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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지들의 모임, 참석자들은 잔을 돌리려다 꾸중을 듣고, 노비들은 술에 물을 탔다 곤장을 맞다
1607년 윤 6월 23일, 아침에
참의(參議)
이기성(李器成)이 안부를 물어왔다. 제천 표숙을 문안하러 이 참의(李參議) 집으로 갔는데, 여러 사람이 번갈아 드나들어 다 기록할 수도 없었다.
이지 무리들과 같이 관아 동헌에 나아가니, 영공이 몸이 좋지 않아 손님을 사절하다가 오랜 뒤에 나와 동헌방으로 가서 김령에게 말하기를, “사는 곳이 멀지 않아 군(君)을 자주 만나보게 되니 다행일세만, 뜻대로 안되어 한탄스럽네.”라고 하였다.
도사(都事) 정사신이 술을 가져와 따르고 판관도 들어와 참석했다. 권문계(權文啓),
송라(松羅)
의 찰방
이박(李煿)
및 다른 사람들도 참여했다. 어제 영공의 친지들의 모임에 왔던 사람들도 모두 들어와 뵈었다.
좌수(座首)
권성(權誠)
·
품관(品官)
권양손(權良孫)
등도 정 도사처럼 잔을 돌리려 하자 영공이 몹시 화를 내었고, 또 아랫것들이 술에다 물을 탔다가 곤장을 맞기도 했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멀티미디어
관련이야기
출전 :
계암일록(溪巖日錄)
전체이야기보기
저자 :
김령(金坽)
주제 : 생활, 술에 물을 탄 노비
시기 : 1607-06-23 (윤) ~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경상북도 안동시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제천 표숙, 김령, 이기성, 정사신, 권문계, 이박, 권성, 권양손, 아랫것들
참고자료링크 :
조선왕조실록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김령
◆ 조선시대 음주 습관
금주령
금주령은 조선시대 큰 가뭄이 들거나 흉작·기근이 있을 경우 국가에서 술 마시는 것을 금하는 법령이다.
이러한 기간에 근신 절제함으로써 하늘의 노여움을 풀고 굶주린 백성들을 위로하며 식량과 비용을 절약할 목적으로 행하여졌다. 1392년 조선개국 직후 흉작으로 인하여 금주령을 내린 것을 비롯하여 여러 대에 걸쳐 빈번하게 시행되었다.
특히, 태종 때는 거의 매년 내려졌고, 성종과 연산군 때도 자주 행하여졌다. 조선 후기에는 전국적인 금주령은 거의 없게 되었으나, 1758년(영조 34)에는 큰 흉작으로 궁중의 제사에도 술 대신 차를 쓰는 등 엄격한 금주령이 발표되었고, 왕이 홍화문(弘化門)에 나가 직접 백성들에게 금주윤음(禁酒綸音)을 발표하였다.
이 법령은 주로 가뭄이 심한 봄·여름에 반포되어 추수가 끝나는 가을에 해제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때로는 10∼12월에도 시행되는 경우가 있었다. 또, 보통은 중앙정부에서 결정되어 발표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지방관찰사들의 건의로 시행되기도 하였다.
이 법령이 반포된 기간에도 음주나 양조가 허용되는 예외적인 경우가 있었는데, 그것은 국가의 제향, 사신접대, 상왕(上王)에 대한 공상(貢上), 그리고 백성들의 혼인·제사 및 노병자의 약용으로 쓰이는 경우였다. 또, 술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빈민들의 양조행위도 묵인되었다.
금주령은 지방에서는 비교적 엄격하게 준행되었으나, 서울의 사대부·관료사회에서는 잘 지켜지지 않았고 단속도 사실상 어려웠다. 다만, 공·사의 연회가 금지되고 과도한 음주·주정 등의 행위가 제재되는 정도였다.
<관련기사>
<강원일보> [언중언]`수작(酬酌)문화'
조선시대에 가장 멋지게 술을 마신 인물로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문신 손순효(孫舜孝)가 꼽힌다. 명필가였던 그는 아무리 고주망태가 되어도 명나라에 보내는 국서를 완벽하게 써냈다. 임금이었던 성종은 음주가 지나쳐 하루 석 잔만 마시라고 은잔을 내려보냈다. 대주가였던 그는 이 은술잔을 얇게 펴 최대한 늘려서 술을 실컷 마시며 호기를 마음껏 펼쳤다.
▼자고로 음주문화는 나라마다 다르다. 미국 사람들은 자기가 마실 만큼 자신이 따라 마신다. 바로 `자작(自酌)문화'다. 구라파에서는 잔을 서로 맞대고 부딪친다. 건배를 즐기는 `대작(對酌)문화'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나 술잔을 주고받기를 즐긴다. 바로 `수작(酬酌)문화'다. 지구촌에서는 수작문화권의 나라가 흔치 않다. 그래서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인들은 공손하게 술잔을 주고받는 수작문화에 익숙지 못해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 수작문화의 연원은 삼국시대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 화랑들이 한솥의 차를 나누어 마시며 공생공사를 다진 차례(茶禮)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 전쟁과 같이 목숨이 풍전등화격이었던 상황에 술잔을 주고받은 사기(史記)가 나와 피를 나누는 의식의 다름이 아님을 보여준다. 실제 전통사회에서는 관청에 대포(大匏)라는 큰 술잔을 비치해 날을 잡아 상하 차별 없이 술잔을 돌려 마심으로써 일심동체를 다졌던 풍습이 있었다.
