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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위, 죽어서 지천(芝川) 방암산(舫岩山) 미좌원(未坐原)에 묻히다
허위(許蔿)의 형이 집행된 이후 옥졸은 칼을 풀어 놓고 모자를 집어 던지며 자신이 원치 않게 지사를 사형하는데 참여했다는 것을 자책하고 있었다. 아울러 허위가 사형당하던 날 감옥의 죄수 몇 백 명은 모두 통곡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허위가 사형당했다는 소식은 감옥 밖으로 전해졌고 금새 도성 안에는 애도하는 분위기로 가득했다. 선생의 문하생이었던 박상진(朴尙鎭)은 선생의 시체를 거두어 산골짜기에 임시로 만든 집에 모시고 4일간 초상을 치루었다.
하지만 일본측에서는 허위에 대한 상을 대대적으로 치루는 것을 막았다. 게다가 상주가 될 사람은 마침 전염병에 걸렸던 탓에 조문객들이 몰려드는 속에서 초췌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럼에도 초종에 쓸 물건은 종로 장사꾼들이 각자 각출하여 성의껏 만들어 와서 장례는 유감없이 치룰 수 있었다. 그만큼 허위를 추모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허위는 그 이듬해인 1909년 5월에서야 지천(芝川) 방암산(舫岩山) 미좌원(未坐原)에 묻힐 수 있었다. 이때 오랜 친구였던 장지연(張志淵)은 이 소식을 듣고 사흘 동안 통곡하면서 말하기를,

“공은 어찌하여 나를 빼 놓고 먼저 가는가!”

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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