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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에서 봄을 몰고 북방으로 온 거문고 타는 손님
노상추가 변방에 근무하면서 가장 불만스러운 것 중 하나는 이곳의 투박한 풍속이었다. 간혹 갑산부사가 열어주는 잔치에 기생들이 와서 춤추고 노래해도 서울에서 보던 것과는 다르고 영 낯설기만 해서 온전히 즐기기가 어려웠다. 즐길 거리를 찾으려 눈을 이리저리 돌려보아도 온통 험준한 산밖에 보이지 않고, 입에 댈 것은 거친 잡곡밥과 신맛이 느껴지는 술밖에 없었다.
그렇게 기나긴 북방의 겨울을 밋밋하게 보내던 어느 날, 봄날의 훈풍처럼 남쪽에서 온 손님이 있었다. 손님의 이름 역시 봄기운 물씬한 이춘화(李春和). 이춘화의 특기는 거문고 타기였다. 이춘화는 얼마간 갑산부 관아에 묵기로 했다. 이 소식을 다들 어떻게 들었는지 관아에 사람이 모여들었다. 노상추를 비롯하여 병으로 드러누워 있던 행영비장(行營裨將) 이상정(李尙鼎), 책방의 황윤언(黃潤彦)도 이춘화에게 달려들어 거문고 타기를 졸라대었다. 동인보 권관 윤홍심(尹弘心)도 동인보로 돌아가는 것도 잊고 사흘간 머무르며 질릴 때까지 거문고 소리를 들었다. 거문고 소리를 들으며 소고기를 뜯고 술을 마셨음은 물론이다.
이춘화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노상추와 이상정, 윤홍심은 이춘화를 데리고 북승루(北勝樓)까지 올라가 봄갈이를 하는 농민들을 내려다보며 술을 마시고 거문고 소리를 들었다. 모두 다 취해서 농민들의 노랫소리와 거문고 소리를 구분하지 못할 때 즈음에서야 겨우 이춘화는 거문고 타기를 그칠 수 있었다.
며칠 뒤, 이상정은 거문고 소리에 더하여 노랫소리까지 본격적으로 즐기고 싶었는지 이춘화와 기생들을 데리고 노상추가 있는 진동진으로 놀러 왔다. 기생들은 모두 창에 능한 이들이었다. 함흥(咸興) 기생인 설월(雪月)은 50여 세가 넘었는데 갑산부에 살면서 어린 기생들에게 노래를 가르친다고 했다. 또 한 기생은 도화선(桃花仙)으로 북청(北靑) 기생인데, 그는 이상정의 수청기였다. 동행한 두 어린 기생 치업(致業)과 동명월(東明月)은 설월의 제자들이었다. 치업은 열두 살이고 동명월은 열네 살이었는데, 이 날은 치업과 동명월이 거문고 소리에 맞춰 창을 하고 춤을 추는 것을 보았다. 어린 기생들의 앳된 목소리가 봄날 새싹처럼 트이니, 비로소 북방에도 봄이 온 것 같았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멀티미디어
관련이야기
출전 :
노상추일기(盧尙樞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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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노상추(盧尙樞)
주제 : 유흥
시기 : 1789-03-12 ~ 1789-03-19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양강도 갑산군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노상추, 이춘화, 이상정, 황윤언, 윤홍심, 설월, 도화선, 치업, 동명월
참고자료링크 :
웹진 담談 98호
조선왕조실록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노상추
◆ 조선시대의 가곡
가곡의 기원과 발달은 조선시대의 거문고 악보에 보이는 만대엽(慢大葉)·중대엽(中大葉)·삭대엽(數大葉)에 근원을 두고 있다. 만대엽·중대엽·삭대엽은 모두 현행 가곡처럼 초장·2장·3장·중여음·4장·5장·대여음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만대엽은 가장 느린 곡으로서 조선 초기에 발달되어 중기까지 많이 불리었으나 후기에는 차차 불리지 않게 되었다.
