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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부처와 귀신의 힘을 모두 모은 기우제
7년째 농사철마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마음을 졸여야 했다. 비가 충분히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판에 어린 벼를 심어 놓았다가 논에 물을 채운 뒤 옮겨 심는
이앙법(移秧法)
역시 충분한 양의 물과 수리시설이 필요한 농법이었다. 올해 역시 매우 가물어서 여름이 되어도 비가 온 날이 5~6일에 지나지 않았다. 또 비가 온다 해도 흙을 충분히 적실 정도의 양이 아니었기 때문에 황폐한 땅에서도 잘 자란다는 콩 모종마저 말라죽을 정도였다. 논의 벼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안 오는 비를 사람의 힘으로 내리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저 손가락을 빨며 하늘만 쳐다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국왕 이하 모든 백성은 가뭄이 든 이래 7년간 매년 기우제를 지내왔다. 기우제를 지낸다고 반드시 비가 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비를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 풀어주는 효과는 있었다. 올해 역시 기우제가 거행되었다. 수령은 선산 근처의 큰 산인
금오산(金烏山)
에 승려와 무당, 소경까지 모두 불러 모아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하늘과 산신, 부처, 그리고 귀신에게까지. 빌 수 있는 대상에게는 모두 빈 셈이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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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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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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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노상추(盧尙樞)
주제 : ( 미분류 )
시기 : 1764-05-21 ~ 1764-05-27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경상북도 구미시
일기분류 : 관직일기, 생활일기
인물 : 노상추
참고자료링크 :
조선왕조실록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노상추
◆ 조선시대 기우제
기우제(祈雨祭)는 가뭄이 들었을 때 비가 내리기를 비는 제사이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농업을 기본으로 삼아왔다. 농업에는 물이 필요하며, 그것은 곧 비를 의미하였다. 특히, 벼농사에는 적절한 강우량이 필요하나 우리나라에서는 장마철에만 집중적으로 비가 내리고 그 전후에는 가뭄이 계속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따라서 수리시설이 부족했던 옛날일수록 기우제는 많을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은 전국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농민의 생사를 좌우하는 것이 농사이고, 그 농사를 좌우하는 것이 바로 비였기 때문에 기우제에는 가능한 모든 방법이 동원되어 왔다.
그러한 비에 대한 관심은 단군신화의 환웅이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내려 왔다는 기록에서부터 보인다. 삼국시대에는 삼국이 각각 시조묘·명산대천 등에 기우제를 올렸던 기록들이 ≪삼국사기≫에 보인다.
그 중에는 왕이 직접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도 있고, 최근까지도 행해졌던 방법처럼 시장을 옮기고, 용을 그려서 비가 내리도록 빌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고려시대에도 기우제에는 국왕 이하 사람들이 근신하고, 천지·산천·종묘·부처·용신에게 제를 지냈다. 비가 내리도록 비는 법회(法會)도 열고, 도교의 태일(太一)에 초제(醮祭)도 올렸다.
그 중 잦았던 것은 무당을 모아 비가 내리도록 비는 취무도우(聚巫禱雨)의 기록이다. 많을 때에는 300명, 긴 날짜로는 6일씩, 흙으로 용을 만들고 비가 내리도록 빌기도 하였다.
≪고려사절요≫ 권4 정종 2년조에 기우제를 행하는 예법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보면 가뭄 때에는 죄수들을 자세히 심리하여 죄 없이 억울하게 형벌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하고,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고, 무덤이 파헤쳐져 밖으로 드러난 해골을 묻어 주었다.
그리고 큰 산이나 강·바다는 구름과 비를 일으키는 곳이라고 하여, 그에 대해서 각각 북교(北郊:북쪽 교외. 예전에 창의문 밖의 근교)에서 기도하고, 그 다음에 종묘에 빌었다.
이와 같이 7일마다 한 번씩 빌어도 비가 오지 않으면, 다시 큰 산·강·바다에 처음과 같이 기도하고, 가뭄이 더욱 심해지면 기우초제를 지내는 제단인 기우단에 제사 지낸다. 장터에서 사람들이 더위를 피하여 모자 쓰는 것, 부채질하는 것을 금지하였고, 관마(官馬)를 먹이는 데는 곡식을 쓰지 못하게 하였으며, 도살도 금하였다. 조정에서는 국왕과 백관들이 근신하였다.
국왕은 정전을 피하여 밖에서 정무를 보았으며, 반찬의 가짓수도 줄였다. 이것은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등 천재지변이 있는 것은 국왕이나 조정의 대신들이 덕이 없어 정치를 잘못한 것이라고 생각한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도 기우제는 잦았다.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보면 기우제가 음력으로 4월에서 7월 사이의 연중행사였음을 알 수 있다. 한 예로 태종 재위 18년간, 기우제에 관한 기록이 없는 것은 1403년(태종 3) 한 해뿐이다.
