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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건립 위한 세금, 기둥 하나 세우기도 전에 탕진되다
1607년 6월 10일, 지난해에 대궐을 건립하는
면포(綿布)
를 백성들에게 거두었는데, 토지 1결(結)당 1필(疋)로서, 곱기는 여덟~아홉 새에 이르고 길이는 40자[尺]에 이르렀다.
재력을 다해 겨우 마련해서 납부했었는데, 이때 와서 들으니 조정에 납부한 뒤 역군(役軍)들의 노임으로 지급한 것은 모두 닷새짜리의 보통 품이라 한다. 아래의 서리들이 모두 사사로이 농간하여 바꿔치기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폐단이 이와 같으니 탄식하고 탄식할 일이다.
윤 6월 29일, 듣자 하니 대궐을 짓는데 이전에 일삼은 일이라고는 오직
서까래
뿐이었고, 들보와 기둥과 같은 큰 재목은 하나도 실어 오지 못했다 한다. 그런데 민간에서 징수한 면포는 이미 탕진되었다고 한다.
왕자, 대군 및 유력한 재상가들은 그들이 직접 부리는 종들을 이용해서 거짓으로 역군을 만들었는데, 역군들은 종이 아니면 뇌물을 바친 자들이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역군으로 참여하는 것을 금지했다고 한다. 이른바 역군이라는 자들은, 세력을 믿고 빈둥거리는 자들이라서 비록 일하는 장소에 가지 않더라도 버젓이 베를 받아 챙기는 자들이다.
처음부터 백성의 피와 기름을 짜내니 바랄 것이 있겠는가. 궁궐 하나 중건하는데 단지 쓸모없는 비용만 들이니, 기둥 하나도 세우지 못하고 재물은 이미 탕진되어 버렸다고 한다.
장역 제조관(掌役提調官)이 여러 번
계청(啓請)
하여 일을 우선 정지하고 뒷날을 기다려 경영하자 했다. 그러나 수상인
류영경(柳永慶)
이 들어주지 않고 공사를 날로 심하게 독촉하며, 백성의 근심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뜻대로만 해버렸다고 한다. 류영경(柳永慶)이 국사를 맡은 지가 이미 6년이나 되었는데, 그가 행한 탐욕스럽고 비루하며 아부하는 짓을 말로 하자면 정말 입만 더럽히게 된다. 공연히 분수도 모르고 나라 일을 걱정하는 격이지만 근심되는 마음만은 견딜 수가 없다.
이보다 앞서, 나라에서 경복궁을 먼저 중건하려고 터를 고르고 일을 이미 마쳤으나, 전 현감 이국필(李國弼)이 상소하길, “경복궁은 공력이 원대하게 들어 시일로 보아 일을 시작할 수 없으니, 청컨대 먼저 창덕궁을 중건하소서.”라고 하자,
전교(傳敎)
에, “옳은 일이다.”라고 하여, 마침내 창덕궁을 중건하기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에 기지 제조관(基址提調官) 등이 말하기를, “
종묘
는 15칸인데, 인가(人家)의 칸수로 헤아려 보면 80칸이고, 조회를 받는 정전도 백여 칸이니, 청컨대 우선 먼저 종묘 및 정전을 건립하고 그 외의 별전 및 궐내의
백사(百司)
는 후일을 기다리도록 하소서.”라고 했는데, 수상이 역시 들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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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이야기
출전 :
계암일록(溪巖日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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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령(金坽)
주제 : 궁궐 건립, 세금 탕진
시기 : 1607-06-10 ~ 1607-06-29 (윤)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경상북도 안동시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김령, 류영경, 이국필, 장역제조관, 기지제조관
참고자료링크 :
웹진 담談 15호
조선왕조실록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김령
◆ 경복궁의 재건/창덕궁
경복궁의 중건은 1865년(고종 2) 4월 2일 대왕대비인 신정왕후가 대원군의 건의를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졌다. 영건도감을 설치하고 도제조에 조두순(趙斗淳)·김병학(金炳學)을 임명하고 제조로 흥인군(興寅君) 이최응(李最應)·김병기(金炳冀)·김병국(金炳國)·이돈영(李敦榮)·박규수(朴珪壽)·이재원(李載元)·임태영(任泰瑛)·이경하(李景夏)·허계(許棨)·이현직(李顯稷)·이주철(李周喆)이 차하(差下)되었다.
