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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평양 백성들, 목숨걸고 왕의 피난길을 막아서다
1592년 5월 7일, 선조는 왜적들의 난을 피해 평양에 도착하였다. 그 후 선조는 정치적으로 여러 인사를 단행하였다. 비록 여러 가지로 정세는 어수선했지만 선조는 평양에 머물며 백성들을 위로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과거를 실시하여 군사들을 충원하려 하였다.
그런데 6월 1일 임진강 방어에 실패했다는 도순찰사(都巡察使) 김명원(金命元)의 장계가 이르렀다. 행재소의 경계는 삼엄해지고 급한 마음에 선조는 파직했던 유성룡(柳成龍)을 다시 불러들이기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아직 여유로운 수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대동강이 적을 막아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선조는 마음을 놓을 수만은 없었다.
이에 6월 6일 내전(內殿)세자빈을 보다 안전한 함흥부(咸興府)로 곡절 끝에 보냈다. 또한 명나라에서 온 관료들을 맞이하여 조선의 상황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6월 8일 왜적들이 대동강에 나타나자 선조는 덜컥 겁을 먹었다. 선조는 곧장 파천하려 하였다.
다음 날인 6월 9일 대가(大駕, 왕의 행차)가 영변으로 출발하려 하였다. 그러자 평양의 백성들이 왕의 행차를 막아섰다. 비록 왕을 호위하는 무사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평양 백성들의 민심 역시 흉흉하고도 사나워 함부로 진압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고, 선조도 그러했다.
6월 6일 내전이 함흥으로 갈 때도 백성들은 내전을 시종하기 위해 먼저 나아가는 하인들을 겁박하고, 호조판서 홍여순(洪汝淳)은 성난 백성들에게 두들겨 맞아 부축을 받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백성들이 왕의 행차가 떠날까 염려하여 먼저 막은 것이다. 왕의 행차가 평양을 떠나면 평양은 반드시 적들에게 함락될 것이란 것을 백성들은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극렬하고도 난폭하게 왕의 행차를 막아선 것이다.
6월 9일 결국 왕의 행차는 평양을 떠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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