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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애원, 그 탄생의 시초
1598년, 임진왜란은 겨우 끝났다. 그러나 전란이 수습되기도 전에 정치는 또다시 붕당의 세력 싸움으로 정국이 흘러가고 있었다. 정경세(鄭經世), 그는 관직에 몸을 담고 있었지만 그 역시 붕당의 세력 싸움에 밀려, 아니 정인홍(鄭仁弘)에 밀려 조정에서 쫓겨났다. 무엇보다 서애 류성룡도 탄핵을 받고 있었고, 그 역시 사직소를 올리고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류성룡과 정경세는 사제지간이었다. 정경세는 스승의 탄핵을 막지도 못하고, 자기 역시 스승과 함께 탄핵을 받았다. 스승 류성룡은 조정에 나갈 생각 없이 고향인 안동 풍산에 낙향하였다. 그래서 정경세 역시 사직상소를 올리고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1598년 겨울, 정경세는 다시 청송부사(靑松府使)에 임명되었다는 교지가 내려졌지만 벼슬자리에 나가지 않았다. 이후 또다시 벼슬이 내려졌지만 그저 고향 상주에 머물며 마음을 가다듬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정치를 떠나 있어도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조정에서 이미 녹을 먹었던 것에 크나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비록 유학자였지만 보살과 같은 자비심을 지녔고, 세상을 경영하여 백성들을 구할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1599년, 정경세는 여전히 상주 집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비록 조정에서 물러나 있지만 여전히 조선의 관리였다. 관리로서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유학자로서 그는 백성들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정에서의 업무나 지방관으로서의 업무는 아니지만 백성을 구제할 생각에 집에 있으면서도 늘 먼 하늘만 보면서 험난한 시대를 구원할 방책을 궁구해 보았다. 백성들의 건강한 삶을 지키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했다. 그의 머리에 마침 번득이며 지나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성람(成覽)
이었다. 성람은 유학자이면서 동시에 의술에 뛰어났다. 그는 유의(儒醫)였다. 그와 함께라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599년 어느 날, 정경세는 성람을 찾아갔다. 사실 성람을 찾아 백성들을 구제할 방책을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정경세가 성람에게 말하였다.
“우리 사람들이란 혈기로 이루어진 몸입니다. 추위와 더위는 타는 것은 물론 400여 가지나 되는 병에 걸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약이라고는 한두 가지도 마련되어 있지 않아 비명에 죽는 일이 허다합니다. 이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무너지려는 벼랑 아래나 담장 아래에 서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지금 성람 선생께서는 유학에 통달해 있습니다. 게다가 의술에도 뛰어나십니다. 아마 선생께서 가지시는 마음은 신령한 사당에서 자신의 안위를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안위를 기원하시는 옛 선현들의 마음과 같으시겠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병에 걸려 있습니다. 이것을 단지 몸의 한 부분만 아프다고 보고서 그냥 놔두어서야 되겠습니까! 지금 저와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약재를 모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병을 진료하고 약을 처방하는 것은 선생이 맡으셔야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막상 서로의 논의가 아닌 일방적인 통보처럼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성람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성람 역시 정경세처럼 마음은 가지고 있었지만 이렇게 현실에 곧장 실행하려는 생각에는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람이 생각하기에 정경세의 말은 모두 옳았다. 이를 당장 시행하는 데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정경세는 사람들을 모아 약재를 모으고 성람은 직접 진료를 시작했다. 아직 ‘
존애원(存愛院)
