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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남은 명나라 장수 척금, 사리를 위해 불합리한 강화를 맺은 다른 장수들을 비판하다
1593년 9월 초, 명나라와 왜적의 강화로 전쟁은 교착 상태였다. 이때 많은 명나라 장수들이 명나라로 돌아가기 위해 의주에 모였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명나라로 철군하지 않는 장수도 함께 있었다. 그는 비록 명나라 장수 가운데 지위가 낮은
유격(遊擊)
장수였으나, 조선의 관리들은 그를 옛 장수의 풍모를 지니고 있다고들 말하였다. 그의 이름은
척금(戚金)
이었다. 그는 접반사(接伴使)
이덕형(李德馨)
과 의주에서 이 전쟁에 대해 논의를 하고 있었다. 이덕형과 이야기를 하던 명나라 장수 척금은 갑자기 명나라와 왜의 강화(講和)에 여러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면서 조금 흥분한 채 이덕형에게 말을 하였다.
“명나라 측 요구를 마련하여 강화를 허락할지의 일을 논한 사람은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
과 이 일에 실무를 본 사람은
심유경(沈唯敬)
·사용재(謝用梓)·서일관(徐一貫)이오. 그런데 심유경을 포함한 세 사람은 왜에게서 뇌물을 받아먹고 강화를 허락하였으니, 나는 이를 법에 따라 조처하기를 청하였소. 우리 명나라 황제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는 못하나 귀국(貴國)의 사정이 매우 급하니, 전쟁이 멈추는 기간 동안 오직 속히 조선땅을 정비하여 민생의 고통을 풀어주길 바라오. 지금 논의는 분분하지만 왜에게 ‘왕’이라고 봉작을 주는 일은 이미 정해져 있소. 나는 지금 평양의 연회에서 왜장(倭將)에게 상을 주는 데 가면서 왜노(倭奴) 한 사람을 행장(行長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모두가 대마도(對馬島)로 철군을 하고
관백
(關白 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조공을 바치겠다는
표문(表文)
을 청하여 보내와서 내가 곧 북경으로 가면 조정에서는 비로소 문신(文臣)이나 무신(武臣) 가운데 한 사람을 절강성(浙江省) 영파(寧波)의 옛 길을 통해 보내 관백을 왜왕(倭王)으로 책봉할 것이오. 왜가 조공을 하면 10년을 기다려 보고 조선을 침공하지 않고 중국을 배반하지 않은 후에야 비준을 허락할 것이오. 그런 즉 전날 우리 병부상서(兵部尙書)가 와서 조정의 의론이 이러하다는 것을 알려주어 내년 봄까지 계획을 하고 있으니 비로소 큰 일이 끝날 것이오. 왜노(倭奴)가 만약 겉으로는 항복을 구하고도 속으로는 엉큼한 마음을 품고 있다면 표문(表文)은 역시 황제에게 올릴 수 없으니, 이미 남병(南兵) 수 만명을 조련하여 왜적들을 모두 없앨 것을 의심하지 마오.”
이 이야기를 마친 후 이덕형과 척금은 왜적의 병사 숫자를 논하기 시작하였다. 이덕형이 왜적의 수에 의심이 있다고 하자 척금은 다시 분에 받쳐 말을 하였다.
“평양을 공격할 때 나는 소서문(小西門)을 따라 먼저 올라 성 안의 적수가 얼마인지 살펴보니 4천명을 넘지 않았소. 황해도 각 처 적의 소굴을 내가 일일이 높은 곳에 올라 살펴보았는데 왜적의 방어 시설 내에 쌓아 놓은 부뚜막을 계산해 보니 적은 것은 1백이 넘지 않고 많은 것도 2〜3백을 넘지 않았소. 이를 다 합해도 왜적의 수를 대강 알 수 있소. 그런데도 심유경(沈唯敬)은 ‘평양의 적은 6만이 넘고 각처의 왜적이 매우 많아 대적하기 힘들다’고 말하였소. 이것은 강화를 주장하여 공이나 탐내는 것이오. 연이은 보고에서 ‘부산의 적이 거의 60만에 이를 정도로 많다’고 하였소. 우리 명나라 조정에서 그 말을 믿고 출병하여 격파하려 하였지만, 사실 적은 병력으로 많은 병력을 대적하지 못할까 염려하고 있었으니 진실로 탄식할 만하오.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일의 형편을 자세히 감찰하려 하였으나, 귀국도 분명하게 글로 써서 아뢰지 않아 문제가 있었소. 중요한 일이 있으면 지금 남쪽에 주둔한 부장(副將)
유정(劉綎)
의 군영에
자문(咨文)
을 보내시오. 나 역시 머지않아 남쪽으로 내려 갈 것이니 부장 유정과 협력하여 상황에 따라 잘 처리할 것이오. 지금 경략과 제독이 이미 돌아갔으니 권한은 부장 유정의 수중에 있소. 다른 명나라 고위 장수들이 참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오.”
