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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계절과 좋은 벗이 어우러진 자리, 최고의 반찬은 두부
1603년 9월 8일, 김령은 저녁에
이지(以志)
ㆍ
자개(子開)
와
근시재(近始齋)
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여희 및 구(坵)와 함께 갔다. 이지가 두부를 해서 이바지했다.
광하(光夏)
도 왔는데 이날 밤
재사(齋舍)
에서 함께 잤다.
1604년 4월 10일, 아침에 정보ㆍ용보가 각각 술을 내왔으나 두 형들은 아직도 먹지 못했다. 마침내
삼계서원
으로 출발했다. 원장이 밥과 두부를 차려 놓았는데 김령과 찰방ㆍ용보ㆍ
우형(遇亨)
이 자리를 같이했다. 날이 오시에 가까워질 무렵 두 형들은 돌아가고, 찰방 및 원장도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김령은 용보와 함께 낚싯대를 메고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종일 읊조렸다.
― 못에서 고기를 보고 즐기고, 섬에선 새를 희롱하니, 멀리 있는 사람이 그립기도 하여라.
1610년 4월 26일, 김령은 밥을 먹고 다시 동쪽으로 나가서
잔도[棧路]
를 지나 김생암(金生庵)에 이르렀다. 암자는 퇴락하여 무너지려고 했으며, 굴 속에는 석순(石蓴)이 있고 폭포는 말라서 물방울만 떨어졌다. 오후에 다시 연대사에 도착하여 두부를 만들어 먹었다. 저녁때 걸어서 산을 내려와 강을 건너
나부촌
에서 유숙했다. 밤에 덕여와 참이 강물을 막고 고기를 많이 잡았다.
1615년 3월 13일, 병세가 조금 덜해졌고 오래된 약속을 감히 미룰 수가 없어서 밥을 먹은 뒤에
후조당(後彫堂)
에 들러
이회숙(李晦叔)
을 보고 마침내
운암(雲岩)
으로 향했다. 판사ㆍ상사 두 형과 자개(子開)ㆍ여희ㆍ이지ㆍ이건ㆍ이도ㆍ회숙ㆍ
오(俁)
ㆍ
치(偫)
두 생질ㆍ김시량 군ㆍ서숙ㆍ참이 모두 나란히 말을 타고 갔다. 강가 바윗돌에서 쉬고 구름 서린 오솔길을 밟아가니 봄날은 따사롭고 봄빛이 한창이었다. 진달래며 개살구꽃이 바위 골짜기에 반쯤 피어 있었고 다른 곳은 아직 꽃이 피지 않았다. 저녁 무렵에 각자 가지고 온 술을 마시며 두부를 먹었고, 달빛 따라 산을 내려와 다시 강변 모래밭에서 술을 마셨다.
김령은 가기는 갔으나 몸이 힘들고 피곤하여 시를 읊을 생각이 없어 안타까워했다. 돌아올 때 다시 말을 나란히 하고 집에 도착하니 밤이 깊었다.
1615년 4월 8일,
이계(伊溪)
어른이 두 아들을 데리고 왔고, 여희와 당ㆍ광석이 계속 도착했다. 오후에
승방(僧房)
에서 조촐하게 술을 마셨고 저녁에는 두부를 먹었다. 밥을 다 먹기도 전에 봉성 수령이 당도했다. 마주 앉아 다정한 이야기를 밤이 되도록 끝도 없이 나누었으니 역시 즐거운 일이었다.
1614년 4월 29일, 날씨가 구름이 일었다가 사라지고 비가 조금 부슬거리며 오다가 간혹 그친 뒤 다시 뿌리기도 했는데, 몹시 비가 내리기를 바랐다. 이치원(李致遠)ㆍ
이임경(李任卿)
이
온계(溫溪)
로부터 도착했다. 밥 때는 두부[造泡]를 먹고 동편의 대(臺)로 나가 걸었다. 구름은 사라지고 비가 그쳐 햇살이 따가운데 사나운 바람이 다시 불어오니 가뭄이 걱정이다. 저녁 무렵에 집으로 돌아왔다.
1616년 9월 5일, 아침에 두부를 차렸다. 밥을 먹은 뒤 김령은 짚신에다 지팡이를 짚고 동쪽으로 둘러서 오르는데 단풍 든
녹라(綠羅)
가 옷소매에 걸렸다.
