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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걸하여 입에 넣은 작은 얼음 한 조각, 고소와 옥사로 번지다
1607년 윤 6월 18일, 지난달 11일에 이정회의 종이 그의 주인이 편지를 구하는 일로 예안에 왔다. 얼음 한 바리를 꺼내어 실어가서 시장에 재어놓고 사람들과 함께 부숴 먹을 예정이었다.
종 애상이 작은 얼음 조각을 구걸하여 입에 넣었는데, 정회의 종이 성을 내며 쥐어박자, 마침내 싸움이 붙어서 어수선해졌다. 정회의 종과
주촌(周村)
서고모 댁의 종이 한패가 되어 그들이 정회의 글을 받아 수령에게 호소했다.
13일 밤에 관에서 보낸
사령
이 애상을 잡아가서 옥에 가두었다. 15일에 근복(近卜)을 시켜 수령에게 소지를 올리게 했는데, 수령이 애상에게 매를 21대나 사납게 쳤다고 하니 우스운 일이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멀티미디어
관련이야기
출전 :
계암일록(溪巖日錄)
전체이야기보기
저자 :
김령(金坽)
주제 : 생활, 얼음, 노비 다툼
시기 : 1607-06-18 (윤) ~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경상북도 안동시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이정회의 종, 주촌(周村) 서고모댁의 종, 애상
참고자료링크 :
웹진 담談 6호
조선왕조실록
◆ 조선시대 얼음의 보관과 활용
조선의 얼음창고
1396년 조선의 수도 한양에 서빙고와 동빙고가 건설되었다. 동빙고에는 얼음 1만244정(丁), 서빙고에 13만4,974정을 보관했으므로 서빙고가 동빙고보다 13배 이상의 얼음을 저장했다. 동빙고의 창고는 1동이었던 것에 비해 서빙고는 8동이었다. 동빙고는 음력 3월 1일부터 가을 상강(霜降)까지 왕실의 제사에 필요한 얼음을 공급했으며, 서빙고의 얼음은 왕실과 고급 관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또 창덕궁 안에는 별도로 내빙고를 두어 궁궐의 얼음 수요를 맡았다. 얼음 창고는 예조의 속아문에서 관장했다. 관원은 제조(提調) 1명과 종5품 별좌(別坐), 정6품 별제(別提), 종6품 별제, 정8품 별검(別檢), 종8품 별검, 서리를 4명씩 빙고에 나누어 배치하여, 빙고에서 얼음의 보관과 반출을 관장했다. 또 동빙고에 얼음을 저장할 때는 제향에 올리는 얼음을 담당하는 봉상시의 관원도 감독했다.
얼음의 채취
당시 깨끗한 얼음을 얻기 위해 지금의 뚝섬까지 가서 한강의 얼음을 채취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얼음 채취는 매년 1월 소한과 대한 사이에 주로 이루어졌고, 얼음이 12㎝ 이상 얼었을 때 잘라내었다. 이 일은 군인들과 강촌 주민들이 국가의 부역으로 담당했다. 겨울에 얼음을 캐는 일은 매우 어려워, 동상에 걸리거나 빙판에 미끄러져 찰과상, 골절상을 입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겨울만 되면 빙고 부역을 피해 달아나는 사람도 있었다. 이 때문에 1423년 세종은 얼음을 캐고 저장하는 사람들(장빙고 역군)에게 술 830병, 어물 1,650마리를 하사하여 이들을 배려하기도 했다. 또 의원을 보내 얼음 캐는 군인의 동상을 치료한 기록도 있다.
캐낸 얼음은 가로 70?80㎝, 세로 1m 이상이 되도록 일정한 규격으로 맞추어 톱으로 썬 후에, 우마차를 이용해 석빙고로 옮겼다. 석빙고에 도착한 얼음은 볏짚과 쌀겨 등으로 포장하여 층층이 쌓았다. 대개 1만 개 이상에서 13만개까지 쌓았다고 한다.