▼연말연시를 맞아 술자리가 부쩍 늘고 술집마다 “부어라 마셔라”가 지천이다. 직장인들 사이에 그 여진도 만만치 않다. 이렇게 되다 보니 얼마 전에는 `술잔 돌리기'가 도마에 오르더니 올해는 주당들 사이에 `폭소클럽(폭탄주 소탕 클럽)'까지 생겨나고 있다. 이에 질세라 여러 가지 토속주의 머리글자를 갖다 붙인 새로운 스타일의 `섞어주'가 개발돼 과음을 부추긴다. 이름도 `백두산' `소백산맥' `설산주'에서부터 `천국의 눈물'까지 별나다. 연말연시의 술자리와 시장 선점을 위한 주류업계 경쟁과 현실도피의 소산이 아니기를 바라게 된다.
기사입력 2005-12-29 <김길소 논설주간>
<서울신문> [만나고 싶었습니다] ‘술-한국의 술문화’ 내는 이상희 前장관
“조선시대에도 술 섞어 마셔…요즘 폭탄주는 풍류 실종”
꽃은 반쯤 피었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활짝 핀 꽃은 이내 시들어버리니 그 모습은 허망할 뿐이다. 술을 마시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적당히 취했을 때 멈춰야지 흠뻑 취하면 추한 몰골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혹자는 이취(泥醉)의 주범으로 폭탄주를 지목하기도 한다. 그러나 폭탄주야말로 소통의 촉매라고 믿는 무리도 적지 않다. 시인 송종찬은 폭탄주에 사뭇 진지한 헌사를 바친다. “…위벽이 타는 폐허의 잿더미/너와 나의 경계를/무너뜨릴 수만 있다면”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위벽을 태워야 마음의 울타리를 허물 수 있을까. 알코올 소비량 세계 수위를 다투는 음주대국 대한민국. 이제 그 달갑잖은 명성을 걷어내야 한다. 양이 아니라 질로 승부하는 진정한 음주문화 선진국으로 나아가야 한다.
지난 주말 서울 낙원동 선출판사에서 이상희(77) 전 내무부 장관을 만났다. 한국의 술문화를 훤히 꿰뚫고 있는 그는 새달 중 ‘술-한국의 술문화’라는 200자 원고지 8000여장 분량의 초대형 저서를 낼 예정이다. 그래서인지 한껏 부푼 표정이었다.
●폭탄주는 반문화의 전형
보물급 희귀본을 포함해 6만여권의 진적(珍籍)을 소장하고 있는 국내 최고의 장서가. 그에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은 더 이상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숨을 쉬듯 자연스러운 생활의 일부다. ‘술-한국의 술문화’는 바로 그런 독서의 내공과 자료의 힘이 어우러진 결과다. 이 백과전서 같은 저서를 통해 그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우리나라는 어렸을 때부터 ‘소학(小學)’을 통해 술 마시는 예절을 가르쳤습니다. 주례(酒禮)를 무엇보다 중시했지요. 그러나 전래의 고상한 술문화가 요즘 폭탄주라는 반문화에 의해 훼손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조선시대에도 여러 종류의 술을 섞어 마시는 음주문화가 있었어요. 고전소설 ‘삼선기(三仙記)’를 보면 평양감사가 대동강에 유람선을 띄우고 잔치를 베푸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 등장하는 술이 수십종이에요. 청소주, 황소주, 계당주, 과하주, 감홍로, 천일주…. 풍류가 증발된 지금의 ‘속도전’ 폭탄주 문화와는 차원이 달랐지요. 자유당 때까지만 해도 없던 폭탄주 문화가 이렇게 유행하게 된 건 아마도 1960년대 군사문화의 영향이 큰 것 같아요. ”
그는 폭탄주는 결코 무용담의 소재가 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내가 내무부 차관 때니까 옛날 얘기지요. 당시 정석모 내무부 장관, 김성기 법무부 장관과 함께 술자리를 했어요. 김 법무 장관이 국회에서 곤욕을 치른 걸 위로하기 위해서였지요. 그때 김 장관은 앉은 자리에서 18잔의 폭탄주를 거뜬히 마셨습니다.” 폭탄주 대가로 알려진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와 고시 동기이기도 한 그의 말에 따르면 진정한 ‘폭탄주 지존’은 고(故) 김성기 전 법무부 장관이다.