’이라는 이름은 없었어도, 조선 최초의 사립의료시설은 이렇게 마련된 것이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멀티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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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존애원기(存愛院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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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준(李峻)
주제 : 조선시대 의료, 사설의료원 설립, 설립 배경
시기 : ( 미상 )
장소 : 경상북도 상주시
일기분류 : 서원일기
인물 : 정경세, 류성룡, 성람
참고자료링크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류성룡
◆ 존애원의 설립배경
정확한 날짜를 추정할 수 없으니 1598년에 존애원이 설립되었다는 것은 위의 사실 때문이다. 그런데 그 당시는 아직 의국(醫局) 정도라 불리었고, 실질적으로 존애원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1602년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우복 선생 행장에 “임인(1602) 만력 30년 선조대왕 35년 ○선생의 나이 40세였다. ○묘지에 「이때 공은 벼슬에서 물러나 시골에서 지낸 지 2년이었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상의하기를, “유마힐(維摩詰, 석가의 재가제자)은 지위가 있는 자가 아니었는데도 남의 병을 제 병처럼 여겼는데, 우리는 모두 사람들에게 은택을 끼칠 뜻을 품었으니 어찌 동포의 구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서, 드디어 각각 돈을 내어 의국(醫局)을 설치하고 이자를 받아 약재를 사서 병에 따라 약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는 데에 마음을 둔다[存心於愛物]’라는 명도(明道)의 말을 취해 의국의 이름을 ‘존애원(存愛院)’이라고 하였는데, 사람들에게 미친 음덕(陰德)이 광대하였다.”라고 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정경세의 행장에는 존애원을 1602년 세운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다른 자료에는 그 성립시기가 더 늦은데,(한국민족대백과사전에는 설립년도가 1623년으로 기재됨.) 이는 그 당시를 정확히 기록한 자료가 별로 없어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도 연도 추정은 할 수 있으나 날짜에 대한 추정은 불가능하다. 조선은 전통적 공공의료시설로 삼의사(三醫司) 조직을 갖추고 있었는데, 삼의사란 내의원(內醫院), 전의감(典醫監), 혜민서(惠民署)인데, 이 가운데 백성들의 질병을 치료하는 기관은 혜민서이다. 혜민서는 전국적인 조직으로, 우리가 흔히 보는 드라마에 나오는 서울의 혜민서는 그 하부조직인 활인서(活人署)이다. 당시 서울에는 동·서의 활인서를 갖추어 놓고 도성의 백성들을 치료하였다. 그러므로 요즘 조선 전통 의학 드라마에 나오는 혜민서는 활인서이다. 임진왜란 이후 의료기능은 있었지만 전국적인 공공의료조직은 모두 파괴되었다. ‘존애원’은 조선 최초의 사립의료기관으로 상주 각 문중에서 기본 자본을 대었다. 사실 이것은 1598년 이후의 일이고 그 전에는 의료봉사의 형태를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비록 ‘존애원’이 사설 의료기관이기는 하나 공공의료를 대신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다.
◆ 원문 번역
존애원기(存愛院記) 우리 마을에 벼슬을 높이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보살과 같은 자비심을 지녔고, 세상을 경영하여 백성들을 구할 포부를 지녔다. 지난 기해년(1599) 가을, 관직을 그만두고 집에 머물러 있었다. 하루는 그가 벗인 성람(成覽)과 다음과 같이 의논하였다. “우리는 혈육을 지닌 몸입니다. 추위와 더위를 타면서 400여 가지나 되는 병으로 걸리지만 약이라곤 한두 가지도 구비되어 있지 않아 비명에 죽는 일이 허다합니다. 그것이 무너지려는 암벽이나 담장의 아래에 질곡으로 묶인 채 죽는 것과 다를 바 없겠지요. 지금 공께서는 시서(詩書)의 학문은 물론 의술에도 통달해 있습니다. 공의 마음은 바로 고인들이 신령한 사당에서 백성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몸 한 부분이 아픈 것으로 보고 막연히 마음에 두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지금 저는 동지들과 함께 약재를 대략 모아 급한 데 쓰고자 하는데, 병을 진료하고 투약하는 것은 공이 맡아야 할 일입니다.” 이를 들은 성람은 그 말이 옳다고 여겼다. 