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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따라 여주 유람 - 근년에 축조되었으나 지키는 이 없는 파사성
1605년 2월 1일,
신륵사
를 다 둘러본 뒤 배에 오르니 날씨가 매우 추워서 술 한 잔 먹는 사이에
여강(驪江)
을 지나갔고 곧 여주(驪州) 앞이었다. 강폭이 넓어 1, 2리는 됨직하고 강 언덕 건너 가옥에 사람 형체가 오락가락하는데 그 풍경이 흥원창보다 배나 아름다웠다. 해담(海潭)을 지나 이십탄(二十灘)에 이르니 여울은 얕으나 폭은 매우 넓었으며,
이포(梨浦)
에 이르니 강 왼쪽에 촌락이 있는데 바로
모제(慕齋)
선생이 살던 곳이었다.
파사성(婆娑城)
을 지나갔는데 성은 근년에 축조했으나 지금은 지키지도 않고 방치해 놓아 조정에서 한 헛된 짓에 또 한 번 탄식할 만했다. 서임탄(西任灘)에 이르니, 여울의 폭은 매우 넓고 여울 아래는 깊은 담(潭)을 이루었고, 반야탄(般若灘)을 지날 때는 파도가 갑자기 치솟아 뱃전을 때렸다.
양근군(楊根郡)
을 지나
대탄(大灘)
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찬바람이 종일 불다가 저물녘에는 더욱 매서워져 여울가의 마을에서 잤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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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이야기
출전 :
계암일록(溪巖日錄)
전체이야기보기
저자 :
김령(金坽)
주제 : 과거시험, 유람, 여주
시기 : 1605-02-01 ~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경상북도 안동시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김령
참고자료링크 :
조선왕조실록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김령
◆ 파사성
파사성은 경기도 여주군 대신면 천서리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으로, 사적 제251호이다. 지정면적 35,504㎡, 높이 6.25m이다. 한강 중류의 여주군 이포(梨浦)에서 2㎞쯤 내려가면 강 건너 동쪽으로 해발 230.5m의 파사산이 위치하고 있다. 파사성은 바로 이 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축성한 야산의 산성으로 성벽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
현지의 전설에 의하면, 신라 파사왕(80∼112) 때에 축성하여 파사성이라는 명칭이 생겼으며, 산도 파사산이라 이름하게 되었다는데 문헌적 근거는 없다. 한편, 고대 파사국(婆娑國)의 옛터로 구전되어오고 있으나 역시 근거는 없으며 성의 초창 상황도 알 수 없다.
<대동여지도>에는 파사성이라 기록되어 있어 조선 후기 문헌에 보임을 알 수 있다. 또, 조선시대의 역사적 사실이라고 전해지는 것은 제14대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유성룡(柳成龍)의 발의에 따라 승군총섭(僧軍總攝) 의암(義巖)이 승군을 동원하여 둘레 1,100보의 산성을 수축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사실을 뒷받침하듯이 현재의 성벽을 살펴보면 초창기의 성벽과 그뒤 여러 차례에 걸쳐 수리한 때의 성벽을 구별할 수 있다. 성벽 중 가장 높은 곳은 6.25m이고, 낮은 곳은 1.4m이다.
이곳에는 출입문 자리가 남아 있는데 천서리를 면한 곳에 동문지(東門址)가 있고, 양평군 개군면 상자포리를 면한 곳에 남문지(南門址)가 남아 있다. 동문지에는 옹성문지(甕城門址)가 있고, 남문지에는 문루(門樓)를 세웠던 고주형초석(高柱形礎石) 2개와 평주초석(平柱礎石) 등이 남아 있다.
성곽의 일부는 한강 연안에까지 돌출되어 있어 상류·하류를 한눈에 감시할 수 있는 요충지라 하겠다. 파사산과 이 산성은 마치 원추형을 연상시키는데, 이 산에 따른 다른 산봉이 없이 우뚝 자리한 산이어서 이 산정에 오르면 눈 아래에 사방이 굽어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강 상류·하류를 감시하며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는 천연적 요새라 하겠는데, 이렇듯 낮은 산에서도 멀리 용문산이 바라보인다.
파사성 정상부 서북쪽 바로 밑에는 축성의 주인공인 옛 장군의 초상석각이라 일컫는 조각이 있는데, 이것은 고려시대의 마애여래상이다. 거대한 암벽에 오목새김한 것으로 상호(相好:부처님의 훌륭한 용모)와 동체의 균형이 잘 맞아 당시의 마애불로서는 주목되는 불상이다.