폭탄주 못지않게 그가 경계하는 것이 술잔을 주고받으며 마시는 수작(酬酌)이다. “정이 오가는 수작문화 자체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지만 잔을 주고받다 보면 음주 속도가 빨라지니 과음과 폭음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지요. 수작문화는 한국 특유의 주법입니다. 술잔을 주고받는 음주습관이 남아 있는 곳은 우리 말고는 아프리카의 이름조차 없는 어느 종족밖에 없다고 해요. 일본도 한때 수작문화가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졌다고 합니다. ”
●주도유단론은 억지이론
우리의 과장된 술문화 담론에 대한 비판도 잊지 않는다. 술꾼을 18단계로 나누는 조지훈 시인의 이른바 주도유단론(酒道有段論)에 대해 그는 “억지로 짜맞춘 도식적 이론”이라고 비판한다. 굳이 계급을 매기자면 주졸(酒卒) 주사(酒士) 주걸(酒傑) 주장(酒將) 주선(酒仙) 주신(酒神) 등 6단계 정도가 적당하다는 것. 그는 “소주 서너잔의 주졸”이다.
‘술-한국의 술문화’의 집필 과정은 곧 자료와의 싸움이었다. “이 책에는 모두 1200여점의 사진 혹은 그림 자료들이 실려 있어요. 일제시대 맥주광고 여성 모델 사진 등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것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백이 술에 취해 강에 비친 달을 건지는 그림이나 용수를 장대에 꽂아 매단 주막 사진 같은 것은 구하느라 무척 애를 먹었지요. 돈도 만만찮게 들었어요.” 그는 놀이딱지만한 일제시대 술광고 모델 사진을 50만원에 샀고, 중국 죽림칠현 가운데 한 명인 유령의 주덕송(酒德頌)을 옮겨쓴 한석봉의 탁본은 경매에서 200만원에 구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런 투자를 결코 아깝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 고을의 정치는 술맛으로 알고 한 집안의 일은 장맛으로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술은 그 나라의 정치 수준까지 가늠해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적 척도라고 할 수 있지요. 술문화를 바로 알리는 데 필요한 자료라면 거만의 돈을 준들 무엇이 아깝겠어요. ”
그는 지금부터 꼭 10년전 1500쪽이 넘는 대작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넥서스)를 펴내며 “한국 정신문화사의 신기원을 이룩했다.”는 평을 들었다. 꽃과 술. 이것은 그의 저술작업의 양대 축이자 인생의 화두다. 하지만 그가 탐닉하는 것은 꽃이나 술 그 자체가 아니다. 술을 좋아하지도 화초를 애써 가꾸지도 않는다. 중국의 시인 도연명이 현(絃) 없는 악기를 뜯으며 그 분위기를 즐겼듯 술을 굳이 마시지 않아도 스스로 도도한 취흥에 빠져들 수 있는 경지라고나 할까. 이제 눈이 침침해 책 읽기도 힘들다는 그는 안총(眼聰)이 허락하는 한 계속 저술활동을 하고 싶다고 했다.
김종면 편집위원 jmkim@seoul.co.kr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정미년 (1607, 선조40) 윤6월 23일 아침에 참의(參議) 이기성(李器成)이 안부를 물어왔다. 나는 제천 표숙을 문안하러 이 참의(李參議) 집으로 갔는데, 여러 사람이 번갈아 드나들어 다 기록할 수도 없었다. 이지 무리들과 같이 관아 동헌에 나아가니 영공이 몸이 좋지 않아 손님을 사절하다가 오랜 뒤에 나와 동헌방으로 가서 나에게 말씀하기를, “사는 곳이 멀지 않아 군(君)을 자주 만나보게 되니 다행일세만, 뜻대로 안되어 한탄스럽네.”라고 하였다. 도사(都事) 정사신(鄭士信)이 술을 가져와 따르고 판관도 들어와 참석했다. 권문계(權文啓), 송라(松羅)의 찰방 이박(李煿) 및 다른 사람들도 참여했다. 어제 영공의 친지들의 모임에 왔던 사람들도 모두 들어와 뵈었다. 좌수(座首) 권성(權誠)·품관(品官) 권양손(權良孫) 등도 정 도사처럼 잔을 돌리려 하자 영공이 몹시 화를 내었고, 또 아랫것들이 술에다 물을 탔다가 곤장을 맞기도 했다. 정오쯤 이지와 같이 잠깐 밖으로 나와 이 참의 집에서 밥을 먹는데 관에서 갑자기 불러 급히 갔더니 영공이 이미 밥상을 차려놓고 손님들과 마주하여 있었다. 대개 아침밥이나 해는 벌써 정오가 넘었을 때였다. 매일 이와 같은 것은 손님들이 번다하게 많기 때문이었다. 영공이 나를 보고 말씀하기를, “그대들이 촌가에서 따로 밥을 먹는다고 하던데 주인에게 또한 부끄럽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영공이 휴식하러 들어가고 여러 사람들과 연정(蓮亭)에 갔더니 경망(景望 : 김백웅(金伯熊)) 어른과 금도제(琴道濟)가 보러왔다. 오후에 제천 표숙이 이 참의 집에서 관아로 와서 영공과 술잔을 나누고, 또 밥상을 차려 여러 사람들이 늘어 앉았다. 영공이 표숙에게 술을 권하다가 금새 취하여 방에 들어가 누웠다. 우리들은 모두 밖으로 나와 흩어졌다. 밤에 의정과 처소에서 함께 잤다. 경망 어른이 와서 이야기를 나누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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