1618년 11월 14일, 이날 김령은 방잠 재사에 가서 나무 베는 일을 보았다. 정 형과 참이 같이 갔다. 저녁에 두부를 만들어
사수(士修)
ㆍ
여희(輿熙)
ㆍ
확(確)
ㆍ
서숙(庶叔)
ㆍ광석(光碩) 등을 불러 함께 먹었다. 먹기를 마친 뒤 돌아오니 이미 밤이었다. 들으니,
최전
이 고강하는 것이 아이들 장난 같아서 비록 구두를 떼지 못하더라도 모두 실격을 면했다고 한다. 최전의 아비 진방(鎭邦)은 충주
이동(吏童)
으로 과거에 급제한 본래 미미한 부류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것이다.
1619년 9월 17일, 오시에 이지와 서숙이 왔다. 박 군이 다시 이곳에 도착할 것이므로 여러 친척들이 만나 보고자 해서였다. 유사 우택보(禹擇甫 : 택보는
우처인(禹處仁)
의 자)가 와서,
이덕원(李德遠)
이 오란다고 전하였다. 이는 이덕원이 향교의 상유사(上有司)로서
김주우(金柱宇)
를 위하여 두부를 만들었는데, 우리들에게까지 주려고 하는 것이니 어찌 가겠는가? 사양하여 보냈다.
박 군이 와서 술상을 차렸다. 여희와 이지도 술을 가지고 왔다. 이날 밤에 다시
박 군의 첩
을 오라고 하여 이별주를 나누었다. 내일은 그 낭군을 따라 거제에 간다.
1619년 10월 27일, 밥을 먹은 뒤에 도산서원에 갔다. 이도와 권 군도 갔다. 가는 길에 봉길을 만나 술을 몇 잔 마시고 서원에 도착하니 이미 저물었다.
안도전(安道全)
과
이극온(李克溫)
군이 역동서원에서 온 지 이미 며칠이 되었고, 유생들은
남연(南碝)
군을 포함하여 세 사람이었다. 내일 아침 두부를 만들어 봉길이 오면 대접하리라.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멀티미디어
관련이야기
출전 :
계암일록(溪巖日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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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령(金坽)
주제 : 식생활, 두부
시기 : 1603-09-08 ~ 1619-10-27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경상북도 안동시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김령, 이지, 자개, 여희, 구, 광하, 삼계서원 원장, 정보, 용보, 찰방, 덕여, 참, 이회숙, 판사, 상사, 이건, 이도, 오(俁), 치(偫), 두 생질, 김시량, 서숙, 이계어른, 당, 광석, 이치원, 이임경, 사수, 확, 최전, 최진방, 우택보, 이덕원, 김주우, 박군, 권군, 봉길, 안도전, 이극온, 남연
참고자료링크 :
조선왕조실록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김령
◆ 조선시대 두부
우리나라에 두부가 전래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목은집≫ 중의 <대사구두부래향(大舍求豆腐來餉)>이라는 시에 ‘두부’의 명칭이 처음 나온다. 이것으로 미루어 고려 말에 가장 교류가 빈번하였던 원나라로부터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에는 두부제조법이 더욱 발달하였다. ≪세종실록≫에는 명나라 황제가 조선에서 온 여인이 각종 식품제조에 뛰어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두부를 잘 만든다고 칭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 16년(1434)년 중국궁중에 두부를 포함한 반찬 만드는 여자를 보낸 기록이 있다. 조선에서 온 여자는 모두 음식을 규모 있고 민첩하게 잘 만들며 특히 두부 만드는 솜씨는 더욱 정교하여 명나라 황제가 칭찬하였다 한다. 이처럼 조선조 초기 우리나라 두부 제조 기술은 중국을 압도하고 있었다. 허균(許筠, 1569~1618)의 『도문대작(屠門大嚼)』에는 장의문(藏義門) 밖에 사는 사람이 두부를 잘 만드는 데 연하고 매끄러운 것은 무엇이라 말할 수 없다 하였으며, 허준(許浚)의 『동의보감』에 두부를 과식하면 배가 팽만하고 숨이 막히고 죽을 수도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안동 장씨(安東 張氏, 1598~1680)는 지금까지 알려진 것 중 가장 오래된 『규곤시의방(閨壼是議方)』이란 조리서에서 두부를 이용하여 탕, 지짐, 조림 등이 구체적으로 소개된 것으로 보아 두부로 다양한 음식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두부탕, 즉 연포갱(軟泡羹)에 대한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의 두부 제조기술은 일본에도 전해져서 최남선은 『조선상식』에서 ‘일본의 두부는 임진왜란 중에 적의 병량(兵糧) 담당관인 강부야랑병위(岡部冶郞兵衛)라는 사람이 조선에서 배워 갔다고도 하며 또는 경주 성장 박호인(朴好仁)이 잡혀가서 일본에서 두부제조를 시작한 것이 근세 일본 두부제조업의 시초라고 하기도 한다’고 쓰고 있다. 서민 사이에까지 널리 보급된 것은 마쇄에 쓰는 돌절구가 일반화한 조선시대 중반에 들어가고 나서이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계묘년(1603, 선조36) 9월 8일 맑음. 저녁에 이지(以志)·자개(子開)와 근시재(近始齋)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여희 및 구(坵)와 함께 갔다. 이지가 두부를 해서 이바지했다. 광하(光夏)도 왔는데 이날 밤 재사(齋舍)에서 함께 잤다.