한편, 만대엽보다 조금 빠른 중대엽도 18세기경에는 이미 많이 불리지 않게 되었고 그 대신 삭대엽이 점차 성행하게 되어 조선 말기에는 전혀 연주되지 않았다. 중대엽에 불린 노래의 가사들은 《청구영언》 《해동가요》 《가곡원류》 등의 가곡집에 전하며, 중대엽의 거문고 악곡은 《양금신보》 《현금신증가령》 《신작금보》 《유예지》 등의 고악보에 전해 온다.
조선 후기 만대엽과 중대엽이 차차 쇠퇴됨에 따라서 삭대엽이 점차 성행하게 되었는데 17세기 말기로부터 삭대엽은 1·2·3의 변주형태로 성장하고, 18세기에 이르러 농(弄)·낙(樂)·편(編)의 형태로 발전하였으며,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이수대엽(二數大葉)에서 다시 중거(中擧)·평거(平擧)·두거(頭擧)가 파생하게 됨으로써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오늘의 가곡과 같이 거대한 성악곡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영조(1725~76) 때에 가곡을 잘 부른 선가(善歌)들은 김천택(金天澤)·김우규(金友奎)·김수장(金壽長)·이세춘(李世春) 등이었으며, 이들에 의하여 가곡의 전통은 18세기에 전성기를 이루게 되었다.
이들의 전통은 19세기에 박효관(朴孝寬)과 안민영(安玟英)에 의하여 전승되었으며, 박효관의 제자인 하순일(河順一)·최수보(崔壽甫)·명완벽(明完璧)·하준권(河埈權)에게 이어졌다. 현행 가곡의 전통은 최수보와 박효관에게 사사한 바 있는 하규일(河圭一)에 의하여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 소속인 아악부원에게 전승되었으니, 그의 제자로 이병우(李炳祐)·이병성(李炳星)·이주환(李珠煥)·성경린(成慶麟)·장사훈(張師勛)·김기수(金琪洙) 등이 있다. 국립국악원의 설립 이후 가곡의 전통은 이주환에 의하여 활발히 전개되었으며, 그 결과 그의 제자 홍원기(洪元基)·김월하(金月荷)·이동규(李東圭)·김경배(金景培) 등이 활약하였다.
노래 부르는 사람의 성별에 따라서 남창가곡·여창가곡·남녀창가곡 등 3가지로 분류되며, 가곡의 곡명은 가곡의 종류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다.
남창 가곡에는, ⑴ 우조(羽調):1) 초수대엽(初數大葉) 2) 이수대엽(二數大葉) 3) 중거(中擧) 4) 평거(平擧) 5) 두거(頭擧) 6) 삼수대엽(三數大葉) 7) 소용(搔聳) 8) 우롱(羽弄) 9) 우락(羽樂) 10) 언락(言樂) 11) 우편(羽編), ⑵ 계면조(界面調):12) 초수대엽 13) 이수대엽 14) 중거 15) 평거 16) 두거 17) 삼수대엽 18) 소용 19) 언롱(言弄) 20) 평롱(平弄) 21) 계락(界樂) 22) 편수대엽(編數大葉) 23) 언편(言編) 24) 태평가(太平歌) 등이 있다.
여창 가곡에는, ⑴ 우조:1) 이수대엽 2) 중거 3) 평거 4) 두거 5) 반엽(半葉). ⑵ 계면조:6) 이수대엽 7) 중거 8) 평거 9) 두거 10) 평롱 11) 우락 12) 환계락(還界樂) 13) 계락 14) 편수대엽 15) 태평가 등이 있다.
가곡의 특징을 틀·장단·선율 등 3가지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⑴ 틀:가곡의 틀은 5장 형식으로 되었으며, 3장과 4장 사이에 간주곡인 중여음(中餘音)이 있고 5 장 다음에 전주곡인 대여음(大餘音)이 따른다. 노래는 1장에서 5장까지 관현반주에 맞추어 연주되지만 중여음과 대여음은 노래가 없는 관현반주만으로 연주된다. 시조의 시를 5장으로 나누어 부르는 가곡의 형식은 3장으로 된 시조의 형식과 아주 대조적이다.