얼음의 사용
석빙고에 넣어둔 얼음은 양력 3월 말인 춘분(春分)일에 개빙제(開氷祭)를 열어 출하해 10월 상강에 그 해의 공급을 마감했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예전(禮典)>의 ‘반빙(半氷)’ 조에는 얼음의 공급 및 사용처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이 규정하고 있다.
“해마다 여름철 끝달(음력 6월)에 여러 관사와 종친 및 문무관 중의 당상관(정3품 이상 관리), 내시부의 당상관, 70세 이상의 퇴직당상관에게 얼음을 나누어 준다. 또한 활인서의 병자들과 의금부, 전옥서의 죄수들에게도 지급하도록 한다.”
당상관 이상의 고위 관리들이 얼음을 받을 자격이 있었고, 환자들과 죄수들의 건강을 위해 얼음이 반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의 문신인 채수(1449?1515)는 한여름에 갈증이 심해, 찬 소주를 많이 마시고 기절을 했다. 집안사람들이 죽은 줄 알고 통곡하자, 순식간에 그가 죽었다고 소문이 났다. 그런데 그의 부인이 얼음을 깨어서 입에 넣자 날이 저문 후 채수가 깨어났다는 일화가 있다.
조선에는 종친들과 대신들, 각 관아에 나무로 만든 빙표(氷票)를 하사했다. 빙표를 장빙고에 가져가면 해당하는 만큼의 얼음을 내어주었다. 채수의 부인은 남편이 쓰러지자, 사람을 시켜 장빙고에 가서 얼음을 가져오게 하였을 것이다. 얼음을 내려주는 사빙(賜氷)은 고급 관직자에게 내려주는 특별한 혜택으로, 그것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얼음은 탐나는 물건이다. 때문에 장빙고의 얼음은 도적들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선조 18년(1585년) 8월에는 사헌부 정언 류덕수가 “서빙고의 얼음이 도둑까지 맞아 여름도 지나지 않았는데 거의 다 써 버렸다.”고 하며 이조에게 특별히 조사하도록 아뢴 바도 있다. 얼음의 저장과 반출은 엄격히 규제됐다. 만약 얼음의 보관을 소홀히 하여 저장한 얼음이 녹아 없어지면 파면시키는 등 빙고의 얼음은 엄격하게 관리되었다.
1454년 단종 2년에 사헌부에서는 ‘국가의 빙고에서 저장하는 얼음에 한도가 있어 신하들에게 골고루 나눠줄 수 없으므로 정1품에서 종4품의 대부(大父) 이상과 각사(各司)에서 얼음을 보관할 수 있게 하자’는 상소를 올렸다. 얼음을 받은 개인도 단기간 얼음을 보관할 창고를 두고 제사 등에서 사용했다. 18세기 영·정조 시대 이후에는 물동량의 왕래가 많았던 한강변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생선 보관용 얼음을 공급하던 개인 빙고가 존재했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정미년(1607, 선조40) 윤6월18일 맑음. 올해는 은어가 흔하여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망을 가진 사람은 실컷 먹어 물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 지난달 11일에 이정회(李庭檜)의 종이 그의 주인이 편지를 구하는 일로 예안에 왔다. 얼음 한 바리를 꺼내어 실어가서 시장에 재어놓고 사람들과 함께 부숴 먹을 예정이었다. 종 애상(愛上)이 작은 얼음 조각을 구걸하여 입에 넣었는데, 정회의 종이 성을 내며 쥐어박자, 마침내 싸움이 붙어서 어수선해졌다. 정회의 종과 주촌(周村) 서고모 댁의 종이 한패가 되어 그들이 정회의 글을 받아 수령에게 호소했다. 13일 밤에 관에서 보낸 사령이 애상을 잡아가서 옥에 가두었다. 15일에 근복(近卜)을 시켜 수령에게 소지를 올리게 했는데, 수령이 애상에게 매를 21대나 사납게 쳤다고 하니 우스운 일이다.
이미지
석빙고 전경
석빙고 입구
석빙고 정면
석빙고 환기구
석빙고 정면
그래픽
사람들이 모여서 얼음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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