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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신하 정탁, 명나라의 군사 호환 - 서로 만나 전쟁의 정세를 논하다
1593년 9월 말, 임진왜란 때문에 명나라에서 파견된 대군들이 9월 초·중순을 전후로 하여 모두 돌아갔다. 그러나 아직 왜적들은 남쪽 해안에 남아 있었고, 명나라는 총병(摠兵)
유정(劉綎)
의 일만 여 병사를 남겨 이를 막고 있었다. 이때 의주에는 유정의 군사(軍師 작전 참모)인
호환(胡煥)
이 병 때문에 경상도로 가지 못하고 머물러 치료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좌찬성(左贊成)
정탁(鄭琢)
은 자국으로 돌아가는 명나라 군사들을 전송하러 의주에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의주에서 서로 만나 한 눈에 서로의 사람됨을 알아보았다. 정탁은 조선의 신하로서, 호환은 유정의 군사(軍師)로서 전쟁의 정세를 논하였다.
정탁은 아직까지 왜적의 정세가 걱정스러웠다. 비록 왜적들이 남쪽 해안가로 밀려나 곤경에 빠진 채 머무르고 있지만, 이 전쟁은 왜적들을 완전히 소탕하지 못하면 끝이 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정탁은 마음이 급하였다. 왜적들을 계속 놔두면 다시 힘을 길러 침략을 할 것임 분명하였다. 이에 정탁은 호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약 왜적들이 군사들을 배로 늘이고 사기를 높여 기세가 대등한 위치에 오른다면 그들은 며칠이 되지 않아 반드시 다시 침입해 올 것입니다. 유정 대인께서 적들이 몹시 지쳐 고단하고 움츠려 물러나 있을 때를 틈타 명나라의 사천(四川)과 절강(浙江)의 병력을 증원하고서 또 우리나라 병력과 협력하여 적을 무찌른다면 진실로 최고의 계책입니다. 사천과 절강의 병력은 유정 대인의 힘이라면 충분히 지휘할 수 있습니다.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
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
은 이미 철수를 하였습니다. 지금의 긴요한 일들은 유정 대인만이 명나라 조정에 보고를 올리고 군사들을 지휘할 수 있습니다. 만약 병력을 증원하여 소탕하지 않으면 방어하고 지키는 일이 실로 쉽지 않을 것 입니다.”
정탁의 방안은 단 하나였다. 바로 병력의 증원이다. 병력을 증원하는 데 있어서도 명나라의 요동 쪽에 있는 병력들이 아니라 명나라 남쪽인 사천과 절강의 병력을 증원해 달라는 것이었다. 특히 절강성은 왜적으로부터 침입을 많이 받은 곳이라 그곳 출신의 병력들은 왜적과의 전투에 뛰어났다.
호환의 생각도 정탁과 마찬가지였다. 호환은 자국인 명나라가 경솔하게 강화(講和)만 믿고서는 철수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다만 유정의 1만 6천 병사들에게만 방어 책무를 맡기는 것은 잘못된 책략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 일은 유정이라고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호환도 1593년 겨울이나 1594년 1월에 왜적을 처단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먼저 정탁에게 하나를 충고를 하였다.
“무릇 외국으로부터의 모욕은 반드시 막아야 하고, 내치(內治) 마땅히 닦아야 합니다. 일전에 왜적들이 국경을 침입하였을 때 귀방(貴邦)의 백성들이 기꺼이 왜적의 신하가 되고 첩이 되었다고 들었는데, 이는 어찌된 까닭이겠습니까! 시름과 고통에 젖은 백성들이 난리 속에서 살아가려는 그 형세가 그러한 것이지 그들의 잘못이 아닙니다. 지금 귀방께서 해야 할 일은 귀방의 군왕과 재상들이 속히 와신상담(臥薪嘗膽)하여 옛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도모하며 인심(人心)의 수습을 급선무로 하고, 흩어진 백성들을 불러 모으며, 부상당한 이를 부축하고 죽은 이를 문상하며, 어려움에 처한 신하를 뒤받쳐 주고 전사(戰死)한 군졸들을 구휼하여 백성들의 여망을 거의 위로하고 사기(士氣)를 돋우고 함부로 세금을 걷는 것을 일체 엄히 금하는 데까지 이른다면 그 때서야 일을 다 한 것입니다.”
이 말은 사실 군왕부터 잘해야 한다는 말이다. 실로 정탁의 귀에는 거슬리는 말이지만 맞는 말이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호환은 정탁에게 약속을 한다.
