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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명령으로 영남 문인의 문집을 만들다
무슨 바람인지 왕이 영남의 뛰어난 석학 중 가장 걸출한 인물의 옛 자취를 보고 싶으니 문적을 거두어 올리라는 명을 내렸다. 전갈을 받은 영남의 네 도호부와, 자신의 선조가 걸출한 석학이라 여기는 뜨르르한 집안들은 바빠졌다. 가장 일처리가 빠른 것은 안동도호부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상추의 고향인 선산에서도 온갖 문적을 모두 모아서 도성으로 실어 왔다. 각 집에서 짧은 시간 내에 수정한 문서들이었기에 책자 꼴을 채 갖추지도 못했다. 그 허접한 모습에 노상추는 한탄하였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노상추의 집안 문적은 노상추가 몇 년 전 임금의 명에 따라 제출하기 위해 도성에 올려서 이미 수정해 놓았었다. 노상추는 남들이 필사적으로 문적을 교정보는 모습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보았다. 노상추는 고향에서 올라온 집안 문적을 모두 다시 내려보내고는 이미 수정해 놓은 문적을 합하여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그 책에는 송암공(松菴公)·역정공(櫟亭公)·학관공(鶴關公)·경암공(敬庵公)·죽월공(竹月公)의 문적이 모두 실려 있었다.
노상추는 책을 보기 좋도록 장황하기 위해 반계(泮界)에 있는 이원연(李元延)의 여관으로 들여보냈다. 이원연이 선산의 문적을 수합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상추의 인척 집안들에서도 각기 자신의 5대조 이상 문적을 긁어모아 수정하고 있었다. 왕이 이미 알려진 명현 외에도 공훈이 있는 큰 인물과 탁월한 행실이 있는 선비도 동시에 조사하여 찾아내도록 했는데, 어쩌면 이번에 자신의 선조가 왕의 눈에 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니 다들 혈안이 되어 집안 문적을 긁어모아 올 수밖에. 노상추가 보기에 구차한 문적도 많았다. 또 소문을 듣고 올라온 시골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렇게 모인 영남의 문적은 모두 49권이었다. 이 문적을 모두 수합한 것은 채제공이었다. 채제공이 왕에게 영남 문적을 올리니 왕은 다시 편차를 수정하라고 하교를 내리면서 제목도 함께 내려 주었다. 그 제목은 ‘영남인물고’였다. 전해 듣자니 왕의 하교에 따라 남인 재상들이 모두 군기시에 모여 오류를 바로잡고 글을 다듬어 수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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