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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을수령과 지방토호의 기싸움
1607년 3월 13일, 들으니, 우리 읍의 새 수령이 풍산의 안담수라고 했다.

윤 6월 13일, 우리 읍의 수령 안담수의 첩은 읍내 사람 권학(權鶴)의 딸이다. 안담수가 그의 첩의 친족인 권산해(權山海)와 노비 문제로 소송을 했는데, 안담수가 위세로 누르려 하자 산해가 공손하지 못한 말을 했다. 안담수가 크게 화를 내어 산해를 차꼬에 채워 옥에 가두고 토호가 수령을 능욕했다며 감사에게 보고했다.
산해의 처 동생인 봉화 사람 변흠(邊欽)이 감사가 진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그 이유를 호소했다. 감사가 바로 호소를 받아들여 예안에서 올린 첩정의 끝에 뎨김[題音]했다.
“현감의 처사가 아주 이치에 맞지 않으므로, 속히 산해를 풀어주고 또 현감은 높은 직위가 아니므로 사건은 반드시 서로 소송해서 결말을 보아야 하기 때문에 영천군(榮川郡)으로 이관하는 것이 옳다.”
이렇게 처분하자 안담수가 크게 부끄러워했다. 감사의 공평하고 정직함과 지혜롭고 사리에 밝음이 이와 같았다.

9월 27일, 들으니 우리 고을 수령 안(安) 공이 고강(考講)할 유생을 불렀는데, 주패(朱牌)를 사용했다고 한다. 해괴하고도 우습다.

1608년 2월 27일, 듣자하니, 평보 형이 우리 고을 수령 안담수에게 욕을 보았다고 한다. 지난 23일 우리들이 함께 제천 표숙댁에 갔을 때, 이지(以志)가 자기의 집에 관아에서 손님이 왔다는 말을 듣고 먼저 일어서서 나갔다. 우리들은 돌아올 때 이지를 불러내었는데, 관아에서 온 손님도 따라 나왔다. 그는 즉 우리 고을 수령의 처조카이고, 이지에게는 내외종간이 되는데, 이름이 이할(李硈)이다. 땅바닥에 앉아 잠시 있다가 헤어졌다.

이할이 여러 가지 말을 지어내어 두 형을 헐뜯었다.
“김 아무개가, ‘예안 수령의 오랜 벼슬살이는 완전히 오천(烏川)에 힘입었다’라고 말했다.”고 하기에 이르렀다. 수령이 판사 형에게 크게 화를 내면서 다른 사람을 향해 나무라고 욕설을 했는데, “내가 설사 그를 잡아와 매를 치더라도 그가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하기에 이르렀다.
평보 형이 이 사실을 듣고 먼저 관아로 가서 사죄했다. 그러나 수령이 못 본 척하고 오래도록 세워 놓고 욕을 보인 뒤 물러가라 했다고 한다. 아주 해괴한 일이다.

2월 28일, 판사 형이 관아에서 돌아왔다. 역시 이전의 일 때문에 고을 수령에게 사과했다고 했다. 수령이 어제 평보 형을 대하던 것과 같이 욕보였다고 한다. 또한 수령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대가 딸을 시집보낼 때 내가 그대에게 부조를 했으니, 어째서 서로 저버리겠는가.”
그의 이 말이 더욱 비루하다.

1608년 3월 3일, 듣자 하니, 판사·생원 두 형과 김헌이 손도에 처해졌다고 한다. 우스운 일이다. 우리 고을 수령이 이할(李硈)의 참소를 믿고서, 두 형이 자기를 헐뜯었다고 해서 날로 분노가 심해져, 유향소를 소집해서 벌줄 것을 논의하려 했다. 하는 수없이 한 달 동안 손도로 벌주어 대충 때웠다. 제천 표숙도 유향소의 자리에 참석했다.
김헌의 일은 이러하다. 수령과 아주 친근한 안척이 어느 날 수령에게 와서 말했다.
“들으니, 예안 사람들이 자네가 탐욕스럽다고 해서 자네 이름을 ‘안탐수(安貪手)’로 고쳐 부른다더군. 또 국상이 나서 성복하기도 전에 드러내놓고 고기를 먹고, 매사냥을 가서 꿩도 잡았다고 하는데, 들어보니 해괴하기가 이를 데 없네. 이 일이 정말 어떻게 된 일인가?”
수령이 그 소문의 출처를 물었다. 안척이 이횡성(李橫城)의 아들 벽(擘)에게 들었다고 대답했다. 수령의 생각으로는, 예안 사람들이 주촌(周村) 사람들과 절친한 사람은 오직 김충의(金忠義) 의원(義元)의 아들 헌(瓛)일 것이라고 여겼다.
수령이 이러한 이유로 김헌에 대해 매우 화를 냈다. 이로 인해 하는 수없이 헌도 벌을 받게 되었는데, 헌도 사실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일이었다.

3월 11일, 요즘 우리 고을 수령이 본인이 국상에 고기를 먹었다는 소문 때문에 여러 번 유향소를 책망하자, 유향소는 공문을 보내어 서촌(西村)에 묻게 되었다. 전체 동네가 두려워하면서 유사 두 사람을 정해서 안척에게 보내 질문했다. 오가면서 변명하는 즈음에, 그 말이 더욱 전파되어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5월 24일, 들으니, 우리 읍의 수령 안담수가 쫓겨났는데, 사헌부의 계(啓) 때문이었다고 한다. 죄목은 인물됨이 혼미하며 용렬하고, 이웃 고을에 모욕을 당하고, 더구나 청렴하지도 못해서 읍민들이 몹시 원망하고 고통스러워한다는 내용이라 한다.

1608년 5월 27일, 들으니, 영천의 전적(典籍) 박선장(朴善長)이 우리 읍의 수령이 되었다고 한다.

1614년 11월 1일, 안담수가 이강(李茳)의 말을 듣고 그의 아들을 동당시에 보냈다. 이는 앞서 이강이 안담수 집에 가서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가 제술해서 자네 아들 이름을 써넣어서 합격시키겠다.”
안담수가 그것을 믿었으니 가소롭고 가소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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