“삼가 존옹(尊翁 정탁)이 가르친 것을 유정 장군과 명나라 조정에 전달할 것이니, 만약 확정된 의론이라면 하나하나 명시하시고 숨기거나 꺼리시지 않으신다면 거의 대사(大事)를 그릇되게 않을 것입니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멀티미디어
관련이야기
출전 :
용만문견록(龍灣聞見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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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정탁(鄭琢)
주제 : 전쟁과 피란, 전황과 작전
시기 : ( 미상 )
장소 : 평안북도 의주군
일기분류 : 전쟁일기
인물 : 정탁, 호환
참고자료링크 :
웹진 담談 43호
◆ 전쟁 중의 군사작전 협의
이때가 정확히 며칠인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다만 정탁이 의주로 간 것이 1593년 8월 말이고, 명나라 장수들을 접대하던 것이 9월이었다. 그리고 10월에 서울로 돌아가 이 문건인 『용만견문록』을 선조에게 진상하였으므로 1593년 9월 중순 이후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호환의 생애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찾을 수는 없지만 호환은 유정의 스승이자 동시에 군사(軍師 작전 참모)였다. 정탁은 이러한 호환과 주로 편지를 통해 이야기를 하였다. 이렇게 이야기를 한 것은 호환이 조선측의 사정을 직접 유정에게 알릴 수도 있었고, 또한 편지 그 자체를 유정이 볼 수도 있어 조선의 요구를 명나라 군대에게 간절히 전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요구는 직접 군사 작전에 반영될 수도 있었다. 정탁은 유정 장군이 어떻게 해달라고 하기 보다는 명나라 측 병력을 증원해달라고 하였다. 그것도 특히 왜적과 싸워 본 경험이 있는 절강성의 군대를 요구하였다. 이를 남병(南兵)이라 불렀다. 호환도 이를 충분히 이해했고 이를 전달하겠다고는 하였지만, 명나라는 왜적과의 강화협상으로 인해 이미 철군하는 중이었다. 정탁의 요구는 시행되지 못하고서 1597년 정유재란까지 왜적과의 대치 상태는 계속된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호상공(胡相公)의 이름은 환(煥)이며, 호는 승천(承川)이고, 남창(南昌) 사람입니다. 중국 조정에서는 유사(儒士)이면서 직급이 없는 사람을 상공(相公)이라 통칭합니다. 사람됨은 연배가 높은데다 학력(學力)이 있으며, 말을 하는 데 구애됨이 사람과 사물을 대하고 접하는 데는 예양(禮讓)이 있습니다. 말이 왜적을 정벌하는 일에 이르면 개탄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총병(摠兵) 유정(劉綎)이 일찍이 스승으로 섬겨 높이 받들어 매우 존경하였으며 [호환이] 말한 것을 반드시 따랐다고 합니다. 황제의 군대가 동쪽으로 감에 상공(相公) 호환(胡煥)이 이를 따라 의주(義州)에 왔는데, 병 때문에 머무르면서 조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마땅히 총병 유정의 군영으로 가서 따라야 하는데, 부윤(府尹) 김신원(金信元)과 익히 잘 알고 있었던 터라 김신원이 신(臣)에게 [호환과] 만나보기를 청하자, 신은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습니다. 한 번 만나자 바로 서로의 속정을 알게 되었고 일을 논할 즈음에는 통역사를 번거롭게 하지 않고도 문득 문자를 서로 보이니, 드러내서는 안 될 비밀스런 일까지도 여기에서 알 수 있었습니다. 이어 스스로 말하기를 “근래에 남쪽으로 가서 그 막부에서 총병을 따라야 할 것이니, 공(公)들이 말할 일이 있으면 꺼리지 말고 모두 말하시오. 내가 가서 총병을 깨우친다면 거의 천분의 1이라도 이익을 볼 것이오”라고 하였습니다. 신등(臣等)은 그 말을 듣고 마땅히 깨닫는 바가 있어 더불어 숨김없이 말한 것이 무려 수백 마디나 됩니다. 상공 호환은 기꺼이 우리의 말을 들었는데, 서로 오고간 말들이 끊임이 없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공은 이별을 고하였습니다. 삼가 그 오고간 말들을 기록하여 아래에 열거합니다.
호상공에게 쓰는 편지
이 밖에 또 호상공과 왜적의 정탐을 논한 편지가 수 천 마디가 있는데, 이는 ‘편지류’를 보라.
