 측면 4칸의 익사(翼舍)가 붙어 있는 형태이다. 높은 축대 정면에는 넓은 장대석 계단을 4군데 설치하였다. 남아 있는 흔적들로 보아 정남(正南)의 승평문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동락정(同樂亭)과 신봉문(神鳳門)·춘덕문(春德門)·춘궁(春宮)·태초문(太初門)이 있었으며, 장화전(長和殿)·원덕전(元德殿)·장령전(長令殿)·연영전(延英殿)·자화전(慈和殿) 등과 왕이 거처하던 건덕전(乾德殿)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개천에 놓인 돌다리 만월교, 수만 권의 장서를 보관하였던 임천각(臨川閣), 불교사찰인 법운사(法雲寺)와 내제석원(內帝釋院) 터도 발굴되었다. 또한 수많은 기와와 함께 지붕의 마루기와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잡상(雜像)이 출토되어 당시 궁궐의 지붕 장식 형태를 알 수 있다.
선죽교는 길이가 5~6m에 지나지 않은 돌다리이나 정몽주가 피살된 곳이어서 너무나 유명한 유적이 되었다. 다리 중간에 붉은 핏자국이 선명한 돌은 뒷사람들이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려 일부러 붉은 돌을 골라 갈아 끼웠다고 한다.
고려박물관(옛 성균관 자리) 전시물 중에는 중요한 유물이 있다. 그 중 만월대 신무문에서 발굴한, 고려시기에 사용한 금속활자이다. 현재 금속활자로 찍은 ‘직지심경’은 프랑스에 보관되어 있으나 그 활자의 실물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11세기와 12세기에 걸쳐 사용한 것으로 추정하는 새끼손가락만한 크기의 이 금속활자는, 세계 인쇄문화 발전사를 살펴보는 데 귀중한 실증 유물이 될 것이다. 앞으로 좀 더 과학적인 고증이 요구된다.
또 하나는 왕건의 좌상(동상)이다. 앉은 자세의 좌상 키는 1m 60cm 정도이다. 이는 실제의 키보다 조금 작게 조성한 것으로, 원래는 옷을 입힌 것으로 추정된다. 머리에는 두개의 뿔이 달린 왕관을 쓰고 있고 좌상의 양다리 사이에는 음경(陰莖)을 손가락만한 크기로 빚어두었다. 이 좌상은 1992년에 왕건릉을 발굴할 때 무덤 뒤 웅덩이에서 발굴했다. ‘세종실록’에는 충청도 문의현에서 가져와 숭의전(崇義殿, 고려왕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에 보관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 뒤 북방민족의 침략을 겪을 때 고려 조정이 피란을 가면서 묻은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위의 두 유물은 고려청자나 거대한 청동화로와 같은 생활도구보다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 특히 좌상은 한 점의 손상조차 입지 않았다.
개성 남대문 문루에 옮겨놓은 연복사 종은 높이 3.3m의 거대하고 정교한 조각을 자랑하고 있다. 이 종은 경주의 봉덕사종과 함께 가장 예술적 가치가 있는 동종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6·25 전쟁 시기 미국의 총격으로 27곳의 탄흔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왕건릉은 1992년 대대적 보수와 함께 재 창건 됐다. 앞에 놓인 문인석과 무인석에는 발해의 왕자 대광현과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을 새로이 조성해 두었다. 바로 고려가 신라를 병합하고 발해를 계승했다는 역사의식을 표현하는 상징물이었다. 왕건의 현실(玄室, 시신을 안치한 곳)을 보면, 묘실 길은 왼쪽으로 뚫려 있고 묘실 안문의 장식 조각도 선명하다. 현실의 동쪽 벽에는 매화 대나무, 서쪽 벽에는 노송, 천장에는 북두칠성 등이 천년이 지났는데도 너무나 선명하게 보여 그 염료와 솜씨에 놀랍다. 다만 북쪽 벽은 일제시기 도굴로 인하여 파손되었다.
개성 시내에 소재한 정몽주 집터에 세운 숭양서원에는 정몽주가 나들일할 적에 말을 타는 돌 두개가 보존되어 있어 당시 관리들의 생활모습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영통사는 개성 시내에서 북쪽으로 약 10㎞ 떨어진 오관산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영통사는 고려왕자인 대각국사 의천이 20여 년간 머물면서 천태종을 창설한 사찰로 유명했다. 이 사찰은 16세기에 소실되었으나 근래에 남쪽의 천태종에서 지원해 복원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주목을 끄는 유물은 대각국사비이다. 빗돌은 금이 섞인 오석이었다. 비록 오랜 풍상으로 훼손이 많이 되었으나 그 조각솜씨로나 가치로 보아 하동 쌍계사의 사산비(최치원의 비문)와 함께 쌍벽을 이룬다.
그리고 개성에는, 그 많은 민중의 입에 오르내린, 송도 삼절의 전설이 얽힌 박연폭포가 있다.
◆ 원문 번역
7월 16일 만월대滿月臺를 보러갔다. 김현도金玄度와 하복청河復淸의 아들 굉량宏量이 모두 술병을 차고 와서 모였다. 돌아가는 길에 유수를 뵙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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