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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뜻을 따를 수 없어 황공하나이다 - 왕과 왕세자의 엇갈린 인사 발령
1592년 8월 1일 왕세자(광해군) 일행은 성천(成川)으로 가는 도중 곡산(谷山)에 잠시 머물렀다. 일행이 곡산에 머무는 도중 의주에 있는 행재소에서 인사를 발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행재소에서 인사 발령을 한 사람은 바로 왕세자를 호위하는 장수인 김우고(金友皐)였다. 김우고 이외에도 왕세자를 호위하는 장수들은 이시언(李時言), 이일(李鎰), 정희현(鄭希賢) 등이 있었다. 하지만 전시(戰時)의 다급함과 백성들을 호응에 보답하기 위해 왕세자는 자신의 호위 장수들을 대부분을 다른 직책 또는 전투에 임하게 하였다. 7월에는 이시언을 황해도방어사(黃海道防禦使)에 임명하였다. 또한 이일은 평양을 들도 재탈환하기 위해 그를 따르는 많은 부하 장수들과 함께 7월 4일 평양 인근으로 파견하였다. 그리고 정희현은 근자에 강동(江東)의 여울물이 점차 얕아 져 왜적이 그 쪽으로 침입할까 염려스러워 군사들을 이끌고 가 강동을 방어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이때는 왕세자 그 자신도 선조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조정(朝廷)이었다. 더욱이 왜적들에게 둘러싸인 왕세자의 호위는 매우 중요하였다. 왕세자는 김우고를 제외하고 자신을 호위하고 있는 장수 대부분을 왜적에 대한 방어와 공격에 투입하였다. 그런데 행재소의 명령대로 김우고를 함경방어사(咸鏡防禦使)에 임명을 하면 왕세자의 행차를 호위할 장수가 한 사람도 없게 되는 것이다. 신료들은 바로 이 점이 걱정되었다. 또한 이전에 행재소에서는 이천(李薦)을 황해방어사로 임명한다고 하였고, 그 교지(敎旨)도 내려왔다. 행재소의 명령을 따르자면 황해도방어사로 왕세자가 파견한 이시언과 이천을 임무 교대시키면 되는 일이기도 하지만, 이천 역시 왜적을 방어하러 갔다가 아직 돌아오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행재소에서 시행한 인사를 분조에서 그대로 시행하기란 어려웠다.
신료들은 할 수 없이 선조에게 “위급할 때마다 조처하는 일에 대해 하나하나 아뢰지 못하고, 이와 같이 일이 서로 어긋난 경우에 이르렀으니 지극히 황공하나이다”라고 장계를 올렸다. 그럼에도 왕세자가 시행한 인사 정책을 그대로 추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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