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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간의 휴가, 달콤한 고향 술맛
제릉 참봉으로 부임한지 약 3개월 만에 고향인 안동에 돌아온 금난수는 여정으로 피곤한 몸을 쉬게 할 새도 없이 친척들과 동네 어른들, 그리고 벗들에게 인사를 다니느라 여념이 없었다. 집에 도착한 날로부터 사흘 뒤에는
시제(時祭)
를 지냈다. 시제는 각 계절의 중간 달인 2·5·8·11월에 부모로부터 5대조에 이르는 조상에게까지 지내는 시절 제사이다. 조선에서는 조상의 묘에 가서 제사를 지내는 묘제를 절기마다 지냈기 때문에 시제와 묘제가 겹치기도 하였다. 제사를 지내는 시기에 대해
이이(李珥)
는 24절기 중 정월 15일, 3월 3일, 5월 5일, 5월 15일, 7월 7일, 8월 15일, 9월 9일의 일곱번에 걸쳐 묘제를 지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시대나 집안마다 그 절차는 각기 달랐다. 금난수는 집에 오자마자 이 제사를 지내고, 모인 집안사람들 및 동네 사람들과 음복을 하며 오랜만에 교류하였다.
제사를 지낸 다음날인 9월 16일에는 이굉중이 지나는 길에 금난수에게 들렀기에 그와 함께
운암(雲岩)
동촌(東村: 현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으로 갔다. 금난수의 고종사촌인 손규와 농암 이현보의 아들인 이숙량이 이곳에 살고 있었는데, 그 전부터도 금난수는 운암을 찾으면 이들을 반드시 찾아보고는 했었다. 그 외에도 여러 사람이 모여 함께 동촌 한가운데를 지나는 유곡천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시간을 보냈다. 잡은 고기를 안주삼아 술을 한잔 두잔 마시니 저물녘이 되자 잔뜩 취해버렸다.
이후에도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지내다가 다시 한 번 천변에서 가을 날씨를 즐기고 싶었던지 9월 21일에는 청량산에 있는 협곡인 단사협(丹砂峽: 현 안동시 도산면 단천동) 하류로 갔다. 이번에 함께 한 사람들은 금응협, 금응훈, 그리고 그들의 외조카이자 퇴계 이황의 장손인 이안도 등이었다. 가을이라 통통하게 살찐 물고기들이 많았는데, 이번에는 십여 마리를 잡아 회를 쳐 여러 사람이 술에 곁들여 배부르게 먹었다.
달이 바뀌자 이번엔 술을 마실 핑계가 천렵에서 제사로 바뀌었다. 월초에는 초하루 제사가 있었고, 초하루 제사 뒤에는 10월 3일에 다시 한 번 시사를 지냈다. 음복을 하면서 여러 사람과 어울렸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제사를 지내고 이틀 뒤에는 소종사촌인 손환 등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동계서재를 구경한다며 손에 손마다 술을 들고 모였다.
다시 임지인 제릉으로 떠나갈 때가 점점 가까워 오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금난수는 도산서원과 여러 조상의 묘에 참배하면서 인근 지역을 돌아다녔고, 그 때마다 동네의 어른들과 친척 어른들, 그리고 고을 수령이 모두 금난수를 전별하는 말을 해 주었다. 집을 떠나기 하루 전인 10월 21일에는 강가에서 함께 술을 마시던 이들이 모두 금난수의 집에 와서 떠들썩하게 전별을 해 주었다.
다음날까지도 벗들은 길가까지 일부러 나와 금난수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일부러 뒤쫓아 와 인사하는 둥 각별한 정을 보여주었다. 오랜만에 정다운 사람들을 만나 한 달 여간 즐거운 시간을 보낸 금난수는 고향을 떠나기가 섭섭하였지만, 전별하는 이들이 한 잔 두 잔 따라준 술로 마음을 달래며 그저 자신이 올라탄 말의 발걸음대로 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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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성재일기(惺齋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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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금난수(琴蘭秀)
주제 : 유흥
시기 : 1579-09-13 ~ 1579-10-22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경상북도 안동시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금난수, 이굉중, 손규, 이숙량, 금응협, 금응훈, 이안도
참고자료링크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금난수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이굉중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이안도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금응협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금응훈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이숙량
◆ 조선시대 전별(餞別)
조선시대 문인들에는 송별 또는 전별(餞別)로 불리는 문화가 있었다. 전별은 주로 친구 또는 동료의 외직 부임시, 유배를 떠날 때,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나 사명을 받아 중국으로 떠날 때 관례적으로 이루어졌다.