4월 4일에 개기(開基)를 위한 영건고유제(營建告由祭)를 거행하고 4월 8일에 대왕대비는 10만 냥을 중건역비로 하사하였으며, 4월 12일에 경복궁을 중건할 터전의 친심(親審)이 있었다. 이에 앞서 4월 8일에 궁성을 쌓고 5월 2일에는 광화문을 비롯한 궁성문의 상량 날짜를 정하였다.
담장과 문의 석축부분은 임진왜란 때 재화를 면하고 남아 있어서 이것들을 헐고 다시 지어야 하였다. 중건공사에 소용되는 경비를 원납전(願納錢)이라 하여 거두었는데, 4월 말까지 1차로 수납된 것은 일반인이 바친 75만 7086냥 4전 9푼과 왕족들이 기부한 7만 6450냥이었다.
이후 이 기부금의 징수는 계속되었으며, 6월 20일에 강녕전·연생전의 정초(定礎), 10월 9일에 입주(入柱), 10월 10일에 상량하였다. 10월 24일에는 함원전(含元殿)·인지당(麟趾堂)이 입주되고, 11월 16일에는 상량이 있었으며 12월 24일에는 천추전(千秋殿)의 정초가 있었다.
이듬해 3월 6일에는 큰 사건이 일어났는데, 5일 밤 이경(二更)에 동십자각 근처 훈국화사(訓局畵師)의 가가(假家)에서 불이 나서 목수간 800여 칸과 다듬은 재목들이 타버리고 말았다. 1867년 2월 10일에도 불이 나서 재목을 불태웠다. 그래도 공사는 진척되어 3월 27일에 경회루의 상량이 준비되고 5월 2일에는 수정전(修政殿) 상량문의 제술관(製述官)을 선정하였다.
8월 18일에는 전각과 문의 이름들을 지었고, 11월 8일에는 완성된 건물의 당호(堂號)를 지었다. 11월 14일에 백관들이 경복궁 출입시 승지(承旨)는 영추문을, 문관은 정문인 광화문의 홍예문 중 동쪽문을 이용하게 하고 무관은 서쪽으로 드나들도록 제도화하였다.
1868년(고종 5) 6월 10일 경복궁 재건공사가 사실상 끝난 단계에 이르렀으므로 임금의 이어(移御)에 대비하여 병조에서 입직(入直)을 준비하였고, 7월 2일에 드디어 임금은 대왕대비를 모시고 새 궁궐에 이사하니 비로소 경복궁은 정궐(正闕)로서의 위엄을 다시 갖추게 되었다.
1869년 9월 16일에 경복궁 재건을 위하여 설치되었던 영건도감이 철폐되었는데, 이 때에 집계한 원납전 등의 내용은 내하전(內下錢) 11만 냥, 단목(丹木) 5,000근, 백반 5,000근, 왕족이 바친 돈이 34만 913냥 6전, 일반인들의 원납전 727만 7780냥 4전 3푼과 백미 824석이었다. 준공된 전각은 합계 5,792칸 반이었다.
처음에는 이궁(離宮)으로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정궁(正宮)인 경복궁이 소실되고 조선 말기에 복구될 때까지 300여년간 역대 임금이 이 궁에서 정사를 봄으로써 본궁의 구실을 하였다.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고 하여 ‘동관대궐’ 또는 ‘동궐’이라고 불렸다.
창덕궁이 창건된 것은 조선 전기에 한양천도(漢陽遷都)가 있던 때로 태종이 즉위하여 도성을 한양으로 다시 옮기면서 동시에 이궁의 조성을 명하여 1405년(태종 5)에 완성하였다. 이때 도성에는 이미 종묘(宗廟)·사직(社稷)과 더불어 정궁인 경복궁이 조성되어 있었으므로 이 궁의 조성은 하나의 별궁(別宮)을 도성 안에 두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창덕궁 안에는 외전과 내전에 수많은 건물들이 있었으며, 이들 건물은 시대에 따라 새로 나타났다가 없어지기도 하고 소실되었다가 몇 차례고 다시 지어지기도 하는 등 많은 변화를 거쳐왔다. 이들 건물 가운데에는 세조 때 건물명칭이 정해진 이래 조선 말기까지 그 명칭을 그대로 이어온 건물들이 있으며, 이 건물들이 중심전각을 이루어 왔다.
