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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와 풍류의 장, 정자 - 낚시와 술, 문학이 어우러지다
1603년 7월 2일, 김령은 상주 형과 여러 사람이 침류정에서 물고기를 잡았다.

7월 19일, 김령은 배용길 한림이 서울에서 돌아오면서 지나는 길에 탁청정에 들러 부르기에 즉시 보러 갔다. 오후에 배 내한(內翰, 한림의 다른 말)이 돌아갔다. 이날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였는데 비 때문에 종일 흩어지지 않았다.

8월 11일, 아침에 비가 그쳤다. 김령은 20리를 간 뒤 한강을 건넜다. 난리를 겪은 후 민가가 번성하고 왕래하는 배가 많아져서, 비록 옛날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강가의 촌락 곳곳마다 담장이 이어지고, 왕래하는 사람이나 물화도 옛날 태평한 때의 모습이 조금씩 보이고 있었다. 밥을 지어먹은 뒤 제천정에 오르니, 정자는 터만 남아 있고 강산은 옛날과 다름없으니 감개가 절로 일어났다. 김령이 어린 시절 와 본 후 지금 다시 이 정자에 올라오게 되었다.

을유년(1585) 선친께서 복천의 현감으로 계셨을 때, 어버이를 모시고 압구정에서 유숙한 뒤 남쪽으로 내려간 적이 있었는데, 이제 20년 세월이 흘러 세상 일이 홀연히 바뀌게 되었다. 동쪽으로 압구정을 바라보니, 제천정 옛터가 더욱 회포를 불러일으켰다.

1604년 4월 2일, 비가 어제처럼 왔다. 아침에 계화가 다시 지난번의 운(韻)으로 화답시를 김령에게 보내왔다. 오후에 비가 잠시 그치자 김령은 찰방과 같이 송암정에 가서 계화를 초청했다. 계화가 술병을 들고 나왔고, 조금 있다가 권중성과 권응순도 이르렀고, 권계도 술을 가지고 왔으므로 밤에 대화를 오래도록 했다.

4월 5일, 경망 어른은 이 날 탑대에서 동갑 모임을 한다고 했다. 영천의 황열·황성두 분이 이 동네 길을 거쳐 간다고 하여, 찰방 형제 및 전 형이 술병과 술통을 가로채기 위해 모의하고 종을 시켜 길에서 두 분을 기다리게 했는데, 두 분은 이미 종을 지나친 뒤였다. 이에 전 형이 나타나 가로채려 하자, 두 분이 더 이상 길을 가지 못하고 마침내 송암정에 들르게 되었다.
김령과 찰방 및 용보도 따라 갔더니 권중성 및 류계화·김백온이 먼저 자리해 있었다. 전 형이 낚아챈 술로, 주인이 마침내 술잔을 돌리며 서로 희희낙락거렸다. 중성 및 찰방도 술을 가지고 와서 수작을 했다. 두 분은 날이 저물어 탑대로 갔다. 저녁 무렵에 전 형이 청암정으로 가고, 김령과 중성·계화도 잠시 갔다가 왔다.

1606년 1월 7일, 저녁에 자개가 석천정에 와서 하인을 보냈다. 김령과 금도제가 즉시 가서 세 사람이 현아(縣衙) 근처에 벌여 앉아 저마다 가져온 술로 가득 부어 실컷 마셨다. 산천엔 눈과 얼음이요 새로 돋은 달이 밝은데, 자개가 종의 처를 시켜 가곡 ‘춘천불한(春天不寒, 봄날은 춥지 않네)’을 부르게 했다. 밤이 깊어 가는 줄을 알지 못했다.

1609년 9월 28일, 맑았으나 싸늘했다. 김령은 성 무주, 숙명, 계명 등과 함께 걸어서 청원정으로 나갔다.

1610년 윤3월 7일, 흐리고 따뜻하며 비가 올 듯하였다.
김령은 정보·권축과 함께 석천정에 나가서 시 한 수를 지어 읊고 내일 문수산에 놀러 가기로 약속하였다.