⑵ 장단:가곡의 장단은 언제나 장구에 의하여 연주되며 2종류로 분류된다. 첫째는 16박을 한 주기로 하는 기본장단이고, 둘째는 10박을 한 주기로 하는 변형장단이다. 변형장단은 기본장단의 쉬는 곳을 제외한 실제 장구의 점수를 종합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기본장단은 초수대엽부터 농과 낙까지 모두 사용되며, 한편 변형장단은 편 종류의 악곡인 우편·편락·편수·대엽에서만 쓰인다.
⑶ 선율:현행 가곡의 선율은 우조와 계면조 등 2가지 선법에 의하여 특징을 이루고 있다. 가곡의 우조는 황종(黃鐘,E)·태주(太簇,F)·중려(仲呂,Ab)·임종(林鐘,Bb)·남려(南呂,C)로 구성된 5음음계로되었으며, 황종을 으뜸음으로 하는 sol선법으로 되었다. 가곡의 계면조는 황종(Eb)·중려(Ab)·임종(Bb)·무역(無射,D)으로 구성된 4음음계로 되었고, 황종을 으뜸음으로 하는 la 선법의 변형으로, 옛 가곡집인 《해동가요》나 《가곡원류》에 의하면 우조와 계면조의 음악적 특징을 문자로 표시하였는데, 우조는 청장격려(淸壯激勵) 또는 청철장려(淸澈壯勵), 즉 맑은 소리의 굳세고 씩씩한 남성적인 느낌으로 표현되었고, 계면조는 애원격렬(哀怨激烈) 또는 애원처창(哀怨悽愴), 즉 슬프게 원망하는 듯한 소리의 애처로운 여성의 슬픔으로 표현되었다. 서양음악에 비긴다면 가곡의 우조는 장조에 가깝고 계면조는 단조에 가깝다고 하겠다.
조선가곡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나타났을까. 옛날 우리의 할아버지들은 무슨 노래들을 불렀을까.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 유리왕5년(서기 28년) "민속환강民俗歡康하여 비로소 도솔가를 짓다. 이것이 가악歌樂의 시초다"라는 기록이 있고 삼국지 위지魏誌 동이전東夷傳에 고구려에서는 "10월에 국중國中 읍락邑落의 남녀들이 크게 모여 밤낮으로 가무歌舞하는데 이를 동맹東盟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같은 책에서 부여夫餘의 음주가무 영고迎鼓, 예濊의 무천舞天 등을 소개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향가가 있으며 고려에 들어서는 고려속요가 있다. 고려가요는 후에 별곡別曲으로 지칭되었는데 이는 고려 12세기 초(1116년) 들어온 송나라 대성大晟음악 즉 중국음악인 당악唐樂과 구분하기 위해 붙인 이름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조선초기에 이르러 우리의 민족고유음악인 고려가요는 조선의 아악으로 흡수 발전되었다. 현재 우리가 즐겨 듣고 있는 아악기악곡인 수제천壽齊天은 인류가 자랑할만한 위대한 음악작품이다. 하지만 수제천도 본디는 고려가요인 정읍사井邑詞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선가곡은 정악으로 분류되며 만년장환지곡萬年長歡之曲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본디 고려 때의 가요인 정과정鄭瓜亭 삼기곡三機曲(만慢, 중中, 삭數)에서 발전된 것이라고 한다. 또한 선조5년(1572년) 안상安 이 지은 금합자보琴合字譜에 그 원형이 나타난다고 한다. 참고로 조선 성종 때 편찬한 악학궤범에 실린 정과정의 가사를 읽어본다.