척금은 명나라로 돌아가는 장수는 아니라 여전히 조선에 머무는 장수였다. 그러므로 그를 전별할 수도 없었고, 조선의 관료들도 그를 위해 특별한 연회를 베풀지는 않았다. 그는 의주에 머문 지 오래지 않아 곧장 조선의 남쪽으로 내려가 왜적과 대치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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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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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용만문견록(龍灣聞見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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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정탁(鄭琢)
주제 : 분쟁과 조정, 외교 갈등
시기 : ( 미상 )
장소 : 평안북도 의주군
일기분류 : 전쟁일기
인물 : 이덕형, 척금
참고자료링크 : (참고자료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 예절을 잘 지킨 명나라 장수
조선에 남아 여전히 주둔을 해야 했던 유격장 척금이 의주까지 온 이유는 왜의 명나라 사절단을 대동했기 때문이다. 당시 명나라도 심유경(沈唯敬)·사용재(謝用梓)·서일관(徐一貫)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 세 사람은 사실 명나라 조정의 사신이 아닌 송응창의 사신으로 일본에 파견되어 풍신수길(豊臣秀吉)로부터 성대한 대접을 받고 또 거기에다 금은보화까지 받았다. 뇌물을 받았다는 것은 이 뜻이다. 그런데 풍신수길은 이들이 명 조정의 사신으로 알고 있었지만 후에 속았다고 생각하였으며, 이러한 명·일간 강화협상은 결국 명 조정이 중심이 된 강화협상이 아님을 알고서는 파국으로 치달아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한다.
척금은 명나라 장수로서 평양 탈환 전투 등에 참여하고 또 왜의 사신단을 호송함으로써 여러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명나라에서 파견된 장수로서는 가장 낮은 ‘유격장’이었다. 따라서 그는 공식적인 조치만을 취할 수 있었을 따름이지 조선에서 직접적인 전투 이외에 전략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에 이덕형과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솔직한 심정으로 상관들을 비판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조선에 대한 태도 역시 달랐다. 다른 명나라 장수들은 조선을 표현함에 ‘그대 나라’(爾國) 등으로 말하였다. 그러나 척금은 ‘귀국(貴國)’ 등으로 한 단계 더 존칭을 사용하였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통령 계부이영 거병유격 도지휘(統領薊府二營車兵游擊都指揮) 척금(戚金)은 사람됨이 절약하고 검소하며 타인을 사랑하고, 도의(道義)를 스스로 견지하였습니다.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왜적을 정벌하러 동쪽으로 올 때, 그 역시 병사를 거느리고 따라왔습니다. 그가 지닌 물건과 차림은 아주 수수하였으며 그가 지나간 곳은 조금도 다른 일을 범하지 않았고 병졸들에게 엄히 다스려 다니는 지방에 해를 입히지 않도록 하였으니, 깊이 옛 장수[古將]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계사년(1593) 초가을 동로(東路)에서 돌아와 용만(龍灣: 의주)에 머무르고 있었다. 일찍이 접반사(接伴使) 이덕형(李德馨)과 관(館)에서 면담을 할 때, 말이 시사(時事)에 이르면 스스로 말하기를,
“구본(具本)을 마련하여 강화(講和)를 허락할지의 일을 논한 사람은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과 심유경(沈唯敬)ㆍ사용재(謝用梓)ㆍ서일관(徐一貫)인데, 심유경을 포함한 세 사람[심유경ㆍ사용재ㆍ서일관]은 뇌물을 받아먹고 강화를 허락하였으나 이를 법에 따라 조처하기를 [명나라 조정에] 청하였소. 명나라 황상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는 못하나 귀국(貴國)의 일은 매우 긴급하여 전쟁이 멈추는 기간 동안 오직 속히 완비하는 데 달려 있으니 이것으로 민생이 날마다 거꾸로 매달려 있는 고통을 풀어낼 수 있을 따름이며, [강화의] 의론이 분분하지만 준봉(準封)은 이미 정해져 있소. 나는 지금 평양의 연회에서 왜장(倭將)에게 상을 주는 데 가면서 왜노(倭奴) 한 사람을 행장(行長: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모두가 대마도(對馬島)로 철군을 하고 관백(關白: 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조공을 바치겠다는 표문(表文)을 청하여 보내와서 내가 곧 북경으로 가면 조정에서는 비로소 문신(文臣)이나 무신(武臣) 가운데 한 사람을 절강성(浙江省) 영파(寧波)의 옛 길을 통해 보내 관백을 왜왕(倭王)으로 책봉할 것이오. [일본이] 조공을 하면 10년을 기다려 보고 조선을 침공하지 않고 중국을 배반하지 않은 연후에야 비준을 허락할 것이오. 그런 즉 전날 우리 병부상서(兵部尙書)가 와서 조정의 의론이 이러하다는 것을 알려주어 내년 봄까지 계획을 하고 있으니 비로소 큰 일이 끝날 것이오. 왜노(倭奴)가 만약 겉으로는 항복을 구하고도 속으로는 엉큼한 마음을 품고 있다면 표문(表文)은 역시 황제에게 올릴 수 없으니, 이미 남병(南兵) 수 만명을 조련하여 이 적들을 모두 없앨 것을 의심하지 마오.”