정문인 돈화문, 정전인 인정전과 그 주변의 인정문·숙장문·진선문, 편전인 선정전 그리고 내전에서는 정침인 대조전과 뒤에 편전으로 이용된 희정당, 그 밖에 징광루(澄光樓)·집상전(集祥殿)·보경당(寶慶堂)·옥화당(玉華堂)·소덕당(昭德堂) 등이 그것이다.
이 건물들은 대체로 조선 전기에 지어졌으나 임진왜란 때 모두 불에 타 없어졌으며, 광해군 때에는 다시 재건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중 대부분은 다시 몇 차례의 소실과 재건을 반복하면서 결국 사라진 것도 있고 지금까지 남은 것도 있다.
현존하는 건물의 건립 연대를 보면, 광해군 때 재건되어 현재까지 남아 있는 건물, 즉 창덕궁에서 가장 오랜 건물은 정문인 돈화문이다. 이 건물은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과 함께 광해군 때 세워진 궁궐의 정문으로 건축사적 가치가 높다.
그 다음, 인조반정 때 소실되었다가 1647년에 다시 지어진 건물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편전인 선정전이다. 당시 이 건물은 인경궁(仁慶宮)의 건물을 이건하여 지은 것으로 조선 중기의 건축양식을 남기고 있다.
인정문과 인정전은 각각 1745년(영조 21)과 1804년에 중건되어 현재에 이르는 건물로 궁내에서는 돈화문과 선정전에 이어 비교적 오랜 건물이다. 내전의 전각들은 인조 때에도 소실되었다가 재건되고 순조 때에도 그러하였으며, 마지막으로 1917년에 소실되었다가 2년 뒤에 재건된 건물들이다. 따라서 최근에 조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 재정의 15~25%를 쏟아 붓는 토목 사업을 벌이자니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재원을 조달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궁가(宮家, 왕자나 공주 집안)와 권문세가의 방납이나 탈법이 만연한 상태에서 재원 조달은 오롯이 자영농을 중심으로 한 양민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어떻게 조달했을까? 참조가 될 만한 다음 사료를 보자. 인조반정 뒤에 반포한 교서의 일부이다.
모든 건축의 토목공사의 부역과, 조도사(調度使, 가외 세금을 징수하던 관리)의 가혹한 수탈도 일체 없앤다. 그밖에 뱅성을 침해하고 나라를 병들게 하던 귀척(貴戚, 임금의 친척)과 권세가가 가진 모든 전장(田庄)에 대한 세금 감면과 부역 면제도 아울러 조사한 뒤 취소하며, 내수사(內需司, 왕실 재정 담당 관청)와 대군방(大君房)에게 빼앗겼던 백성들의 농토도 하나하나 돌려준다.
위에서 나온 ‘조도사’가 열쇠이다. 궁궐 건축에 필요한 비용, 특권층의 방납과 그들에 대한 세금 면제로 생긴 재정 결핍을 조달할 특별 관원이 조도사나 독운별장(督運別將, 세금 운반 감독관)이었다. 궁궐 공사가 광해군대 내내 계속되었으므로, 조도사는 광해군 초반부터 파견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세금만 거둔 것이 아니라, 온갖 만행을 저지르기도 하여 그로 인한 피해도 컸다.
전라감사가 보고하기를,
“독운별장 우찬순은 독운의 일을 핑계삼아 사족의 집에 마구 들어가서 부녀자를 강간하고 심지어 상가(喪家)의 궤연(几筵)을 봉안한 데를 버젓이 철거시키고 음행을 하는 장소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역졸을 함부로 형별하고 역말을 함부로 타고 다닌다고 합니다.” 했다. (끝내 우찬순에게 벌을 주지 않았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정미년(1607, 선조40) 6월 10일 맑음. 박경행(朴京行)이 지나면서 들렀다. 평보 형도 같이 와서 한나절을 담화했다. 권시중(權是中)도 왔다. ○ 지난해에 대궐을 건립하는 면포(綿布)를 백성들에게 거두었는데, 토지 1결(結)당 1필(疋)로서 곱기는 엳아홉 새에 이르고 길이는 40자[尺]에 이르렀다. 재력을 다하여 겨우 마련하여 납부했었는데, 이때 와서 들으니, 조정에 납부한 뒤 역군(役軍)들의 노임으로 지급한 것은 모두 닷새짜리의 보통 품이라 한다. 대개 아래의 서리들이 모두 사사로이 농간하여 바꿔치기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폐단이 이와 같으니 탄식하고 탄식할 일이다. 저녁에 내성에서 종 진동(眞同)이 왔다. ○보중탕(補中湯)을 복용했다.