여러 벗들 역시 흔쾌하게 힘 보태기 바랐다. 이에 우리나라 약재는 노는 일손들을 모아 채집하게 하고, 중국 약재는 쌀과 베를 내어 무역하게 하였다. 약재가 갖추어지자 출납할 장소가 있어야 하기에 곳간을 지어 관리하였고, 또 찾아오는 병자이 날로 늘어나자 머물러 숙박할 곳이 있어야 하므로 집을 지어 병자들의 숙소로 삼았다. 약을 팔 때는 값대로 받았는데, 원금은 보존하고 이윤을 늘렸으며, 그것으로 창고를 채우고 여러 약재를 모두 마련하여 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곧장 주었으니, 그 효과가 민간에 자자하게 퍼져 나갔다. 이에 정선생(程先生)의 ‘남을 사랑하는 데 마음을 둔다[存心愛物]’라는 말에서 따서 ‘존애원(存愛院)’이라 하였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있어서는 친하거나 소원함이 비록 다를 수 있지만, 모두 천지 사이에서 태어나 함께 동일한 기운을 받았기에 우리 몸을 가득 채운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之心]’을 미루어 동포를 살리는 것이 어찌 내 직분 안의 일이 아니겠는가? 한 번 벼슬의 명은 받은 선비는 그 지위가 비록 미미하고 시행하는 일이 비록 넓지 않더라도 진실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반드시 다른 사람을 구제하는 공로가 있게 된다. 이것은 군자가 그 마음으로 삼는 까닭이니 이를 편액으로 써서 취한 뜻이다. ‘사랑’이란 인(仁)을 베푸는 것인데,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백성들을 사랑하는 것[仁民] 데 이르고, 백성을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사물을 사랑하는 데 이르니 모두가 이 사랑을 미루어 나가지 않음이 없다. 사랑의 쓰임이 어찌 크지 않겠는가? 옛날의 군자들은 집 밖을 나오지 않고서도 한 나라의 교화를 이루었으니, 그 도(道)는 바로 이것 때문이다. 유마힐(維摩詰)이 관직에 있지 않았지만 여전히 다른 사람의 병을 자신의 병으로 볼 수 있었는데, 하물며 우리 유가에 있어서, 그리고 하물며 다른 사람과 나를 하나로 생각하는 것에 있어서랴! 지금 우리 동년배 여러 사람은 모두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며, 그 국면과 규모에 근거해 다른 날 시설을 갖추어 놓을 것이다. 이에 하루아침에 때에 따라 써질 때 진실로 그 일을 모두 조처하였으니,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보존한 효과가 어찌 하나의 ‘원(院, 존애원)’에만 그칠 따름이겠는가? 다만 일의 흥폐에는 때가 있는 것이고, 마음의 근면함과 게으름도 무상한 것을 걱정한다. 이후에 이를 계승한 사람이 이를 지켜 무너지지 않게 하여 의국을 연 뜻에 이를지는 알지 못하겠다. 맹자는 “측은히 여기는 마음은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말하였는데, 측은한 마음이 사라진 연후에야 이 의국은 없어질 것이다. 그런 까닭에 후생의 군자들이 어찌 여러 앞선 선비들의 마음을 자기의 마음으로 삼지 않고서 어찌 후학들이 본받을 만한 것을 도모하겠는가? 나는 이때 마침 지방관에 매여 있어 이러한 거사에 함께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제공(諸公)들의 뜻이 아주 근실하고 일을 아주 세밀하게 처리하여 그 일을 의롭게 여기고 그 효과를 즐기지 않음이 없었다. 지금 제공들의 부탁을 받아 이 일의 전말을 기술하고, 또 훗날 이 일을 맡을 사람을 격려하는데, 하나하나 조치한 항목들은 원규 안에 들어 있으나 여기에서는 기술하지 않겠다. 벼슬이 높았던 사람은 누구인가?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이다. 이를 기문을 쓴 사람은 누구인가? 졸수옹(拙修翁) 이준(李埈)이다.
이미지
징비록 표지
징비록 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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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 전경
계정 뒷문
계정 건물
계정 기단
계정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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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 보, 도리, 이음새
계정 천장
대산루 건물
대산루 후면
대산루 측면
대산루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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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루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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