기타 17년 동안은 해마다 2∼3회씩, 16년 한 해 동안에는 9회의 기우제 기록이 보였다. 또, 반대로 이 18년 동안 6회의 기청제(祈晴祭) 기록도 보이는데, 이는 장마철인 6∼7월 사이에 행해졌다.
이렇게 나라에서 지내던 기우제 중에는 국행기우제(國行祈雨祭)의 12제차가 있어서 각 명산·대천·종묘·사직·북교의 용신들에게 지내는 복잡한 절차가 있었다.
12제차는 가뭄의 정도에 따라서 5월에 1차, 6월에 2차를 지내기도 하고, 5월에 5차까지, 6월에 8차까지 하기도 하고, 심하면 4월에 10차까지 하고 5월에 12차까지 다 끝내는 때도 있었다.
이러한 국행기우제에는 대신들을 제관으로 파견하였다. 그 밖의 기우제로 고려시대 이래의 취무도우도 많았고, 승려나 장님들을 절에 모아서 비를 빈 기록들도 있다.
한편 민간이나 지방관청의 기우제도 다양하였다. 1930년대의 유형과 방법들을 간단히 살피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일반적인 절차로서, 동제(洞祭)를 지낼 때와 같은 방식으로 제관들이 선출되고, 소머리·돼지·닭·술·과실·포·식혜 등의 제물을 차리고, 강신(降神)·헌주(獻酒)·독축(讀祝)·음복(飮福) 등의 절차를 지낸다. 그러고 나서 다음과 같은 기우제 나름의 독특한 방법들이 행해진다.
(1) 산상분화(山上焚火)
제관들이나 마을사람들이 장작·솔가지·시초(柴草) 등을 산 위에 산더미처럼 쌓고 불을 지른다.
흔히 군(郡)에서 주최하여 수십 개 마을이 밤중에 같이 하므로 대단한 장관을 이루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는 까닭으로는 기원을 천신께 알리기 위해서라든가, 천신이 오르내리는 길을 밝힌다든가, 양기(陽氣)인 불로 음기인 비구름을 부른다는 등의 이유가 전해져 오나, 대개 옛 관습을 따른 것이다. 기압의 변화가 적은 밤중 고기압에 덥혀진 저기압의 충격이 비구름을 형성시킬 수 있으리라는 논의도 있다.
(2) 물병 거꾸로 매달기와 물긷기
기우제 기간 중 마을사람들이 각기 자기집 처마 끝에 버들가지나 솔가지로 마개를 한 물병을 거꾸로 매단다. 이것은 낙수가 떨어지는 듯한 유사주술행위(類似呪術行爲)로, 유사한 현상은 유사한 결과를 낳는다는 원초적 심성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또 부인들이 강물을 키[箕]에 퍼서 머리에 이고 온몸을 적신 채 뭍으로 오르내리기를 되풀이한다. 이것도 위와 같은 유사주술행위로 보인다. 또 부인들이 각자 물동이에 강물을 길어 산 위의 기우제장에 가서 절을 하고 쏟아 버리기도 한다.
(3) 시장 옮기기
삼국·고려·조선시대에 모두 기록이 있는 오랜 전통이다. 비가 내릴 때까지는 옮긴 장터에서 계속 장을 벌인다. 원시장터에는 무당을 모으거나 흙으로 큰 용을 빚어서 기우제를 계속 지내는 곳도 있었다.
그런데 조선 초기 한양(지금의 서울)의 경우는 원칙으로 시장을 종로에서 남쪽인 남대문이나 지금의 충무로 쪽으로 옮기는 동시에 남대문을 닫고 북문을 열었다. 이는 음기(陰氣)인 시장을 옮기면서 남문의 양기를 막고, 북문의 음기를 들이고 음기인 비구름을 맞으려는 음양설에 근거를 둔 주술적 신앙행위였던 것으로 보인다.
(4) 용제(龍祭)
삼국시대부터 전국 각지에서 성행하던 방법이다. 용을 그려 붙이기도 하고, 용을 만들어서 빌기도 하였다. 장소는 기우제장이나 장터이고, 용의 크기도 60㎝에서 20여m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몸뚱이는 통나무에 짚을 감고 흙을 바르고 청색으로 비늘을 그린 다음, 머리 쪽에서는 무당들이 굿을 하고, 몸뚱이 쪽에서는 판수들이 독경을 하고, 꼬리 쪽에서는 중들이 염불을 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비구름을 자유로이 부른다는 용의 영력이 발휘되기를 촉진, 강청하는 것이다.