정미년(1607, 선조40) 윤6월 29일 맑음. 참(墋)이 보러왔다. 오후에 예천(醴泉) 김선(金譔) 군이 들렀다. 듣자하니, 대궐을 짓는데 이전에 일삼은 일이라고는 오직 서까래뿐이었고, 들보와 기둥과 같은 큰 재목은 하나도 실어오지 못했는데, 민간에서 징수한 면포(綿布)는 이미 탕진되었다고 한다. 왕자(王子)․대군(大君) 및 유력한 재상가들은 그들이 직접 부리는 종들을 이용하여 거짓으로 역군(役軍)을 만들었는데, 역군들은 종이 아니면 뇌물을 바친 자들이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역군으로 참여하는 것을 금지했다고 한다. 이른바 역군이라는 자들은 세력을 믿고 빈둥거리는 자들이라서 비록 일하는 장소에 가지 않더라도 버젓이 베를 받아 챙기는 자들이다. 처음부터 백성의 피와 기름을 짜내니, 바랄 것이 있겠는가. 궁궐 하나 중건하는데 단지 쓸모없는 비용만 들이니, 기둥 하나도 세우지 못하고 재물은 이미 탕진되어 버렸다고 한다. 장역 제조관(掌役提調官)이 여러 번 계청(啓請)하여 일을 우선 정지하고 뒷날을 기다려 경영(經營)하자 하였으나, 수상(首相)인 류영경(柳永慶)이 들어주지 않고 공사 독촉을 날로 심하게 하며, 백성의 근심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뜻대로만 해버렸다고 한다. 류영경이 국사를 맡은 지가 이미 6년이나 되었는데, 그가 행한 탐욕스럽고 비루하며 아부하는 짓을 말로 하자니 정말 나의 입만 더럽히게 되고, 공연히 분수도 모르고 나라 일을 걱정하는 격이지만, 근심되는 마음만은 견딜 수 없다. 이보다 앞서, 나라에서 경복궁(景福宮)을 먼저 중건하려고 터를 고르고 일을 이미 마쳤으나, 전 현감 이국필(李國弼)이 상소하기를, “경복궁은 공력이 원대하게 들어 시일로 보아 일을 시작할 수 없으니 청컨대 먼저 창덕궁(昌德宮)을 중건하소서.”라고 하자, 전교(傳敎)에, “옳은 일이다.”라고 하여, 마침내 창덕궁을 중건하기로 바꾸었다고 한다. 이에 기지 제조관(基址提調官) 등이 말하기를, “종묘(宗廟)는 15칸인데, 인가(人家)의 칸수로 헤아려 보면 80칸이고, 조회(朝會)를 받는 정전(正殿)도 백여 칸이니, 청컨대 우선 먼저 종묘 및 정전을 건립하고 그 외의 별전 및 궐내의 백사(百司)는 후일을 기다리도록 하소서.”라고 했는데, 수상이 역시 들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 도민(都民)들이 서애(西厓)의 서거 소식을 듣고 모두 거리에 모여 곡하고 저마다 재물을 내어 부의(賻儀)를 전했다고 하고, 서리들도 그렇게 했다고 하니, 이러한 일은 우리 조정 2백여 년 이래로 실로 들어보기 어려운 일이다. 조정의 중신들도 모여서 곡했는데, 정승을 지냈던 사람들 중에 상사에 참가한 사람은 이항복(李恒福)·윤승훈(尹承勳)이고, 그 이하의 사람들은 다 기록할 수 없다. 그들은 각각 재물을 내어 부의를 했다고 한다. 수상 류영경 및 참판(參判) 황섬(黃暹)은 쌀 2되를 내었다고 한다. 류(柳)와 황(黃)은 모두 소북인(小北人)으로 지금 바야흐로 집권하고 있는 사람들인데, 이러한 일들이 무엇이 괴이할 것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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