이 마애불의 부근에는 평평한 대지가 있어 기와조각이 수습되는데 이곳 파사성과 관계 있는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모재선생은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이다. 조선시대 사림과 성리학의 성장에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을사년(1605, 선조38) 2월 1일 신륵사(神勒寺)는 곧 벽사(甓寺)라는 절인데, 이전 왕조 고려 때부터 큰 사찰로 일컬어져 왔으며, 내가 을유년(1585)에 이곳을 들른 적이 있었다. 아침에 백온 일행과 동대(東臺)에 올라갔는데, 까마득한 바위벽이 우뚝 서 있으며 그 아래로는 긴 강이 흐르고, 대(臺) 위에는 사리탑이 있어서 크고 웅장했다. 중이 말하기를, “나옹(懶翁)선사가 이 절에 머물 적에 깨달음을 얻고 성불하자, 그의 사리(舍利)를 이곳에 묻었더니, 강물에서 신룡(神龍)이 나타나 사리를 빼앗아 갔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바위 위에 남아 있다”고 했다. 나는 그의 말이 터무니없고 망령되어 믿을 수 없었다. 이 큰 탑의 북쪽에 신륵사대장각기(神勒寺大莊閣記)가 새겨진 비석이 있었는데 고려시대 때 세운 비였다. 구법당(舊法堂) 앞에도 탑들이 있었는데 각각 운룡(雲龍)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이 솜씨가 더할 나위 없이 교묘했다. 절 뒤에 독처럼 생긴 석종(石鍾)이 있었는데, 중이 말하기를, “나옹선사의 두개골을 넣어 놓았다”고 했다. 그 앞에는 장명등(長明燈)이 있고, 거기에는 돌을 새겨 전당(殿堂), 인형(人形), 용갑(龍甲 : 홍색 잠자리) 등을 조각해 놓았는데, 목각 솜씨가 아무리 정교하다 하더라도 아마 이것에는 미칠 수 없을 것이다. 그 왼쪽에는 비석이 있었는데, 비문은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지었고, 글씨는 한수(韓脩)가 썼으며, 비석의 후면에는 시주한 사람들의 이름을 죽 새겨 놓았는데 조정의 사대부와 부녀자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명확하게 다 알아 볼 수 있었다. 아! 이 비석에 충효(忠孝)와 현덕(賢德)의 공업(功業)을 기록하게 했더라면 장차 길이 불후의 이름을 드리울 텐데, 단지 쓸데없이 비용을 들여 귀천과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이름을 실어 놓았으니, 고려시대에는 이교(異敎)를 숭상함이 지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문이 매우 청아하고 교묘했는데 목은(牧隱) 또한 인간 세상의 사람이니, 어찌 시속의 추세를 붙좇지 않았겠는가? 다 둘러본 뒤 배에 오르니 날씨가 매우 추워서 술 한 잔 먹는 사이에 여강(驪江)을 지나갔고 곧 여주(驪州) 앞이었다. 강폭이 넓어 1,2리는 됨직하고 강 언덕 건너 가옥에 사람 형체가 오락가락하는데 그 풍경이 흥원창보다 배나 아름다웠다. 해담(海潭)을 지나 이십탄(二十灘)에 이르니 여울은 얕으나 폭은 매우 넓었으며, 이포(梨浦)에 이르니 강 왼쪽에 촌락이 있는데 바로 모제(慕齋)선생이 살던 곳이었다. 파사성(婆娑城)을 지나갔는데 성은 근년에 축조했으나 지금은 지키지도 않고 방치해 놓아 조정에서 한 헛된 짓에 또 한 번 탄식할 만했다. 서임탄(西任灘)에 이르니, 여울의 폭은 매우 넓고 여울 아래는 깊은 담(潭)을 이루었고, 반야탄(般若灘)을 지날 때는 파도가 갑자기 치솟아 뱃전을 때렸다. 양근군(楊根郡)을 지나 대탄(大灘)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찬바람이 종일 불다가 저물녘에는 더욱 매서워져 여울가의 마을에서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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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륵사 강월헌
신륵사 강월헌
신륵사 강월헌 현판
신륵사 극락보전과 다층석...
신륵사 극락보전 현판
신륵사 극락보전 측면
신륵사 극락보전 안내판
신륵사 극락보전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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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륵사 삼층석탑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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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포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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