갑진년(1604, 선조37) 4월 10일 아침에 정보·용보가 각각 술을 내왔으나 두 형들은 아직도 먹지 못하였다. 마침내 삼계서원으로 출발했다. 원장이 밥과 두부를 차려 놓았는데 나와 찰방·용보·우형(遇亨)이 자리를 같이했다. 날이 오시에 가까워질 무렵 두 형들은 돌아가고, 찰방 및 원장도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나와 용보는 낚싯대를 메고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종일 읊조렸다. ― 못에서 고기를 보고 즐기고, 섬에선 새를 희롱하니, 멀리 있는 사람이 그립기도 하여라.
경술년(1610, 광해군2) 4월 26일 밥을 먹고 다시 동쪽으로 나가서 잔도[棧路]를 지나 김생암(金生庵)에 이르렀다. 암자는 퇴락하여 무너지려고 하였으며, 굴 속에는 석순(石蓴)이 있고 폭포는 말라서 물방울만 떨어졌다. 오후에 다시 연대사에 도착하여 두부를 만들어 먹었다. 저녁때에 걸어서 산을 내려와 강을 건너 나부촌에서 유숙하였다. 밤에 덕여와 참이 강물을 막고 고기를 많이 잡았다.
을묘년(1615, 광해군7) 3월 13일 맑음. 병세가 조금 덜해졌고 오래된 약속을 감히 미룰 수가 없어서 밥을 먹은 뒤에 후조당(後彫堂)에 들러 이회숙(李晦叔)을 보고 마침내 운암(雲岩)으로 향했다. 판사·상사 두 형과 자개(子開)·여희·이지·이건·이도·회숙·오(俁)·치(偫) 두 생질·김시량 군·서숙·참이 모두 나란히 말을 타고 갔다. 강가 바윗돌에서 쉬고 구름서린 오솔길을 밟아가니 봄날은 따사롭고 봄빛이 한창이었다. 진달래며 개살구꽃이 바위 골짜기에 반쯤 피어 있었고 다른 곳은 아직 꽃이 피지 않았다. 저녁 무렵에 각자 가지고 온 술을 마시며 두부를 먹었고, 달빛 따라 산을 내려와 다시 강변 모래밭에서 술을 마셨다. 나는 가기는 갔으나 몸이 힘들고 피곤하여 시를 읊을 생각이 없어 안타까웠다. 돌아올 때 다시 말을 나란히 하고 집에 도착하니 밤이 깊었다.
을묘년(1615, 광해군7) 4월 8일 흐림. 이계(伊溪) 어른이 두 아들을 데리고 왔고, 여희와 당·광석이 계속 도착했다. 오후에 승방(僧房)에서 조촐하게 술을 마셨고 저녁에는 두부를 먹었다. 밥을 다 먹기도 전에 봉성 수령이 당도했다. 마주앉아 다정한 이야기를 밤이 되도록 끝도 없이 나누었으니 역시 즐거운 일이라 하겠다.
