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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에 유람갔다가 죄인 심문에도 끌려가다
금난수가 지키고 있는 제릉에서는 강화도도 그리 멀지 않았다. 늦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던 7월 22일, 금난수는 강화도로 향했다. 제릉이 있는 개풍에서 강화도로 가기 위해서는 승천부(昇天府) 나루에서 배를 타야 했다. 이곳은 개성 사람들이 바다로 나가기 위해 주로 이용하는 나루였다. 몽골의 침입을 받았던 때에도 고려 고종이 이곳을 통해 강화도로 건너가 천도하였다.

나루를 건넌 뒤에는 뱃길에 노곤해졌는지 길가에서 낮잠을 한숨 잤다. 자고 난 뒤 강화에 처음 왔으니 공직에 있는 자로써 인사 없이 유수부를 지나칠 수 없었기 때문에 옛 고려궁지 안에 있는 강화 유수부에 들어갔다. 강화부사 곽영은 제릉에 가끔 헌관으로 오기 때문에 이미 면식은 있는 터였다. 부사는 마침 나갈 채비를 하던 참이었다. 부사는 죄인을 심문할 일이 있어서 교동(喬桐)에 들어갈 일이 있다면서, 금난수에게도 함께 갈 것을 권하였다. 교동은 안평대군과 연산군, 그리고 이후 1623년에 광해군의 아들 이질(李侄)이 유배를 갔던 곳이다.

부사가 청하는데 그 말을 거스를 수가 없었던 금난수는 다시 배를 타고 인화진(寅火津) 나루를 건너 교동도로 향했다. 강화도 본섬에서 교동도로 가는 배가 다니는 인화진 나루는 금난수가 지금까지 본 나루 중에 가장 넓은 나루였는데, 너비가 족히 3리(약 1.17km)는 될 듯이 보였고, 배 안에서 위아래로 거북이처럼 목을 빼고 멀리 바라보니 족히 4~5리(약 1.96km)는 될 듯도 하였다.

이틀간 교동 관아에서 부사가 죄인을 심문하는 자리에 동석한 금난수는 7월 24일,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부사와 함께 다시 강화도로 돌아왔다. 너무 오래 제릉을 비운듯하여 돌아가고 싶었지만 날씨가 도와주지를 않았다. 다음 날에도 금난수는 강화 유수부 안에 머무르며, 동헌에서 부사와 함께 밥상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으나 밤이 되도록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 금난수를 위로한 것은 부사의 거문고 소리였다. 고즈넉한 가운데 나직하고 절도 있는 거문고 소리를 들으며 비오는 밤이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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