윤 3월 15일, 김령은 영천(영주)으로 떠났는데 군내에 이르니 환자 때문에 어수선하였다. 강 영공은 만나지 못하였고 구학정에 이르니 경치가 좋았다. 강 영공은 사암에 있었다. 오후에 누님의 집에 도착하였다.

윤 3월 25일, 맑음. 선당에서 밥을 먹었다. 밥을 먹고 돌아오다가 석현에 이르러 산 위에서 잠시 말을 내렸다. 춘양에 이르러 한수정을 방문한 진사 이종강을 만나보았다. 공보의 집에 이르니 밥을 차려 놓았다. 저녁에 유곡에 도착하여 선생의 위판종묘에 배향하는 일로 오늘이나 내일 사이에 예관이 올 터이므로 선비들이 모여 있다는 말을 들었다.

4월 24일, 고산은 강물이 맑고 절벽이 솟아 있다. 밥을 먹고 물을 건너가 금씨의 정자를 감상하였는데, 퇴계 선생의 시가 있고 정자의 형세가 좋았다. 도로 건너와서 강물을 따라가니 바위 벼랑에 맑은 물이 흐르고 지나는 곳마다 모두 좋았다. 길에는 청석이 많았다. 나부에 이르러 강을 건너니 바로 동였다. 성을 쌓고 나무를 베어내었는데 독용이라고 이름하였고, 산길을 오 리쯤 가면 성문에 이른다. 연대사에 들어가서 월대에 앉으니 기이한 봉우리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절에 도착하여 조금 쉬었다가 시왕전·보문암을 지나 반야대에 이르니, 그 높이가 만 길이어서 온 산의 형승이 다 드러난다. 치원암은 퇴계 선생의 제명으로 중수하였고, 돌아가신 김령의 아버지의 제명도 있다. 치원대는 최치원 신선이 다녀간 유적이다. 상청량과 하청량을 거쳐 반야대에 다시 내려와 앉았다가 절에 도착하니 날이 이미 캄캄하였다.

1611년 4월 19일, 김령은 일찍 일어나 향사에 나가서 학봉묘를 배알하였다. 재실의 당우가 모두 갖추어졌는데 앞쪽의 난간은 강물에 임하였고, 서쪽으로 오 리를 나가면 백운정에 이르는데 김홍주(金洪州)의 정자이다. 자못 훤칠하고 시원하게 연못가에 서 있는데 솔숲의 경치가 선찰(仙刹)보다 더 낫다. 김 홍주의 표자를 만나보았다. 드디어 강물을 건너 고개를 넘고 다시 개울을 지나 여강서원에 도착하였다. 서원이 을사년 홍수에 무너져서 다시 지어 매우 좋았는데 양호루는 더욱 크고 웅장하였다.

1611년 10월 8일, 김령은 묘산의 북쪽을 돌아서 안동에 이르렀다. 내일 일족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이다. 귀래정에 들러서 감상하고 있노라니 주인 이몽태가 술을 내어 오고 시를 지어달라고 하기에 전에 지어 두었던 두 수를 써서 주고, 다시 붓을 달려 한 수를 더 지어 주었다. 불을 밝히고 강을 건너서 두 형과 북문 밖에서 함께 잤다.

1613년 4월 2일, 김령은 조곡을 경유하여 내려와 오 영공(吳令公) 댁에 갔다가 다시 박 도사의 하한정에 도착하니 박 어른이 술을 권하였다. 진사(進士) 장무부(張茂夫)가 김령을 찾아서 전 형 집에 왔다가 만나지 못하자 먼저 이 정자에 도착해 있다가 서로 만났다. 저녁에 전 형 집으로 돌아왔다. 이날 경상우도 동당 방목을 보니 여희필(呂姬弼)이 수석을 하였고, 영천 선비로 한성시에 참방한 사람은 4명이라고 한다.

