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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자 모두 도로에서 춤을 추다
1615년 6월 13일, 장흥효가 살았을 당시에는 모내기가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다. 벼의 파종은 대개
직파(直播)
가 일반적이었다. 벼를 논에 직접 뿌리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모내기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직파를 할 때 물이 필요한 것이 어느 정도 해결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모내기를 하더라도 문제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모내기를 했는데 물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1615년은 기근이 심하게 이어졌다. 모내기를 해야 하는데 오래도록 가물었기 때문에 모판에 모가 이미 많이 자라 있었지만 모를 논에 옮겨 심지 못했다. 물이 없으니 옮겨 심는 즉시 말라죽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하늘에서 비가 오기를 기대한 것은 양반과 농민, 노비 할 것 없이 모두 같았다.
그런데 기다리고 기다리던 비가 드디어 내렸다. 논에 비가 적셔 들기도 전에 모든 마을 사람들이 모를 논에 옮겨 심었다. 검은 머리의 어린아이부터 시작하여 흰머리의 나이 든 노인들까지 모두 도로가에 나와 함께 기뻐하며 손뼉을 친 것은 마을의 그 어떤 대소사보다도 기쁜 일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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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경당일기(敬堂日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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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장흥효(張興孝)
주제 : 모내기
시기 : 1615-06-13 ~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경상북도 안동시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장흥효
참고자료링크 :
조선왕조실록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장흥효
◆ 직파법과 모내기
모내기가 도입되기 이전에 조선의 논농사는 대부분 직파법이었다. 직파법은 씨앗을 못자리에 키우지 않고 직접 논에 파종하여 수확할 때까지 한 장소에서 자라게 하는 방법을 말한다. 직파법으로 벼를 관리하면 묘상관리나 이식의 노력 등이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직파를 할 경우에는 어린 모의 보호가 충분히 제공되지 않았다. 그래서 어린 모의 경우 병충해, 한해, 냉해, 상해 등으로부터 모를 보호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또한 잡초를 제거하는데 꽤 많은 노동력이 요구되었다.
모내기는 이앙법이라고 부른다. 모내기는 못자리에서 모를 어느 정도 키운 다음에 그 모를 논으로 옮겨 심는 재배방법을 말한다. 고려시대 극히 일부 시행되기도 하였으나 모내기를 위해서는 물을 충분하게 공급할 수 있는 수리시설이 필수적으로 요구되었다. 그래서 대개는 산골짜기 계곡 주변에 모내기가 처음으로 시행되었다.
모내기의 경우에는 직파법보다 제초 작업에 따른 노동력을 절약할 수 있고 또한 더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었기 때문에 조선 후기에 이르면 전국적으로 확대, 보급되었다. 또한 이모작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쌀 종자를 절약할 수도 있었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1615년 을묘년(광해군7) 6월 13일 무자戊子 오래도록 가물다가 비로소 비가 내리니 모든 백성이 모를 옮겨 심는데 검은 머리 아이와 흰머리 늙은이가 도로에서 함께 기뻐하며 손뼉을 쳤다. 〇 홍군수洪君受 군의 편지를 다시 받으니 마주보는 듯한 기쁨을 이길 수 없었다.
이미지
조선시대 농사짓는 모습
조선시대 농사짓는 모습
그래픽
조선시대 벼농사의 직파법
조선시대 벼농사 모내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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