내 님을 그리워하여 울더니
산접동새와 나는 비슷하여이다
아니라 하시며 잘못되었다 하신들 아으
잔월효성이 아르시이다
넉시라도 님은 한데(같이) 가고 싶어라 아으
우기시던 이(사람) 뉘이니있까
과도 허물도 천만 없소이다
모함하는 말인지고
슬픈지고 아으
님이 나를 하마 잊으셨나이까
아소 님하 도로 들으시어 사랑하소서
조선초기 향악을 반주로 하여 궁중에서 추던 무용(향악정재鄕樂呈才)인 '학무鶴舞'에 편성된 여러 가지 곡들 중의 하나가 바로 정과정이다. 학무에 나오는 곡들로는 처용가處容歌, 봉황음鳳凰吟, 정과정, 북전北殿 등이 보인다. 유감스럽게도 그 곡의 원형들을 현재 들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정과정은 고려 의종 때 정서鄭 가 지은 곡으로 귀양살이하며 임금을 그리워하는 노래다.
그렇다면 기록에 보이는 것처럼 남창가곡 24곡의 조선가곡이 모두 정과정곡 하나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여러 가지 의문이 있어 정리를 하여본다.
첫째 조선가곡은 일견 거대한 변주곡으로 생각될 정도로 선율과 가락이 대동소이하고 흡사하다. 다만 정과정을 부를 때 장단의 빠르기가 세 가지(만대엽, 중대엽, 삭대엽)여서 조선가곡이 이를 바탕으로 음악형식을 채용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조선가곡의 편성은 여러 가곡이 끼여들어 일종의 조곡형식으로 발전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예를 들면 향악정재인 학무에 편성된 곡들로 정과정, 북전 등이 있다 하였는데 정과정과 북전은 분명 서로 다른 곡이다. 그러나 북전이라는 곡명은 김천택의 청구영언(1724)에 보이며 해동가요(1763)에도 초북전初北殿과 이북전二北殿이라는 곡명이 나타난다. 북전은 일명 후정화後庭花라는 별명도 있는데 가곡원류(1876)에 보인다. 또한 조선 후기에 이르러 새로운 곡들 즉 소용이나 언, 롱, 락이 만들어져 가곡에 추가로 얹혀진다. 이로 보면 조선가곡은 일종의 조곡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중국가곡의 영향을 들 수 있다. 바로 원나라 때 고도로 발달된 산곡散曲이다. 하나의 산곡은 여러 개의 투곡套曲으로 이루어지는데 투곡은 반드시 두 개 이상의 궁조宮調가 같은 곡을 연결하여야 한다. 우리의 가곡이 우조와 계면조를 바탕으로 여러 개의 곡으로 편성된 것과 비슷하다.
넷째 원의 산곡 중에 소령小令이 있는데 소령은 독립된 하나의 곡을 가리킨다. 송대의 사곡詞曲이라 할까. 그리고 하나의 곡 소령에 여러 개의 가사를 붙이는데 이를 중두重頭라 한다. 중두는 하나의 곡을 놓고 무수한 사람들이 가사만 바꾸어 노래를 되풀이하는 경우를 말한다. 즉 곡조를 중복하여 전사塡詞(塡寫)한다고 한다. 어떤 노래의 경우는 서로 다른 가사가 백수가 넘는다고 한다. 송나라 곡패曲牌에서 비롯된 이러한 전통이 조선가곡의 형식에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된다.
다섯째 앞의 네 번째 사항은 매우 중요한 점을 일깨워준다. 현재 하규일이 전승한 조선가곡은 남창 85곡과 여창 71곡 모두 156곡에 불과하다. 156곡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156바탕이라고 해야 정확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가곡은 156개의 서로 다른 곡조의 곡이 내려오고 있는 것일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가곡의 편제와 그 노래하는 방식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하는 가요개념과 다르다. 즉 편락이라는 곡이 하나 있으면 곡은 같은데 가사만 바꾸어 부른 여러 개의 가사가 있고 바로 그 가사 하나가 한 바탕을 이루고 있다.
18세기 김천택이 편찬한 청구영언, 김수장의 해동가요 그리고 조선말 19세기 박효관과 안민영이 편찬한 가곡원류에 나오는 무수한 시조들은 바로 각기 하나의 바탕이며 가객들이나 시인풍류객들은 흥이 도도해지면 기존의 가사로 노래를 부르거나 아니면 흘러나오는 특정한 곡에 자기 나름대로 멋을 부려 새로운 시를 붙여 노래를 부른 것이다.