1614년 6월 29일
안개가 짙게 끼다. 아침에 문경현의 마포원을 지나 신원에서 밥을 지어먹었다. 오시에 토잔천로를 지나며 말에서 내려 걸어가자니 희양산성은 헛되이 설치된 꼴이라 매우 우스웠다.
거듭 깊은 시내를 건너 수십 리를 가서 산양에 이르니, 높은 언덕의 소나무 숲 아래로 멀리 너른 들이 펼쳐졌다. 안장을 풀고 옷을 벗은 채로 그 위에 누워서 쉬었는데, 그 마을에 사는 효중의 종이 점심을 차렸다. 오후에 말에 올랐더니 타는 듯한 더위를 견딜 수가 없었다. 청원정을 지나서 중명(仲明) 형 집에 도착하였다. 김령이 온 것이 뜻밖이었지만, 매우 위안이 되고 후련해 하는 것 같았다. 효중과 함께 잤다.

1615년 3월 2일
비가 내렸다. 전 형이 손님들에게 술을 권하여 아침부터 오시까지 끊임없이 술잔이 오갔다. 매화 가지에 처음으로 꽃망울이 터졌다고 전 형이 김령에게 시를 부탁하여 몇 수를 구점(口占)하였다.
효중이 사람을 보내 편지를 전하며 거듭 성암정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다짐하였고 봉길도 서찰을 보내와 오늘밤 꼭 만나고 싶다고 하였다. 비가 내려 출입을 방해하지만 조금이라도 개면 당연히 갈 것이라고 답을 보냈는데, 봄비는 부슬부슬 저녁이 다 가도록 그치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효중 등이 오지 않을지도 모르고, 만일 온다면 반드시 다시 심부름꾼을 보내어 부를 것이기에 가려던 것을 그만두고 박상지와 함께 자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4월 5일, 김령에게 아침에 이지가 침락정으로 놀러 가자고 전갈을 보내왔다. 밥을 먹은 뒤에 평보 형·효중·자개 그리고 이지 삼형제와 나란히 말을 타고 침락정으로 갔다. 때는 어린 잎새들이 처음 푸른빛으로 물들어 맑은 경치가 참으로 고왔다. 이지와 이도와 김령이 모두 술을 가져갔는데, 저녁이 되어 약간 취한 채로 배를 띄워서 내려왔다. 이날 권수지(權守之) 영공이 노천(蘆川)에 와서 사람을 보내어 안부를 물으면서 서로 바라보일 만큼 가까운 곳이니 만나자고 하였기 때문이다. 수지 영공도 배를 타고 올라와 두 배를 서로 마주 대어 놓고 실어온 술로 술잔을 주고받는데 말을 타고 온 손님이 있었으니 바로 김자첨(金子瞻)이었다. 서로 만나 매우 기뻤지만, 날은 이미 저물고 강가의 길도 어슴푸레해져 마침내 여러 사람들과 말에게 길을 맡긴 채로 돌아왔다. 자첨이 다시 조용히 보자고 하고 효중도 그게 좋다고 하여 일휴당(日休堂)으로 들어가 장등 불을 켜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평보 형과 자첨 등은 모두 곤하게 자고 있었으니 밤이 깊었음을 알 수 있었다.

1616년 2월 10일, 아침에 서윤이 보러 와서 술잔을 들었다. 오시가 되니 중군도 오고 독운관(督運官) 심율(沈栗)도 왔다. 김령이 취중에 서윤 류도와 시 몇 수를 주고받았다. 오시에 기자정에 가보았는데, 서윤과 판관 심 공이 다 모여 우물물을 길러 맛보기도 하였다. 이날 바람기가 매우 사나웠지만 서윤이 우물가에 술자리를 마련하라 명하였다. 중사도 왔다. 저녁 무렵에 연광정에 올라갔는데, 긴 강과 넓은 들이 아득히 끝이 없어 우리나라에서는 제일가는 풍경이었다. 심 판관도 따라왔다. 조금 있다가 서윤이 도착하여 술상을 내오고 잔을 돌렸다. 바람이 사나워서 처음엔 방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서 정자에 올라갔다. 저녁 무렵에 중군도 와서 단란함은 밤까지 이어졌다. 이 날은 밥은 한 톨도 내오지 않았다.

1618년 2월 2일, 잠깐 비가 내렸다. 밥을 먹은 뒤에 천성(川城)으로 돌아왔다. 효중(孝仲)이 편지를 보내 내일 석천정에서 만나 이야기하자고 약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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