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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위, 죽어서 지천(芝川) 방암산(舫岩山) 미좌원(未坐原)에 묻히다
허위(許蔿)의 형이 집행된 이후 옥졸은 칼을 풀어 놓고 모자를 집어 던지며 자신이 원치 않게 지사를 사형하는데 참여했다는 것을 자책하고 있었다. 아울러 허위가 사형당하던 날 감옥의 죄수 몇 백 명은 모두 통곡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허위가 사형당했다는 소식은 감옥 밖으로 전해졌고 금새 도성 안에는 애도하는 분위기로 가득했다. 선생의 문하생이었던 박상진(朴尙鎭)은 선생의 시체를 거두어 산골짜기에 임시로 만든 집에 모시고 4일간 초상을 치루었다.
하지만 일본측에서는 허위에 대한 상을 대대적으로 치루는 것을 막았다. 게다가 상주가 될 사람은 마침 전염병에 걸렸던 탓에 조문객들이 몰려드는 속에서 초췌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럼에도 초종에 쓸 물건은 종로 장사꾼들이 각자 각출하여 성의껏 만들어 와서 장례는 유감없이 치룰 수 있었다. 그만큼 허위를 추모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허위는 그 이듬해인 1909년 5월에서야 지천(芝川) 방암산(舫岩山) 미좌원(未坐原)에 묻힐 수 있었다. 이때 오랜 친구였던 장지연(張志淵)은 이 소식을 듣고 사흘 동안 통곡하면서 말하기를,
“공은 어찌하여 나를 빼 놓고 먼저 가는가!”
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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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왕산허위선생거의사실대략(旺山許蔿先生擧義事實大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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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허복(許馥)
주제 : 의병
시기 : 1908-09-24 ~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경상북도 김천시
일기분류 : 의병일기
인물 : 허위, 박상진, 장지연
참고자료링크 :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허위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장지연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박상진
◆ 의병장 허위의 일생
허위는 철저한 유교적 환경에서 성장한 전형적인 유생으로서 근왕적 충의사상이 투철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관직에 나간 후 신학문을 접하면서 의식체계에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허위는 자주적 개화사상을 수용하여 스스로 의식을 확대함으로써 국제정세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 아울러 그는 초기에는 위정척상 의한 춘추대의론을 명분으로 의병을 일으켰으나 1905년 이후에는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운동으로써의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의병투쟁사상 초유의 대작전이었던 13도창의군에 의한 서울진공작전 당시 군사장으로 일본군과의 직접적인 교전은 물론 각국 영사관에 통문을 돌려 일제 침략의 불법성과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알리는 등 의병투쟁을 단순한 무력투쟁이 아닌 국제사회를 인식한 항일투쟁노선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또한 그는 의정부 참찬으로 재직시 10개 조의 국정 개혁안을 정부에 건의하여 진보적인 개혁사상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허위는 의병투쟁에 대해 오직 일본과 차마 함께 이 땅에서 살 수 없기 때문이라고 당당하게 항일의식을 피력함으로서 민족정기를 바로세워주는 큰 업적을 남겼으며, 자신의 의병투쟁이 비단 한국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일본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며 한국이 독립이 되어야 동양평화가 유지된다고 하는 동양평화론을 강조하였다. 이에 그를 심문하던 아카시 일본군 헌병 사령관은 그의 인물됨에 감복되기까지 했다. 허위는 1896년 의병을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하여 1908년 일본군에게 체포당할 때까지 항일 투쟁을 계속했으며,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그곳에서 교수형에 처해져 순국할 때에도 당당하게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며 항일의지와 기상을 불태움으로서 후대에 애국정신의 전형을 남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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