우리는 조선가곡에 대해 또 다른 심각한 의문을 지니게 된다. 남창가곡 24편, 여창가곡 15편, 남녀창 27편 그것도 대부분 중복되어 누가 부르냐에 따라 구분될 뿐이라면 과연 우리가 이야기하는 조선가곡의 총체적인 숫자는 불과 몇 편 되지 않는 보 잘 것이 없는 곡이지 않는가. 우리는 여기서 조심스럽게 역사를 읽는다. 고려시대에는 풍속이 자유로웠다고 여겨지는데 이는 지금 내려오는 고려가요의 가사를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고도로 발달된 고려 민악民樂은 고려 중기를 넘어서며 중국의 음악을 새롭게 도입하는 과정에서 한차례 해체와 혼란을 겪는다. 그러다가 유교가 도입되고 새로운 왕조가 설립되며 고려가요는 선택과 집중이라는 과정을 지나게 된다. 여기서 선택되어 남은 곡들은 새롭게 변형되어 조선왕실의 정악으로 자리를 옮기며 다른 모습으로 발전된다. 수제천에서 보듯이 정읍사는 가사를 버리고 기악만 남게 되며 다른 일부는 명맥을 유지하다 결국은 소멸되었거나 아니면 조선가곡에 흡수되었을 것이다.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를 보면 조선 전기에도 많은 노래가 불려졌다. 특히 기생들은 가무에 능해 여러 곡을 불렀거나 새로이 만들었을 것이고 황진이같은 명기가 좋은 본보기 일 것이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를 보아도 진작眞勺(정과정), 만기慢機, 자하동紫霞洞, 횡살문橫殺門 등이 불려졌다는 기록이 있고 풍입송風入松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재미있는 일화를 통해 소개하고 있다. 조선 전기에 출판된 시용향악보에도 26개의 곡이 전해지는데 이 중에는 고려속악인 서경별곡이나 가시리 등이 포함되어 또한 여러 곡의 무악巫樂 등이 보인다. 가시리는 그 가사만 보더라도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 곡이 지금까지 남아 우리가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조선초기에 국학으로 도입한 성리학이 최고도로 발전되어 자리잡는 조선 중기 즉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전통적으로 명맥을 유지하였던 많은 곡들이 불행하게도 해체의 과정을 겪으며 멸실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미 세종실록에 고려 충렬왕 때 부르던 후전진작後殿眞勺이 음란 퇴폐적이라고 왕이 부르지 못하게 명하였고, 16세기 퇴계 이황 선생도 후정화後庭花는 음란한 곡이라고 비난하지 않았던가.
조선시대 18세기는 우리의 예술문화가 다시 꽃을 피우는 시기이다. 실학사상이 기초로 다져지고 진경산수가 열렸으며 조선백자가 분청사기시대를 거쳐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음악이라고 예외일까. 판소리와 산조가락이 이미 이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고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가곡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이때는 그 모습이 많이 달라져 이익李瀷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우리나라 가사에는 대엽조大葉調가 있다. 그러나 대개 장단의 구분이 없다. 그 가운데에도 또 慢, 中, 數의 세 가지 조가 있는데 이것은 본래 심방곡心方曲이라 한다. 만은 극히 느려서 사람들이 싫어하여 없어진지 오래고 중은 조금 빠르나 역시 좋아하는 이가 적고 지금 통용되고 있는 것은 삭대엽이다"라 하였다. 삭대엽을 순 우리말로 풀면 바로 '잦은한잎'으로, 빠르게 부르는 기다란 노래 한 편이라는 뜻이다. 김천택이나 김수장의 가곡집에는 중대엽이 보이나 19세기 가곡원류에 이르면 오직 삭대엽만 남는다. 곡이 점차 빠르게 진행된 것이다.