명의 대군은 이미 돌아갔으나 극적(劇賊: 규모와 세력이 강한 적)들은 여전히 팔도에 웅거하고 있고 그 종류도 매우 많습니다. 총병(總兵) 유정(劉綎) 대인(大人)이 일만(一萬) 여 병사로 그 세력을 막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바라보기를 마치 제방으로 물을 막아 이를 믿어 아무런 두려움이 없으니, 팔도 생령(生靈: 백성)들의 존망(存亡)과 생사(生死)의 기틀이 유정의 손에 맡겨져 있습니다. 천지와 같고 부모와 같은데, 어찌 한 두 마디[*DB상의 결자를 총간에 근거하여 ‘一’자를 보충하였음]의 말로 그 엄정하고 우뚝한 마음을 형용하겠습니까!
무릇 적정(賊情)을 헤아리고 사기(事機)를 추측하여 나아가고 물러나며 뭉치고 흩어지는 것은 처한 사태에 따라 곧장 결정하는 것일 따름이지, 멀리서 재거나 앉아서 헤아려 마지막 결과에 이르는 바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적들이 품은 침략하려는 마음은 죽지 않으면 끝이 나지 않습니다. 올해에 비록 적을 모두 물리쳤어도 아직 적들이 반드시 다시 오지 못한다는 것을 보장할 수 없는데, 하물며 여전히 적들이 남쪽 해변가에 머물러 있으니 틈을 타서 다시 공격해 오리라는 것은 더 이상 따지지 않아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만 유정 대인의 신무(神武)를 두려워하여 감히 움직이지 않은 것입니다.
만약 [왜의] 군사들을 배로 늘이고 사기를 높이는 활동을 쌓아 형세가 상당한 위치로 오를 수 있다면 며칠되지 않아 반드시 올 것입니다. 유정 대인이 만약 이 적들이 몹시 지쳐 고단하고 움츠려 물러나 있을 때를 틈타 사천(四川)과 절강(浙江)의 병력을 증원하고서 우리나라 병마(兵馬)와 협력하여 적을 무찌른다면 진실로 최고의 계책이며, 사천과 절강의 병력은 유정 대인의 힘으로 좌우할 수 있습니다.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은 이미 철수하였으니, 지금의 중요한 일들은 유정 대인만이 [명 조정에] 보고를 올리고 [군사들을] 지휘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만약 병력을 증원하여 소탕하지 않으면 방어하고 지키는 일이 실로 쉽지 않습니다. 무릇 병력이 배가 되면 마주 싸울 수 있고, 열배가 되면 포위할 수 있으며, 서로가 동일할 때는 지켜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키는 것이 오래되면 병사들은 노쇠하고 군량은 바닥나며, 장수들은 느슨해지고 장졸들은 해이해져 오래 지키면서 패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만약 극적(劇賊)이 새로운 병력으로 오래된 병력을 교체하고 앞서의 병력을 배로 늘려 길을 나누어 진격해 온다면 주둔하여 지키는 병사들이 아마 지금처럼 편안하고 침착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병사들이 용감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일이 되는 중요한 기틀이 불리하면 전투도 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작은 것은 진실로 큰 것을 대적할 수 없고, 적은 것은 진실로 많은 것을 대적할 수 없습니다. 항우(項羽)의 28기(騎)들이 관영(灌嬰)의 5천명을 대적할 수 없었으니, 이는 이미 그러했던 본보기입니다. 이와 같다면 병력 증원의 계책은 매우 큰 계책입니다. 병력을 증원하는 일 가운데서도 요동(遼東)과 광녕(廣寧)의 병사들을 증원하는 것은 반드시 사천과 절강의 병사들을 증원하는 것만 못합니다. 대개 요동의 병사들은 북쪽 오랑캐의 싸움에 능하고, 절강의 병사들은 왜적과의 전투에 능합니다. [그 군사들 속에] 간혹 우리 조선의 용맹하고 뛰어난 군사 일ㆍ이만 명을 총병 유정의 군사들 속에 나누어 따르게 하여 교련과 열병을 시간이 날 때마다 익혀 그들로 하여금 군인으로 서게 한다면 비록 사천과 절강의 군사들만 못하더라도 방어하고 지키는 데 조금의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 군사들이 굳세고 예리하며 사납고 용맹함은 또한 사방에서 칭탄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근래 평안한 나날들이 오래되자 백성들은 전쟁을 모르다가 스스로 왜적을 불러들였는데 [전쟁이 났다는] 풍문만 전해 듣고 흩어져 버린 것은 모두 이것 때문입니다. [그러나] 활 쏘고 말 타는 기술 역시 모두 잘 연습되어 있고, 편전(片箭)에도 능한데, 이는 사방의 여러 나라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화전(火戰)의 여러 기술을 가르친다면 그 기예는 매우 쓸만할 것입니다. 