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
  • 검색

상세검색

디렉토리검색
검색어
시기
-
백성들의 믿음을 잃지 마소서! - 민심이 왕세자를 남쪽으로 이끌다
1592년 11월 2일, 왜적의 핍박으로 평안남도 성천(成川)을 떠난 왕세자와 분조(分朝)의 신료 일행들은 평안남도 숙천(肅川)에 도착하였다. 숙천으로 오는 길 위에서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과 평안감사 이원익(李元翼)이 왕세자를 배알하고 인사드렸다.
다음 날인 11월 3일은 숙천에 머문 왕세자에게 유성룡(柳成龍)이 찾아와 배알하고 안부를 여쭈었다. 왕세자는 숙천에 오기까지 여러 고을을 다니면서 백성들을 격려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분조가 있어야 할 곳을 찾았다. 지금 머무르고 있는 숙천이나 안주(安州)·정주(定州)는 모두 명나라 군대가 주둔하거나 지나간 곳이다. 이곳에 분조가 있으면 명나라 장수들은 분명 왕세자에게 군수품을 요구하거나 자신들의 편의를 봐달라고 요구할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왕세자 광해군은 아직 명으로부터 왕세자로서의 봉작(封爵)도 받지 못한 상태여서 명나라 장수들이 광해군을 왕세자로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에 분조의 신료들은 분조가 평안북도 영변(寧邊)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왕세자는 후방에 있기 보다는 적과 마딱드리고 있는 평안남도 용강(龍岡)으로 나아가고자 하였다. 세자는 이미 심충겸(沈忠謙)을 용강에 파견하여 사정을 정탐하도록 하였다. 그러면서 시간은 며칠이 흘렀다.
11월 7일 세자는 안주로 갔다. 또 다시 며칠이 흐른 11월 11일 안주에서 영변으로 가려고 하였다. 그러자 세자를 모시던 관료와 호위를 맡은 장졸들이 뜰 앞에 모여 물러나지 말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자 세자는 “줄곧 물러나기만 하여 백성들의 믿음을 잃는구나”라고 탄식하였고, 이에 세자를 모신 분조의 신료들조차 의견이 나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되자 대세는 세자 일행이 영변으로 가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에 분조의 모든 인원은 다시 숙천으로 돌아왔다.
11월 12일 세자 일행이 영유(永柔 평안남도, 오늘날의 평원)로 들어갔는데, 마침 정탐을 보냈던 심충겸을 노상에서 만나게 되었고, 심충겸은 그 길로 다시 왕세자를 모시게 되었다.
11월 13일 증산(甑山 평안남도)에 도착하였는데, 날씨가 추워 일행들이 모두 고생을 하였다. 하지만 민심은 세자 일행을 남쪽으로 이끌었고, 11월 15일 함종(咸從 평안남도)에 도착하였으며, 11월 16일 마침내 용강에 도착하였다. 세자는 도착하자마자 용강산성에서 지냈다.

닫기
닫기
관련목록
시기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장소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