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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내리던 초여름의 새벽, 백성들의 곡소리를 뒤로 한채 왕이 초라한 피난길에 오르다
1592년 음력 4월 30일, 양력 6월 9일이다. 이 해 조선에는 유난히도 먹구름이 짙게 낀 장마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사람들의 마음에는 전운의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이날 비는 전날부터 추적추적 내리더니 하루 종일 내렸다.
새벽이라고는 너무나 이른 축시(丑時, 새벽 1~3시), 선조는 융복(戎服)을 입고 창덕궁(昌德宮) 인정전(仁政殿)에 나섰다. 이렇게 이른 시간 선조가 융복까지 입고 나선 것은 왜적이 도성 근처까지 도달하여 한양이 곧 함락되리라는 것 때문이었다. 그것은 왕의 피란이었다.
바로 어제(4월 29일) 왕세자로 지목된 광해 이혼(李琿)은 왕인 아버지보다 먼저 나와 인정전의 뜰에서 기다려 맞이하고 있었다. 광해에게는 세자로 지목된 기쁨이나 영예보다는 전란이라는 짐이 그 어느 누구보다 갑작스레 크게 지워진 것이다. 더욱이 다급한 상황이라 광해는 왕으로부터의 정식 책봉 교서도 받지 못하였고, 그냥 지목된 상태라 이래저래 짐이 더욱 무거웠다.
광해가 인정전 주위를 둘러보니 이미 종친을 비롯한 신료 및 비빈 등 궁인, 호위관들이 대기하고 있었지만, 난리가 났다는 소식을 들은 일부 관료와 군졸들은 이미 흩어진 뒤라 그 수는 100명이 채 되지 않았다. 광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임금의 행차치고는 초라하였고, 깊은 시름에 잠긴 아버지 선조를 보니 아버지로서 왕으로서 불쌍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선조는 곧 왜적들이 한양으로 닥친다는 소식에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피란을 하겠다고 하였다. 아버지 선조는 어쨌든지 최악의 상황을 피하고 싶어 한 것이었다.
광해는 피란하는 선조를 모셨다. 함께 말을 타고 뒤따르며 신료와 궁인들을 이끌고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을 나섰다. 신료들과 궁인들 가운데는 소리 없이 우는 이들이 많았다. 더욱이 창덕궁을 나서면서 서대문인 돈의문(敦義門)에 이르는 사이 동네마다 백성들의 곡소리가 들려 광해의 마음을 더욱 슬프게 하였다. 아직 백성들은 한양에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였다. 선조는 비록 한 나라의 임금이었지만 백성들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안위가 더욱 걱정이었다. 광해 역시 세자였지만, 백성들을 측은히 바라보며 슬픔 눈물을 삼기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단지 광해로서는 아버지의 피란길을 오히려 자신이 죄인인양 따르는 것일 뿐이었다.
새벽부터 내리던 비는 행차가 홍제동[洪濟院, 홍제동에 있는 관아]에 이르자 더욱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거뭇하던 하늘 구름 위로 해가 떠 오른 탓인지 주위를 분간할 수 있는 아침이 되었다. 이제 오르막인 모래재를 넘어야 하는데, 세차게 내리는 비와 미끄러운 길 때문에 비빈(妃嬪)이 타던 교자는 행차의 속도를 더욱 더디게 하고 있었다. 이에 숙의(淑儀) 이하의 모든 빈들은 교자에서 내려 말을 타야 했다. 그러나 비 내리고 미끄러운 길에서는 말도 미끄러지거나 넘어졌다. 게다가 말을 타지 못하는 궁녀들이나 아예 말도 없는 궁녀들도 있었는데, 그녀들은 할 수 없이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그 가운데 어떤 이는 흰 홑옷을 꺼내 머리에 쓰고 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는 사이 낙오하는 궁녀들도 많았고, 관원들 가운데서도 임금은 모시지 않고 이탈하는 자도 속출하였다.
임금의 행차는 점심나절 겨우 벽제관(碧蹄館: 경기 고양 벽제)에 도착하였다. 왕과 왕비에게 올릴 밥과 반찬은 그래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광해와 세자빈은 반찬도 없이 밥만 먹어야 했다. 세자까지 이럴 정도니 정승 판서뿐 아니라 다른 관속들은 그냥 굶어야 했다. 이때 병조판서 김응남(金應南)이 어지러운 상황을 수습해 볼 것이라고 비 내리는 진흙탕 속을 분주히 뛰어다녔다. 그러나 그 역시 이 상황을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또한 뒤 따라온 경기관찰사 권징(權徵)은 임금께 자신이 입고 있던 우의를 받쳤지만 이 상황을 보고서는 털썩 주저앉은 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았다.
선조는 윤두수(尹斗壽)를 불러 차고 있던 칼을 풀어내어 주며 “경의 형제들은 나를 떠나지 마오”라고 말하였다. 선조는 바로 이탈하는 관속들을 염려한 것이다. 하지만 왕이 북쪽으로 행차한다는 소식을 들은 일부 관료들은 임금을 모시기 위한 대의를 위해 행차를 따라 잡으려 뒤따라 나서는 이도 있다. 물론 그러던 와중에 한편으로 임금의 행차에 있으면서도 낙오된 사람들 또한 많았다.
왕의 행차는 벽제관에서 점심을 들고 잠시 쉰 뒤 임진나루로 출발하였다. 파주 평야에 들어선 행차는 속도를 내어 마침내 장단군(長湍郡)과 마주하는 임진강 남쪽 나루에 저녁 무렵 도착하게 되었다. 아직 해가 조금 남았을 때 선조가 먼저 이산해(李山海), 이항복(李恒福)만을 대동한 채 홀로 배에 올라 임진강을 건넜다. 임금이 임진강을 건너니 날이 곧 저물고 비바람이 더욱 거세어져 물결이 세차게 일자 더 이상 뒤에 있는 사람들은 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광해는 왕후와 세자빈을 보호해야 했다. 모든 신료들의 관심은 강을 건넌 선조에게 있었다.
강을 건넌 임금과 신료 일행은 날이 저물고 비가 오자 길을 찾지 못하였다. 이에 임진강 남쪽 언덕의 승정(丞亭)에 재목(材木)을 쌓아 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을 태웠다. 이 불빛이 강 건너까지 비추게 되자 임금의 일행은 길을 찾을 수 있게 되었고, 밤이 늦어서야 동파역(東坡驛)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광해의 일행은 이날 남아 있어야 했다. 다른 신료들이야 임진 나루 남쪽의 여각이나 주막, 혹은 민가에 묵으면 되었지만, 광해의 일행은 그럴 수가 없었다. 이에 광해는 다시 가까운 관아로 향할 수밖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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