우리 병사들은 명나라 군대 속에 나누어 예속시켜[*DB상 ‘肄’자를 총간에 근거하여 ‘隸’로 바꿈] 하나하나 화전(火戰)의 여러 병기들을 상세히 가르치고 신무(神武: 유정을 말함)의 절제를 익히게 하십시오. 그런 즉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가서 연습하여 익숙해지고, 작은 것에서부터 점차 커지고, 가까운 곳에서부터 먼 곳에까지 모두가 총병 유정의 신묘한 변화에 물들어 성취를 이룬다면 적을 막는 일의 기틀에 반드시 여유가 있을 것입니다. 상공(相公)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호상공이 답함
왜이(倭夷)가 명색이 나라라는 뜻은 이루었지만 아직 통창(痛創)함을 겪지 못하고 여전히 부산에 진을 치고 모여 있으니, 그 교만한 정상은 이미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우리 명나라 대병(大兵)이 경솔하게 철수하고서 다만 진(鎭)을 지키는 책무를 총융(摠戎) 유정(劉綎)의 1만 6천의 병사들에게 맡겨 놓았으니, 그들이 10 수만의 굳센 적들을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일전에 총융 유정의 공문(公文)이 군문(軍門)에 도착했을 때 병력을 청원한 것이 2만에 이르지 못했고 그 또한 요양(遼陽)과 관점(寬店) 등의 곳에서 병력을 모은다고 들었는데, 이 역시 쓸 만한 계책이 아닙니다. 파견할 군사가 적은 것은 잠시 논의할 겨를 없이, 요양 등의 지방에서 병력을 모은다고 말해도 [그곳에서] 왕경(王京: 서울)과의 거리가 동쪽으로 2천리나 되는데, 만약 왜적들의 정세가 준동하여 저돌적으로 함부로 난동을 부리게 되면 멀리 있는 물로 가까운 불을 끌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까닭에 저는 일찍이 다시 서계(書啓)를 올려 앞의 일을 갖추어 논하고 그 뒤에 다시 문서를 작성하여 올려 보내 이전의 논의들을 마땅히 바꾸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생각건대 이 적들은 반드시 크게 징벌해야 합니다. 요점은 우리 병사들이 많이 모여 서울 동쪽 모든 요해처에 빽빽이 포진한 연후에야 나아가 싸울 수 있고 물러나 지킬 수 있어 만전의 공로를 거두기에 어렵지 않습니다. 단지 올해 겨울과 내년 정월에 시도해야 기회를 거의 얻을 것인데, 늦어지면 아마 이르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무릇 외국으로부터의 모욕은 반드시 막아야 하고, 내치(內治) 마땅히 닦아야 합니다. 일전에 왜노(倭奴)들이 국경을 침입하였을 때 귀방(貴邦)의 사민(士民)과 자녀(子女)들이 기꺼이 신하가 되고 첩이 되었다고 들었는데, 이는 어찌된 연유이겠소? 큰 도읍의 시름과 고통에 젖은 백성들이 난(亂)을 원하는 것은 그 형세가 그러한 것입니다. 지금 귀방께서 해야 할 일은 귀방의 군왕과 재상들이 속히 의당 와신상담(臥薪嘗膽)하여 옛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도모하며 인심(人心)을 수습하는 것을 급선무로 하고, 흩어진 백성들을 불러 모으며, 부상당한 이를 부축하고 죽은 이를 문상하며, 어려움에 처한 신하를 뒷받쳐 주고 전사(戰死)한 군졸들을 구휼하여 백성들의 여망을 거의 위로하고 사기(士氣)를 돋우고 일체 함부로 세금을 걷는 것을 엄히 금하는 데까지 이른다면 그 때서야 일을 다 한 것입니다. 대개 이로움이 위로만 돌아가 백성들이 아래에서 원망한다면 어지러움을 생하지 않게 하려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물며 외적의 침입으로 도망갈 곳도 없는 때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이는 귀에는 거슬리는 말이고 입에는 쓴 약입니다. 선생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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