전별시에는 잔치를 열어 창수화답하며 이별의 아쉬움을 토로하고 선정이나 임무의 완수를 당부하고 격려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를 전별연이라고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림을 그려 행사를 기념하기도 했는데, 1508년 이현보(李賢輔)의 전별연을 그린 <무진추한강음전도(戊辰秋漢江飮餞圖)>가 그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그리고 이 때 지은 시문은 이날의 모임을 기념하기 위해 첩이나 축으로 꾸며져 보장(寶藏)되곤 했는데, 현재 유수한 가문에 소장된 별장첩(別章帖), 송별시축(送別詩軸), 연행증언첩(燕行贈言帖) 등이 바로 여기에 속한다.
문인·관료들의 전별이란 것이 어찌 보면 매우 호사스럽게 비쳐질 수도 있겠지만 당시의 관행으로 볼 때는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었고, 또 시로써 정감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지식인들의 아취가 느껴지는 고급문화라 할 수 있었다. 「연행증언(燕行贈言)」은 1609년 봄 정경세(1563~1633)가 동지사에 임명되어 명나라로 떠날 때 지구·문인들의 송별시를 수록한 시첩이다. 여기에는 이호민(李好閔)·심희수·이정구(李廷龜)·이정겸 등 당대 일류 문인들의 격조 높은 시가 친필로 쓰여 있고, 사용된 종이 역시 색감이 다채롭고, 다양한 종류의 인장까지도 날인되어 있어 첩의 품위가 한결 돋보이는 명품이다. 이 시첩을 통해 선인들의 전별 문화를 마음껏 느껴볼 수 있다. 참고로 1614년 김중청(金仲淸)이 천추사 겸 사은사(千秋使兼謝恩使)의 서장관으로서 명나라로 사행할 때 작성된 송별시첩인 「조천별장(朝天別章)」역시도 수록된 인사들의 사회적 지위나 시문의 격조, 장첩의 솜씨 등을 고려할 때 현존하는 여러 연행송별첩 중 단연 주목되는 선본이 아닐까 싶다.
1) 관리들의 전별연
농암 이현보(李賢輔)가 연로한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외직을 자청한 것은 1508년 그의 나이 42세 때였다. 농암은 이후 영천군수를 시작으로 무려 30여 년 동안 적지 않은 기간 외직으로 나오곤 했다. <무진추한강음전도(戊辰秋漢江飮餞圖)>는 농암이 영천군수로 나올 때 한강의 기슭 제천정에서 친구들과 전별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어버이가 돌아가시고 난 후, 1542년 농암은 국왕과 친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정계를 은퇴했다. 중종은 친히 농암을 접견하고 ‘금서띠(金犀帶)’와 ‘금포(錦袍)’를 하사했다. 이 시기는 첨예한 사화의 시대였지만 사림과 훈구의 실력자들이 일제히 은퇴식장에 참가하였다. 이 날의 전별연은 궁궐에서 한강까지 전별인사들의 행차가 이어졌고, 이를 구경하기 위해 모인 시민들이 담장처럼 둘러서서 “이런 일은 고금에 없는 성사”라고 찬탄했다. 『농암집』 에는 당시의 전별연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회재(晦齋)는 장문의 전별시를 지었으며, 모재(慕齋)와 충재(冲齋)는 한강까지 나왔고 신재(愼齋)는 죽령에서 농암을 맞이했다. 퇴계는 이날 배를 타고 따라오면서 거듭해서 시를 바쳤고, 훗날 자신도 은퇴를 감행했다. 훗날 퇴계의 은퇴에 대해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은 한 때 ‘선생님의 사퇴는 매우 잘못되었습니다.’라고 날카롭게 공격한 바 있는데, 퇴계는 이 공격에 대하여 최후로 농암의 은퇴를 인증하면서, “지금 사람들은 이러한 은퇴가 있는지 알지도 못합니다.”고 개탄했다. 김중청(苟全 金中淸) 선생은 농암의 정계 은퇴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아아! 선생이 선생다운 바는 학문과 현달이 아니오, 벼슬과 나이가 많다는 것도 아니다. 선생이 선생다운 바는 오직 정계를 자진해서 은퇴한 것이라 하겠다. 대개 유사 이래 벼슬한 사람이 용퇴한 경우로는 한나라의 소광(疏廣), 소수(疏受)와 당나라의 양거원(楊巨源) 외에는 다시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우리나라는 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이 수천 년을 내려왔는데, 유독 우리 농암 선생께서 쇠퇴한 세사풍속 가운데서 분연히 일어나 소광, 소수, 양거원의 자취를 이어 용퇴하셨다. 회재(晦齋), 충재(冲齋)께서 전송대열에 서고, 모재(慕齋), 퇴계(退溪)께서 시를 지어 작별했으니, 소광(疏廣), 소수(疏受)가 떠날 때의 1백량의 수레가 줄을 이은 영광에 비유하겠는가… 우리 농암 선생이야말로 천백만 명 가운데 한 분 뿐임을 진정 흠모하게 되었다.”