(5) 줄다리기
줄다리기는 연중행사의 하나로 대개 정월대보름에 행해졌다. 그런데 이 줄을 용으로 인식하는 관념이 있었다. 그래서 줄다리기를 쌍룡상쟁(雙龍相爭)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 비구름을 기대하는 것이다. 이긴 편에 강우와 풍년이 약속된다고 믿어, 가물었을 때에 줄다리기를 벌여 쌍방이 결사적으로 줄을 당기는 곳들이 있었다.
(6) 부정화(不淨化)
예로부터 오늘날에까지 계속 행해지는 전통적인 방법이다. 이것은 기우제장이나 용신이 있다고 전하는 용소(龍沼)·용연(龍淵) 등에 개를 잡아서 생피를 뿌리거나, 머리를 던져 넣어서 신성성을 더럽히는 것이다.
이 부정을 자취 없이 깨끗이 씻어내기 위하여 용신이 큰 비를 내린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한강이나 박연폭포에 용의 원수인 호랑이 머리를 넣었다는 기록들이 있다.
(7) 묘 파기
명산의 명당에 조상을 모시면 자손이 번창한다는 풍수신앙에서 유래한 방법이다. 예로부터 많은 마을들은 명산의 기슭에 자리를 잡고 그 생기를 고루 받으면서, 한 집안의 독점을 막는다는 관념이 있었다. 또 명산에 시체를 묻으면 부정을 씻을 수 없고 비가 안 내린다는 관념도 있었다.
그래서 가뭄이 계속되면 누가 몰래 암장(暗葬)한 것으로 알고, 산을 뒤져서 묘를 파내고 시체가 있으면 이것을 드러내 놓는다. 이것 또한 산신에게 비를 내리고 부정을 씻게 하려는 부정화의 방법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작성된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에서 보면, 이러한 기우제들이 거의 자취를 감추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직 노인들의 체험담을 통해서 묘 파기·부정화·산상분화에 관한 세부 자료를 많이 얻을 수 있다.
특히 전라남도 도서지방과 산간지방에 기우제의 옛 모습이 많이 남아 있는데, 묘 파기는 부인들이 하는 일이었고, 산상분화와 부정화 방법들은 남자들이 면(面)단위 정도로 여러 마을이 동시에 하는 특색을 가지고 있다.
◆ 원문 번역
갑신일기 1764년(영조 40) 5월 21일(임신) 볕이 나고 크게 가뭄. 대체로 금년은 가물어서 여름이 된 뒤에 두 달 동안 흐리다가 잠깐 비온 것이 5~6일이었는데, 날이 흐리면 반드시 바람이 불고 비가 왔지만 흙을 적실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콩의 모종은 모두 말라죽었고, 논의 벼도 모두 손상되어서 초목뿐만 아니라 사람도 가뭄의 피해를 입었으니 어찌 그리도 가혹한가? 7년이나 비를 빌었다니 역시 괴이하다. 5월 22일(계유) 볕이 남. 어제 내가 운곡雲谷으로부터 돌아와 보니 오천운吳千運 어른 및 박한성朴漢星 군이 와서 머물러 있었다. 5월 23일(갑술) 볕이 나고 가물다가 저녁에 빗방울이 떨어짐. 월동月洞의 김음金崟 척장께서 들렀다가 평성坪城으로 향하셨다. 5월 24일(을해) 볕이 나고 가뭄. 이날 오천운吳千運 어른과 박한성朴漢星 군이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5월 25일(병자) 볕이 나고 가뭄. 아버지께서 외출했다가 돌아오셨다. 5월 26일(정축) 크게 가뭄. 영당影堂의 동임同任 김덕형金德亨이 금오산金烏山 기우제를 지내는 곳으로부터 와서 들렀다가 영당으로 갔다. 5월 27일(무인) 크게 가뭄. 들으니 수령이 승려·무당·소경을 시켜서 비를 비는 일을 했다고 한다. 들으니 선산부善山府의 동북쪽 웅곡면熊谷面 일촌一村에 남南가哥와 심沈가哥가 이웃해서 살았는데, 남가와 심가 두 사람의 아들들이 뒷산에 갔다가 호랑이를 만나서 새끼 네 마리를 모두 죽이고 돌아왔다고 한다. 4~5일 뒤에 남용南容이란 사람이 마침 외출했다 돌아오지 않았는데, 큰 호랑이가 산에서 내려와 곧바로 심가의 집에 들어가 큰 소를 죽이고는 먹지 않았으며 간장항아리, 가마솥 등의 물건을 훼손하고 깨뜨렸다. 또 남가의 집으로 가서는 바로 안방으로 들어가서 처와 며느리, 딸 2명, 아들 1명을 죽였으며 또다시 승려 1명, 포수 1명을 죽였다. 그리고 또 방에 들어가서 누운 채 나오지 않자 관에서 별포수別砲手에게 분부하여 호랑이를 잡았는데, 그 길이가 턱밑 볏[耳下]이 세 뼘[一把一掬]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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