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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부자가 모두 낙방한 알성별시
1월이 되자마자 금난수는 임지인 제릉에서 도성으로 들어와 남부동(南部洞: 지금의 서울 중부경찰서 근처)에 임시로 거처를 정하였다. 2월 말에 도성에서 별시가 열리기 때문이었다. 이번 별시에는 금난수의 아들들 중 막내만 빼고 모두 응시할 예정이었다. 금난수는 시험을 앞둔 사람답지 않게 1월부터 2월 초까지 도성에 있는 여러 지인들과 만나 연일 술자리를 벌였다. 2월 11일에는 큰아들 금경과 둘째 아들 금업이 육로를 통해서, 평소 형제들과 행동을 따로 하는 경향이 있는 셋째 아들 금개는 여주에서부터 김택룡과 함께 뱃길을 통해 서울에 들어왔다. 비록 길은 달리 왔으나 도착한 날은 같았다.

아들들이 도성에 들어와 있었지만 지인들과의 만남은 시험 이틀 전까지 매일 이어졌다. 2월 25일에는 성균관 명륜당에서 알성시(謁聖別試)가 치러졌다. 알성시는 왕이 문묘에 제례를 올릴 때 성균관 유생들과 그에 준하는 자격을 갖춘 자들이 응시하는 비정기 문‧무과 시험이었다. 문과의 경우에는 식년시와는 달리 초시나 복시를 보지 않고 왕이 친히 참가하는 전시(展試)만으로 당일에 급제자를 선발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5월 25일과 5월 29일, 3월 2일 세 번에 걸쳐 시험이 거행되었다.

2월 29일에는 금난수는 제3소인 장악원에서 시험을 보았고, 금난수의 아들들은 성균관으로 들어가 시험을 쳤다. 3월 2일에는 시험의 마지막 절차인 종장(終場)이 치러졌다. 이때 시험문제로는 송정이등진수정학제(宋程頤等進修正學制)에 대한 표문이 출시되었다. 금난수는 급제하지 못하였고, 이때 뽑힌 사람들은 총 12명이었다. 급제자 중에는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항복이 있었다. 이때는 아니지만 3월 18일에 열린 별시에서는 이덕형이 2등으로 급제하였다. 비록 금난수와 아들들은 급제하지 못하였지만 쟁쟁한 사람들이 이해에 조정으로 진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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