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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도촌 첫 정착지에서의 생활
1911년 1월 15일, 김대락은 서간도의 첫 조선인 정착지인 항도촌에 도착했다. 하룻밤을 보내는데 방에는 커튼처럼 가리는 가리개도 없어 추위가 매우 심하였다. 다른 사람들, 특히 울진에서 온 사람들은 방 하나에 여러 사람이 기거하여 그 비좁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이런 와중에 조선에서 온 사람들은 뜻이 통하면 가문과 성씨가 다르더라도 이제 더 이상 구분하지 않았고, 모든 일을 협동하여 처리하였다. 김대락이 보기에 이역 땅에서 이렇게 하는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러나 이역의 중국 땅은 김대락이 보기에 예가 무너진 나라였다. 김대락은 우연히 결혼식을 보았다. 그들은 통소를 불면서 떠들썩하게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이것은 신부의 결혼 행차를 앞장서서 이끄는 것이었다. 김대락에게는 이것이 이국의 낮선 풍경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예가 무너진 중국으로 보였다. 김대락은 전통의 유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다시 옛날 도와 예가 행해지던 때를 그리워하였다.
낮선 땅에서 적적하고 궁색하게 지내던 김대락의 거처 동편 방에는 참판을 지냈던 정원하와 주사를 지냈던 이건승이 거처하고 있었다. 김대락은 그들을 만나자마자 예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푸근하였다. 김대락은 정원하, 이건승과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고 단란한 가족처럼 지냈다. 하지만 1월 20일 마을에 학교를 세우자던 정원하와 이건승은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김대락은 여러 날 그들과 벗처럼 지내다 보니 서운함이 끝이 없다. 그들이 거처를 옮긴 뒤 김대락은 쓸쓸히 집을 지키게 되었다. 게다가 23일은 큰 눈까지 내려 찬 기운이 엄습하여 사람을 지치게 하였다. 김대락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24일 아들 형식은 주소(舟所)에서 소고기를 사왔다. 여러 날 고생한 끝이라 밥을 짓고 국을 끓여 먹고자 하였다. 김대락의 가족들에게야 타국살이에 시달렸던 피로를 풀어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손자 창로가 늘 마음에 걸렸다. 고기나 맛있는 것을 먹을 때 마다 손자가 생각나고 음식을 먹으면 마음이 툭 내려앉았다. 김대락은 아들, 손자와 함께 지내지만 오로지 손자에게 더 기대를 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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