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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귀신들을 위해 제사 지내다
자정이 지난 깊은 밤. 비봉산 기슭 향교에는 불빛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이날은 여제(厲祭)가 있는 날이었다. 노상추도 이날 헌관(獻官)으로 발탁되어 제사를 거행하였다. 여제는 제 명을 다 누리지 못하고 죽은 억울한 원혼이나 제사를 지내줄 후손이 없는 혼령을 위해 국가나 마을에서 지내는 제사이다. 이렇게 떠도는 혼령을 여귀(厲鬼)라고도 하는데, 민간에서는 여귀가 역병을 몰고 다닌다고 생각했다.
노상추는 여제를 지내면서도 그 절차와 바친 제물이 미흡하여서 여귀를 달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절차와 제물이 미흡한 이유는 여제가 주기적으로 지내는 제사도 아니고, 또 헌관인 자신 역시 아직 이런 공식적인 제사에 채 익숙하지 못한 연소자였기 때문에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다만 부족하나마 이번 제사로 여귀들의 마음이 달래져 올해는 동네에 역병이 들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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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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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노상추(盧尙樞)
주제 : ( 미분류 )
시기 : 1764-03-03 ~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경상북도 구미시
일기분류 : 관직일기, 생활일기
인물 : 노상추
참고자료링크 :
조선왕조실록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노상추
◆ 조선시대 전염병과 대책
전염병은 병독(病毒)이 전염되는 질환을 가리키는 말이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전염병을 역질(疫疾)·질역(疾疫)·여역(癘疫)·역려(疫癘)·시역(時疫)·장역(瘴疫)·온역(瘟疫)·악역(惡疫)·독역(毒疫)이라고 불러 왔다. 이 중 역(疫)은 널리 유행하는 전염병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여(癘)는 좋지 않은 병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어 왔다. 결국 오늘날의 처지에서 볼 때 역려란 좋지 않은 전염병이라고 해석되며 악성유행병을 의미하였다.
조선시대에 이르자 전염병 발생에 관한 기록은 더욱 자세하게 나온다.
특히, 조선시대에 크게 발생해서 문제되었던 질병을 보면 두창(痘瘡)·홍역·콜레라 등을 들 수 있으며, 이와 같은 질병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와 밀접한 교류를 가졌던 중국대륙은 물론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유행되어왔다. 실제로 두창은 4~5세기경에 중국에서 크게 유행한 뒤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아시아 각국에 크게 퍼졌으며, 콜레라는 1819년에 중국에 들어와 1820년에 중국 대륙을 휩쓸고 1821년에 우리나라에서 크게 유행한 뒤, 1822년에는 일본에 파급되어 아시아 전체에 공통된 질병이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점차 역병을 두창이나 홍역 같은 발진을 수반하는 전염병과 말라리아 및 콜레라를 구별해서 기록하기 시작하였으며 개별적인 전염병의 기록이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즉 조선시대 사람들은 발진을 일으키는 질병을 두창·수두(水痘)·마진·풍진·홍역으로 구별할 수 있었으며, 장티푸스와 발진티푸스를 의미하는 온역과 해병(咳病) 등이 구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단지 병명만으로 과거의 전염병 유행을 구체적으로 감별하기는 어려우며 사관(史官)에 따라서는 혼동해서 기록한 경우가 없지 않으나 점차 전염병이 구체화되고 세분화되어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분명하다.
조선 개국 후 처음으로 발생한 역병은 1396년(태조 5) 3월에 발생한 전염병이다. 특히 “경축성 역부 역려유행(京築城役夫 疫癘流行)”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도성을 쌓기 위하여 소집한 인부들에게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였다는 것이다. 1525년(중종 20)에 이르자 조정에서는 전염병 유행에 대응하기 위하여 『간이벽온방(簡易辟瘟方)』을 지어 반포하기 시작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간단하게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하여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사항들을 수록해서 알리도록 힘썼다.
1550년(명종 5)에 이르자 말라리아가 크게 돌고 황달이 심해져 조선 정부는 『황달학질치료방(黃疸瘧疾治療方)』을 만들어 배포하기에 이르렀다. 그 뒤에도 계속 전염병이 돌자 광해군 때에 이르러 새로운 『벽온방(辟瘟方)』과 『벽온신방(辟瘟新方)』이 발행되었으며, 효종 때에 이르자 또다시 『벽온신방(辟瘟新方)』이 나오게 되었다. 이러한 전염병의 발생에 즈음해서 많은 사람들은 우선 역귀 때문에 무서운 전염병이 발생한다고 믿었다. 불교에 의한 인과응보설이나 유교적 배경에서 나온 운기불화설(運氣不和說)에도 불구하고 전염병의 유행은 귀신의 조화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따라서 전염병이 많이 돌 때는 여제(癘祭)를 드렸다. 실제로 여제에 쓰였던 제문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편찬된 각종 의서를 보면 계절이나 기후의 변화 때문에 전염병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전염병이 발생하면, 일단 환자를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부터 격리시켰다. 궁궐도 마찬가지고, 지방의 마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기에 나오는 유곡이나 금곡은 아마도 환자를 격리시켰던 곳이 아닌가 한다. 인적이 드문 곳에 환자를 격리시켜 두고 의원들을 보내어 처방을 하거나 약을 먹였던 것이다.
◆ 원문 번역
갑신일기 1764년(영조 40) 3월 초3일(갑인) 볕이 나고 비가 내리다가 저녁에 맑음. 여재복呂載復 척숙이 신당포新堂浦로 향했다. 내가 산장山長을 대신해서 여제厲祭 헌관으로 향교에 들어가 삼경(오후 11시~오전 1시)에 제사를 거행했는데, 온갖 절차라고 하는 것들이 신이 흠향하도록 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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