또한 곡의 편성에서도 18세기에 농, 낙, 편이 새로 등장하고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중거, 평거, 두거 그리고 언롱과 언편 등의 새로운 곡이 나타나 현재 우리가 보고 듣고 있는 가곡 한마당을 이루게 된다. 이를 보면 조선 후기에 이르러 우리의 가곡은 고도로 발전되고 있었으며 조선 중기에 이룩한 예술적 품격에 조선 후기의 다양성까지 갖추며 나래를 펴기 시작하였음이 틀림없다. 중요한 것은 조선가곡이 이 때 최고봉의 경지에는 도달하지 않은 상태라는 점이다. 꽃을 피우고 있었지만 만개가 아니었던 것이다. 조선가곡은 형식이나 내용 등 그 예술적 완성도에 있어 아직 미완성이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도 우리 전통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찾고자 한다면 필히 거론하여야 하는 것이 조선가곡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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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번역
기유일기 1789년(정조13) 3월 12일(기사) 볕이 나고 바람이 붊. 행영 비장行營裨將 이상정李尙鼎이 편지를 보내 말먹이 풀을 청하면서, 병으로 드러누워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저녁 무렵에 부府에 가서 이李 비장을 만나 문병하고 머물러 묵었다. 거문고 타는 손님 이춘화李春和가 남쪽에서 들어왔는데, 거문고를 잘 타는 사람이었다. 밤을 지내면서 이李 비장과 함께 거문고 연주를 들었다. 동인보 권관인 친구 윤홍심尹弘心도 와서 모여 함께 즐겼다. 이상은 어제의 일이다. 이날도 계속해서 머물렀다. 3월 13일(경오) 볕이 남. 부府에 머물렀다. 부의 관아에 있던 친구 황윤언黃潤彦과 동인보 권관인 친구 윤홍심尹弘心이 함께 행영에 모여 거문고 소리를 듣고, 소고기와 술을 준비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3월 14일(신미) 볕이 남. 이날부터 큰 눈이 거의 녹아서 밭가는 사람들이 들로 나갔다. 이상정李尙鼎 행영 비장, 친구 윤홍심尹弘心이 함께 북승루北勝樓에 올라 거문고를 들었다. 모두 취하자 누樓에서 내려와 마쳤다. 3월 17일(갑술) 볕이 나서 봄의 따뜻함을 기대할 수 있음. 삼수三水 부사 영공이 과연 찾아왔다가 오후에 동인보同仁堡로 향하였다. 나도 갑산부甲山府에 가서 갑산 부사께 문후를 여쭙고, 이상정李尙鼎 행영 비장을 보았다. 어면魚面 만호 조윤언曺允彦이 어제 부府에 도착해 있기에 밤에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갑산 부사의 처소에서 거문고 소리를 들었다. 3월 19일(병자) 볕이 나고 오후에 바람이 어지러움. 행영 비장 이상정李尙鼎이 거문고 타는 이와 노래하는 이 두 사람과 2명의 기생, 2명의 어린 기생을 데리고 와서는, 종일 이야기하다가 저녁 무렵에 행영으로 돌아갔다. 한 기생은 함흥咸興 기생인데 이름이 설월雪月이다. 나이가 50여세가 넘었으며 갑산부甲山府에 와서 살면서 동기童妓에게 노래를 가르치는 사람인데, 창唱 등에 능하다. 한 사람은 행영 비장에게 수청을 드는 도화선桃花仙이라는 사람인데, 본래 북청北靑의 기생이다. 두 동기는 치업致業과 동명월東明月인데, 설월로부터 노래를 배우는 사람이다. 기생 치업은 나이가 겨우 열두 살이고 기생 동명월은 나이가 이미 열네 살인데 또한 창唱을 잘하고 춤을 잘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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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을 연주하는 기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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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빙판을 지나 한겨울 삼수(三水)를 구경하다
1788-01-08
양강도 갑산군
2
짧은 봄철 갑산에서의 유흥
1788-04-23
양강도 갑산군
3
무관들끼리 모여 활쏘기 내기를 하다
1788-06-13
양강도 갑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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