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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유림의 거두 김대락, 망명 열차에 오르다
1911년 1월 6일, 날씨는 추웠지만 맑았다. 안동 유림의 거두
김대락(金大洛)
은 67세의 노구를 이끌고 열흘 동안 서울의 한 허름한 여관에서 지내고 있었다. 서울에는 그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아내와 자식, 손자들과 조카, 심지어 자신의 집에 노비로 있었지만 자신이 직접 해방시켰던 몇몇 노비들까지 그와 함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식솔들을 이끌고 강제로 일본땅이 된 조선을 떠나려 한다.
망명길, 그것은 조국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찾기 위한 길이다. 그 길을 위해 김대락은 식솔들을 이끌고 여관을 나섰다. 김대락과 그 부인처럼 잘 걷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두 인력거를 탔다. 여관을 나선지 얼마 되지 않아 일행은
남대문 밖 정거장
에 갈 수 있었다. 김대락은 조국을 떠나는 길에 어떠한 미련도 없었지만, 서울의 지인(知人) 판서
조종필(趙鐘弼)
을 한 번도 찾아가지 않은 것만이 안타까웠을 따름이다.
김대락은 회한으로 가득 찬 채 열차에 올랐다. 열차는 출발하여 수색과 일산, 임진강을 건너 장단과 개성을 지났고, 오후에는 평양을 지났다. 열차에서 바라보는 조국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아득히 넓은 모래사장과 햇빛이 은은히 얼비치는 산세를 본 김대락은 이곳은 반드시 명승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후 교각을 주로 지나던 기차는 이제는 굴을 여러 차례씩 지나게 되었다. 금방 지색이 달라진 것이다. 열차가 굴을 들랑날랑 거리자 김대락은 어디가 어딘지 더 이상 구분할 수 없었다. 기차가 평안북도로 접어든 것이다.
밤 8시 열차는 의주
백마역(白馬驛)
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리자 사방은 온통 깜깜하였다. 일행은 여관을 찾았으나 여관을 찾지 못하였다. 하는 수 없이 불빛만 보고 촌가에 들어가 문을 두드려 주인을 부른 다음 돈까지 주어가면 간절히 애걸하여 머물 만 한 곳을 찾았다. 객관을 찾아 들어가 늦은 저녁식사 후 몇 시간이 흐르지 않아 새벽닭이 울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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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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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백하일기(白下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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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대락(金大洛)
주제 : 독립운동, 일제강점, 중국(간도) 망명, 망명 여정
시기 : 1911-01-06 ~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서울특별시
일기분류 : 망명일기
인물 : 김대락, 그의 처와 식구들
참고자료링크 : (참고자료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 김대락이 간도행을 결심한 이유
이 부분은 김대락 『백하일기』를 쓰기 시작한 첫날의 모습을 구성한 것이다. 따라서 이 기록 이전까지 김대락이 안동 고향에서 서울까지 간 행적이나 간도로 이주할 결심 등은 본인의 기록에서는 살펴볼 수 없다. 다행히 김대락과 함께 만주 망명하기로 한 이상룡의 『석주유고』가 있어 이에 근거하여 김대락의 이주 결심과 안동에서 서울로 간 행적을 추적할 수 있다. 이상룡은 그 유명한 임청각의 주인이자 초대 국무령(1925)이었고, 김대락과는 처남 매부 사이었다. 『석주유고』의 이상룡 「행장」에는 간도로 가게 된 결정적인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경술년(1910) 가을에, 일진당의 한일합방 성명서가 나왔고…… 공(이상룡)은 통곡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일체의 손님을 사절하고, 만한(滿漢, 중국 만주) 지도를 꺼내어 유심히 살펴보곤 하였는데, 주위에서 그 뜻을 이해하는 자가 없었다. 11월에 황만영·주진수가 양기탁 및 이동녕의 뜻을 전달하러 와서 만주로 넘어가는 간도 이주 계획을 설명하니, 공이 이를 즐거이 듣고 행동을 함께 하기로 약조하고서 드디어 도만을 결정하였는데, 백하 김대락 공이 실로 이 일을 시종 함께 하였다.”(『석주유고』 「행장」, 안동독립기념관 편) 여기서 알 수 있듯 김대락의 간도 이주는 이상룡과 함께 계획한 것이며, 안동의 문중 혹은 대표적인 유림들의 집단 망명인 것이다. 안동 유림들의 망명은 1910년 12월부터 이루어지는데, 김대락은 거의 12월 안동을 떠나 간도로 가게 된다. 김대락은 간도로 이주하는 1진이라 할 수 있겠다. 김대락은 간도로 이주하기 위해 우선 집안 재산부터 처분했을 것이다. 이 처분한 재산으로 남아있는 형제나 친척을 위한 땅과 자금을 마련하고, 여행에 필요한 경비 및 이주 후 현지 경비를 마련했을 것이다. 또 그는 이상룡과 함께 노비 문서를 모두 불태워 자신의 노비들을 양민으로 만들었고, 그 중의 일부는 다시 김대락의 만주행을 따랐다. 김대락은 대략 1910년 12월 24일 안동을 떠났다. (2년 뒤 일기에 떠난 날짜를 기술함.) 그와 그 일행은 안동에서 도보로 추풍령으로 갔다. 이렇게 가는데, 대략 2~3일을 소비하였다. 2~3일이 소비되는 것은 가면서 여러 사람들과 인사를 처리하면서 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추풍령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탔을 것이다. 서울에서 열흘을 머물렀기 때문에 안동을 떠나 의주까지 대략 13일이 걸렸다. 물론 기차는 단 두 번 탔을 것이며, 김대락의 경우 생애 최초로 기차를 탔을 것이다. 일기에 “교량을 지나는데, 그 아래가 모두 큰 시내나 강”이라고 표현한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김대락이 간도로 이주하기로 결심한 것은 단순히 주위의 유림들이 가자고 해서 간 것은 아니다. 김대락은 바로 이 시기 사상적 전환을 맞고 있었다. 그는 전통 유림으로서 신학문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반감은 1909년 3월 「대한협회보」를 보고 바뀌게 되었고, 새로운 인재의 양성에 눈을 돌리게 된다. 이에 그는 그의 집 사랑채를 협동학교(協東學校)에 내어주기도 한다. ‘협동(協東)’이란 안동 지역 유림이 협동하여 세운 학교라는 뜻이다. 전통 유학을 고집하던 60 넘은 늙은이가 사상을 바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에 유학을 깊이 체득하였으면서도 유학만을 고집하지 않고 다만 유학의 도덕성에 근거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한 유림들을 ‘혁신유림’이라 한다. 더욱이 조선에 대한 일제의 강제 병합은 김대락과 안동 유림의 결속을 더욱 더 공고히 했다. 일제의 강제 병합 이전까지 조선은 위정척사로부터 의병항쟁까지 다양한 독립투쟁을 해 왔다. 그러나 강제 병합과 동시에 일제는 무단통치를 시작하고, 더 이상 조선에서 새로운 인재의 양성 방법을 찾지 못해 김대락은 노구를 이끌고 타국으로 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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