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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처럼 낫지 않는 폐병, 각종 보약과 지인들의 병문안
김령은 1606년부터 1607년 하반기까지 폐질환을 앓는다.

1606년 7월 20일 용궁(경상북도 예천)에서 동당시를 치르고 예안으로 돌아가는 25일부터 비가 많이 와서 어렵게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8월 4일 오후에 날씨가 추워지고 몸이 편치 않더니 6일부터 몹시 아프더니 8일에 김봉길, 평보 형 및 사수 형제, 이지 형제, 이실 등과 술을 마시고 바람을 쐬고는 몸이 더욱 상해서 심하게 아프기 시작한다. 10월 30일경에는 천식 증세가 나타난다.
지인들이 병문안을 오고, 진피, 생강, 오미자, 꿩, 산수유 등의 각종 약재와 한약을 보내준다. 김령은 계속해서 죽력, 보중익기탕, 보중탕, 이진탕, 팔미환, 익위승양탕, 현토단고본환, 활담탕 등을 복용한다. 병이 낫기 전까지 각종 제사에 참여하지 못해 아내가 지내고, 대문밖 출입을 하지 못한다.

1607년 1월 3일에는 갑자기 과식을 한 것같이 배가 더부룩하고 답답하며 가래침과 기침도 나왔다. 결국 가래를 뱉으니 피가 섞여 나왔다. 28일에는 콧물과 가래침이 여전히 나오고 구들이 차가워서인지 대변이 묽어지더니 밤에는 내리 설사를 했다.

병은 더욱 악화되어 3월 2일에는 약을 물어보기 위해서 영천(榮川)에 사람을 보냈다. 병이 든 뒤로 손바닥과 발바닥에서 나는 열이 불과 같고, 오줌이 붉고 등골도 땅기고 귀에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는 것이 하루도 그렇지 않은 날이 없었다. 담이 결리는 증세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원기(元氣)도 소모되고 몸이 고달팠다. 이러한 증세 때문에 기운이 위로 치솟아 숨이 가팔라지고 우려를 자아내게 하여 몸이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어깨의 통증도 그치지 않으니 근심스럽고 염려되는 마음이 만 가지나 된다.

4월 13일에는 가슴속이 더부룩하여 고통스러웠다. 소금 끓인 물을 큰 대접으로 1대접 마시고 가래를 조금 토해 냈지만 몸만 고달플 뿐 소용이 없었다.

5월 18일에는 가슴속이 답답하게 막히는 것이 마치 물체 덩어리가 휘저으면서 올라오는 것 같았는데 한참 있으니 곧 진정되었다.

6월 11일, 새벽에 몽정(夢精)을 했다. 염려되고 염려된다. 저녁에 뒤뜰로 나가니 담기(痰氣)가 더부룩하게 차서 올라왔다.

윤 6월 7일, 어제 저녁부터 치통 증세가 있었는데 오후에 다시 증세가 시작되었다. 살구씨를 구워 물고 있으니 잠시 통증이 멎는 것 같았으나 가슴 속에 담기(痰氣)가 꽉 찼다. 내일 영천에 사람을 보내기 때문에 편지를 쓰는데, 갑자기 오한과 열이 나고 몸이 오싹한 것이 아주 불편했다. 밤새도록 괴롭게 시달렸다. 지극히 걱정되고 걱정된다.

7월 19일, 재채기와 콧물이 그치지 않아 자못 괴롭다. 핫옷(솜옷)에다 겹옷을 덧입었다. 오시(오전11시~오후1시)쯤 재채기와 콧물이 더욱 심해져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가슴 속도 불쾌했다. 밤에 다시 재채기와 콧물이 나오고 이를 틈타 가슴 속에서 천식이 발작하여 먼저 목구멍이 막히고 호흡이 몹시 민망해져 거의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가슴속이 답답하고 먹먹하여 고통이 극심한데 자리에 누우니 코가 막히고 가슴속이 더부룩하며 가래 꿀꺽거리는 소리가 밤새도록 지속되고 호흡이 곤란하여 잠을 잘 수 없었다. 몹시 고민되고 피곤하다.

7월 28일, 김령은 밥을 먹은 뒤 용보가 돌아가고 피곤하여 자다가 저물녘에 일어나 점심을 먹었다. 조금 있다가 배가 불편하여 뒷간에 가서 내리 설사를 했다. 배가 칼로 내젓는 듯하여 참을 수 없었다. 대개 아침에 소고기 일여덟 점을 먹고, 밥 먹을 때 또 선지를 먹고, 다시 편육을 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큰 병을 앓고 난 뒤라 기운이 손상되고 위가 약해진 탓에 곽란(癨亂)을 만나고 설사를 여러 번 하고나니 한기가 들고 떨리며 바로 현기증이 나는 것이 거의 수습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마음과 기운이 아주 괴롭고 피곤하고 눈앞이 급하여 가래가 더 생기는 것은 생각할 겨를도 없어서 양미수(粱米水)를 많이 마셨으나 토할 수 없었다. 급하게 서숙을 불러와서 살펴주도록 부탁했다. 판사·생원 두 형 및 대이, 덕유(德裕) 등이 모두 왔다. 밤에 두세 차례 설사를 했다.

9월 20일, 병의 증세가 조금 덜하다. 예제(禰祭)를 처음에는 오늘로 정했다가 병이 낫질 않아 더 몸을 조리하면 직접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내일로 물렸다. 하지만 21일에는 병으로 아직도 몸이 고달파 제사를 지낼 수 없어서 집사람을 시켜 대신 지내게 했는데, 몹시 마음이 편치 못하다. 아침에 음복을 나누어 보냈다.
이후 질병은 완화되었고 1609년 8월 17일, 병을 앓은 뒤 처음 내성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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