갑인년(1614, 광해군6) 4월 29일 맑음. 아침에 전문 흑초(箋文黑草)를 예조판서와 오 사재(四宰)께 아뢰고, 다시 우의정 댁에 갔다. 밥을 먹은 뒤에 찰방 어른이 보러 왔고, 향제와 향오도 왔다. 저녁에는 버드나무 아래에서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병진년(1616, 광해군8) 9월 5일 맑음. 아침에 두부를 차렸다. 밥을 먹은 뒤에 짚신에다 지팡이를 짚고 동쪽으로 둘러서 오르는데 단풍든 녹라(綠羅)가 옷소매에 걸렸다. 반야대사(般若臺舍)에 도착해보니 바로 탑 봉의 허리춤으로 온 산의 빼어난 지세가 다 이곳으로 모여든다. 대 위로 기이하고 높은 암벽이 마치 춤추는 듯도 하고 날아오르는 듯도 하여 참으로 다른 세계였다. 누대에서 동쪽으로 몇 발자국 거리에 총명수(聰明水) 있고 치원암(致遠庵)이 또 그 남쪽에 있다. 산길은 매우 좁고 절벽은 만 길인데 굽어보니 쌍연암(㩳然庵)이 있었다. 암자 서쪽 벽 바깥 면에 퇴계 선생이 쓴 제명(題名)이 있는데 가정 갑자(1564) 초여름에 쓴 것이다. 선군도 선생을 모시고 유람 하셨고 동행한 여러 공들이 다 같이 나열하여 글을 지었다. 현인에 대한 경모와 선군에 대한 그리움에 나도 모르게 감탄하였다. 이전에 한강 정구(寒岡 鄭球) 공이 안동부사로 있을 때, 선생이 유람하신 자취가 황폐해 지는 것을 면하지 못 하게 되자, 집을 수리하고 단확(丹臒 : 단청)을 새로 칠하였으며 제명은 판각하여 보호하게 하였다. 이미 선생의 연고로 중수하였기에 벽 위에 남은 휘자(諱字)가 완연하여 마치 직접 가르침을 받는 듯 하니, 어찌 후인들이 감히 다시 유람한 기록을 여기에다 다시 Tm겠는가. 그럴 수 없을 것인데도 오점을 남긴 자들이 한 둘이 아니니 매우 놀랍고 탄식할 만하다. 암자 동북 모서리에 또 암자가 있으니 이름이 극일암(克一菴)이다. 극일암 위로 풍혈대(風穴臺)가 있다. 풍혈대 위에는 평평한 나무판자 두 개가 있는데 최고운(崔孤雲)이 앉았던 좌판(坐板)이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것은 세속의 무리들이 나무를 바꾸면서 그 이름만 남긴 것인데 지금에 와서는 하나의 기이한 일이 되었다. 여기서부터 안중암(安中庵)·영산전(靈山殿)·상청량사·하청량사등 여러 암자들은 고요하고 그윽하며 맑고 적막하여 모두 다 들러보고 유람할 만 했지만 요사(寮舍) 들이 모두 비어있어 애석하였다. 치원암 앞에는 오래된 회나무가 백 척 높이로 솟아 풍상을 견디며 울창하고 푸르렀다. 아! 이와 같이 재목으로 쓸 만한 나무인데도 깊은 산중에 버려진 채 세상에서 알아주는 자가 없으니 애석하다. 그러나 쓰임과 쓰이지 못함은 나무에게는 손해되거나 이득 될 것은 없다. 넘어질 것을 부축하고 위험한 것을 지탱해 주는 것으로 말한다면 이해의 절실함이 큰집(大廈)에 관계될 뿐이요 나무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이하 결문.
무오년(1618, 광해군10) 11월 14일 맑음. 방잠 재사에 가서 나무 베는 일을 보았다. 정 형과 참이 같이 갔다. 저녁에 두부를 만들어 사수(士修)․여희(輿熙)․확(確)․서숙(庶叔)․광석(光碩) 등을 불러 함께 먹었다. 먹기를 마친 뒤 돌아오니 이미 밤이었다. 들으니, 최전이 고강하는 것이 아이들 장난 같아서 비록 구두를 떼지 못하더라도 모두 실격을 면했다고 한다. 최전의 아비 진방(鎭邦)은 충주 이동(吏童)으로 과거에 급제한 본래 미미한 부류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것이다.
기미년(1619, 광해군11) 9월 17일 맑음. 오시에 이지와 서숙이 왔다. 박 군이 다시 이곳에 도착할 것이므로 여러 친척들이 만나 보고자 해서였다. 유사 우택보(禹擇甫 : 택보는 우처인(禹處仁)의 자)가 와서, 이덕원(李德遠)이 오란다고 전하였다. 이는 이덕원이 향교의 상유사(上有司)로서 김주우(金柱宇)를 위하여 두부를 만들었는데, 우리들에게까지 주려고 하는 것이니 내가 어찌 가겠는가? 사양하여 보냈다. 박 군이 와서 술상을 차렸다. 여희와 이지도 술을 가지고 왔다. 이날 밤에 다시 박 군의 첩을 오라고 하여 이별주를 나누었다. 내일은 그 낭군을 따라 거제에 간다.
기미년(1619, 광해군11) 10월 27일 맑으나 바람이 불었다. 밥을 먹은 뒤에 도산서원에 갔다. 이도와 권 군도 갔다. 가는 길에 봉길을 만나 술을 몇 잔 마시고 서원에 도착하니 이미 저물었다. 안도전(安道全)과 이극온(李克溫) 군이 역동서원에서 온 지 이미 며칠이 되었고, 유생들은 남연(南碝) 군을 포함하여 세 사람이었다. 내일 아침 두부를 만들어 봉길이 오면 대접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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