2) 사신단 전별연
사신이 국경으로 가는 동안에 숙박하게 되는 지역에서는 해당 관아에서 전별연을 열어주었다. 이들 지역은 전별연에 다양한 공연을 선보일 정도로 경제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교방이 있어서 궁중의 내·외연에 선상기를 올려 보내기도 하였다. 대일사행이든 대중국사행이든 사신들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일정한 지역에서 숙박하였으며, 그 지역의 관아에서 전별연을 베풀어 주었다. 그러므로 사행에 있어서 거점이 될 만한 지역은 정해져 있었다. 통신사 길에서는 ‘충주’, ‘안동’, ‘영천’, ‘경주’, ‘부산’이 그 역할을 하였지만, 사행록에는 ‘안동’, ‘영천’ ‘부산’ 지역에서의 전별연과 공연만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지방의 공연양상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가 사행록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서이다. 그런데 지방공연의 양상이 구체적으로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중엽 이후이기 때문에, 1764년 이전의 전별연 기록만 남아 있는 통신사행에서는 구체적인 공연양상을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통신사의 사행록에는 의례가 중시되는 ‘사연(賜宴)’과 풍류가 중심이 되는 ‘사연(私宴)’에 따라 공연이 각기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다. 의주대로에서는 황주, 평양, 안주, 선천, 의주 지역을 중심으로 전별연이 있었다. 그런데 중국으로의 사행은 19세기 말까지 지속되었기 때문에 지방공연의 구체적인 양상과 변화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사행록에 기록되어 있는 공연물 중에서 ‘황주’에서는 선유락의 변화가, ‘평양’에서는 조선시대 전반적으로 사행의 중심거점으로 공연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 ‘선천’에서는 검무와 항장무의 변화가, ‘의주’에서는 마상재공연 양상이 잘 드러나고 있다.
◆ 원문 번역
9월 13일 아침에 숙부 및 습독 권중옹權仲雍을 뵈었다. 마을의 여러 사람들이 보러왔다. 9월 16일 이굉중李宏仲이 지나는 길에 찾아왔기에 함께 운암雲岩 동촌東村에 갔다. 손숙향孫叔向과 김자평金子平 등 여러 사람들이 모여 물고기를 잡았다. 진사 이대용李大用이 먼저 돌아갔다. 저물녘에 잔뜩 취하여 돌아왔다. 9월 21일 하단사협下丹砂峽에서 천렵을 하여 물고기 십여 마리를 잡았다. 금협지·훈지, 봉사 이봉원, 이보경, 권의숙 등 여러 사람들과 천변에 앉아서 회를 치고 술잔을 돌렸다. 밤이 깊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10월 22일 길을 나섰다. 조 봉화가 금훈지琴壎之와 함께 역동서원易東書院 천변에 나와서 전별해주고, 이수량李遂樑과 이윤량이 분천 길가에 나와서 전별해주었다. 지나는 길에 온계의 두 아재를 뵙고 오겸중吳謙仲 댁에 들어갔다. 이보경도 뒤쫓아 왔다. 홍정洪亭에 당도하니, 봉화 사람 금희도琴希度, 금행원琴行源, 금의경琴義卿 및 류종개柳宗介 등이 시냇가에서 매를 풀어 놓고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매우 취하고 날도 어둑하여 이경량李慶樑 집에 투숙하였다. 술과 안주를 차려 정성스럽게 대접을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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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사 신이복이 벌초를 위해 휴가를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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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를 떠난 수령들이 여러 달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아 속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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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문해, 목욕하러 고향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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