이어 적의 숫자가 얼마인지에 대해 말이 이르면 유격(游擊) 척금(戚金)은 분에 북받쳐 말하였습니다. “평양을 공격할 때 나는 소서문(小西門)을 따라 먼저 올라 상 안의 적수가 얼마인지 살펴보니 4천명을 넘지 않았소. 황해도 각 처 적의 소굴을 내가 일일이 높은 곳에 올라 살펴보았는데 [적이] 방어 시설 내에 부뚜막 쌓은 형세를 계산해 보니 적은 것은 1백이 넘지 않고 많은 것도 2~3백을 넘지 않았으니 이를 합해 말하여도 대강은 알 수 있소. 그런데도 심유경(沈唯敬)은 ‘평양의 적은 6만이 넘고 각처의 적이 매우 많아 대적하기 힘들다’고 말하였소. 이것은 대개 강화를 주장하여 공이나 탐내는 것이오. 제독이 진술한 보고를 이어서 말하기를 ‘부산의 적이 많아 거의 60만에 이른다’고 하니 우리 조정에서 그 말을 믿고 출병하여 격파하려 하였으나 오로지 적은 병력으로 많은 병력을 대적하지 못할까 염려하고 있으니 진실로 탄식할 만하오.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일의 형편을 자못 자세히 감찰하려 하였으나, 귀국이 분명하게 글로 써서 아뢰지 않아 매우 흠이 있는 일이 되었소. 배신 윤근수(尹根壽)는 부장(副將) 유정(劉綎)의 병사 1500명으로 하여금 경주를 지켜내려 하였으나,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께서 품첩(稟帖)을 보시고는 마땅히 여기지 않으시고 ‘이것은 일의 요체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부장(副將) 유정(劉綎)이 알아 처리하도록 맡겨 두라’고 말씀하셨소. 이 일이 만약 긴급한 것 같으면 속히 국왕에게 아뢰어 부장(副將) 유정(劉綎)의 군영에 자문(咨文)을 보내시오. 나 역시 머지않아 남쪽으로 내려 갈 것이니 부장 유정과 협력하여 상황에 따라 잘 처리할 것이오. 그런데 지금 경략과 제독이 이미 돌아갔으니, 권한은 부장 유정의 수중에 있고 할 만한 일을 한다면 반드시 견제될 염려가 없습니다.”
또 말하였습니다. “제가 경성(京城)에 있을 때, 경성의 백성들이 나날이 죽어 흩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국왕께서는 어떻게 [백성들을] 구하시고 살리려는지요? 백성들이 죽으면 몇 년 동안이라도 어떻게 해 볼 수도 없이 나라의 근본은 허물어집니다. 백성을 구휼하시고 병사들을 훈련하시며 화기(火器) 등을 많이 제조하는 일들이 귀국께서 가장 먼저 급하게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 알지는 못하겠으나, 귀국의 임금과 신하가 어떻게 뒷마무리를 잘 하시겠습니까?” 말이 매우 간곡하고 줄곧 반복되니 척금(戚金)의 사람됨이 큰다는 것을 여기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본군의 남쪽에 주둔한 장수에게는 전송(餞送)을 하는 의례가 없었으므로, 신은 전별연에 오라고 청하지 않았습니다. 척금은 용만에 머문 지 오래지 않아 동로(東路)로 돌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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