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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류굴, 아무도 그 끝을 보지 못하다
울진산수기(蔚珍山水記)
성류굴(聖留窟)
절은 바위벼랑 아래 긴 시냇가에 있는데, 석벽(石壁)이 깎아지른 듯 천 척(尺)이다. 절벽에 작은 구멍이 있는데 ‘성류굴’이라 한다. 굴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고 또 어두컴컴하여 촛불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다. 절의 중을 시켜 횃불을 들고 인도하게 하고, 또 고을 사람 가운데 많이 출입해본 자에게 앞서고 뒤따르게 하여 들어갔다. 구멍이 난 입구는 좁았지만 4~5보쯤 기어 들어가니 조금씩 넓어졌다. 일어나 수십 보를 걸어가니 평지가 있는데 수 묘(畝)가 된다. 좌우에 있는 돌의 모양이 특이하다.
또한 걸어서 수십 보쯤 가니 굴이 있는데 굴의 입구에 비해 더욱 좁아서 엎드려 기어서 갔다. 그 아래는 흙탕물이 있었는데 자리를 깔아 젖음을 막았다. 7~8보를 걸어가니 조금 널찍한데 좌우가 더욱 기이하여 혹은 당간의 깃발 같고 어떤 것은 부도 같았다. 또 십 수 보를 가니, 돌이 더욱 기괴하고 그 모양이 더욱 여러 가지여서 표현할 수가 없다. 그 당간의 깃발과 부도 같은 것이 더욱 길고, 넓고, 높으며 크다. 또한 걸어서 4~5보를 가니 불상 같은 것이 있고 고승 같은 모양을 한 것도 있다. 또한 연못은 매우 맑은데 그 넓이가 수 묘가 된다. 가운데에 두 개의 돌이 있는데 하나는 깨끗한 떡 같고, 다른 하나는 수레바퀴 같다. 그 위와 곁에 드리워진 깃발 모양의 덮개는 모두가 오색이 찬란하다.
처음 생각엔 종유석이 엉긴 것이어서 그다지 단단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지팡이로 두들기니 각각 소리가 나는데 그 장단을 따라 청탁이 있어 마치 편경 소리와 같았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연못을 따라 들어가면 더욱 기괴하다.”라고 하나, 이산해는 이곳은 세속 사람이 함부로 구경할 곳이 아니라고 여겨 서둘러 나왔다. 그 양 옆에 구멍이 많은데 사람이 잘못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 그 사람에게 굴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아무도 그 끝까지 가 본 자가 없습니다. 어떤 이는 평해군(平海郡) 바닷가에까지 도달할 수 있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대개 그곳은 여기서 30여 리의 거리이다.
처음 들어갈 때 그을리고 젖을까 염려되어 아이종의 옷과 수건을 빌려서 들어갔다. 나온 뒤에 옷을 바꿔 입고 세수하고 양치하니 마치 꿈에 화서에서 노닐다가 화들짝 깬 듯하였다. 일찍이 시험 삼아 생각해보니, 조물주의 오묘함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많다고 여겼는데, 국도(國島)와 이 굴에서 더욱 그런 면을 보게 되었다. 이것은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인가? 아니면 일부러 이렇게 만든 것인가? 자연히 된 것이라면 그 기변의 교묘함이 어찌 이렇듯 지극한가. 일부러 만든 것이라면 아무리 귀공이나 신력으로 천만세를 다했기로서니 또한 어떻게 이런 지극한 경지에 이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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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울진산수기(蔚珍山水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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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창흡(金昌翕)
주제 : 유람, 산수
시기 : ( 미상 )
장소 : 경상북도 울진군
일기분류 : 유산일기
인물 : 김창흡
참고자료링크 : (참고자료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 성류굴 연혁과 이야기
성류굴(聖留窟)은 경상북도 울진군 근남면 구산리에 위치한 석회동굴이다. 천연기념물 제155호. 길이 800m. 일명 선유굴(仙留窟)·장천굴(掌天窟)이라 한다. 성류굴을 부르는 이름에는 세 가지가 있다. 먼저 그 경치가 우아하고 신선들이 놀던 곳이라는 뜻에서 선유굴(仙遊窟)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신라의 화랑인 영랑·술랑·남랑·안상 등 네 명의 화랑이 굴속에서 놀았다고 하여 선유굴이라 불렸다고 한다. 또한, 임진왜란 때 성류사란 절이 이 부근에 있었는데 왜병들에 의하여 절이 완전 소실되었다. 이때 성류사에 안치되어 있던 불상들을 이곳 굴로 피난시켰으며, 따라서 불성(佛聖)이 머무르는 곳이라 해서 성류굴로 개칭하게 되었다. 『울진군지』에는 장천굴(掌天窟)이라 불렸다고 기록이 되었다. 동굴 앞을 흐르는 맑은 물이 산과 나무가 어우러진 계곡 아래쪽에 위치하며, 동해로 흘러드는 왕피천(王避川)의 동안(東岸)에 위치하고 있다. 관동팔경 중의 하나인 왕피천 입구에 위치한 망양정(望洋亭)과는 3㎞ 정도 떨어져 있으며, 굴 입구는 앞이 확 터져 있어서 아름다운 절경을 이루고 있다. 동굴의 내부 온도는 약 15~17℃로서 연중 거의 변화가 없고, 습도는 늘 축축한 90~95%를 유지하며, 동굴 내의 수온은 15~16.5℃ 정도이다. 성류굴은 왕피천에서 흘러드는 물이 석회암 지형에 침식작용을 일으켜 만들어낸 것으로 생성 시기는 2억 5,000만 년 전 쯤으로 추정된다. 성류굴은 석회암 지대에서 발달되는 전형적인 석회 동굴이다. 석회암은 담홍색·회백색 또는 백색을 띠고 있다. 동굴의 길이는 약 472m에 이르며, 입구에서부터 동굴 끝까지의 사이에는 종유석과 굴 모습이 기이한 곳을 골라 오작교·만불상·로마궁전 등의 이름으로 된 12개의 광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와 같은 동굴 광장이나 동굴 내부에는 지하 궁전과 같이 화려한 종유석과 석순, 유석(流石)이 발달되어 있어 아름다운 경관을 자아내고 있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울진산수기(蔚珍山水記) 김창흡(金昌翕) 성류굴(聖留窟) 절은 바위벼랑 아래 긴 시냇가에 있는데, 석벽(石壁)이 깎아지른 듯 천 척(尺)이다. 절벽에 작은 구멍이 있는데 ‘성류굴’이라 한다. 굴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고 또 어두컴컴하여 촛불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다. 절의 중을 시켜 횃불을 들고 인도하게 하고, 또 고을 사람 가운데 많이 출입해본 자에게 앞서고 뒤따르게 하여 들어갔다. 구멍이 난 입구는 좁았지만 4~5보쯤 기어 들어가니 조금씩 넓어졌다. 일어나 수십 보를 걸어가니 평지가 있는데 수 묘(畝)가 된다. 좌우에 있는 돌의 모양이 특이하다. 또한 걸어서 수십 보쯤 가니 굴이 있는데 굴의 입구에 비해 더욱 좁아서 엎드려 기어서 갔다. 그 아래는 흙탕물이 있었는데 자리를 깔아 젖음을 막았다. 7~8보를 걸어가니 조금 널찍한데 좌우가 더욱 기이하여 혹은 당간의 깃발 같고 어떤 것은 부도 같았다. 또 십 수 보를 가니, 돌이 더욱 기괴하고 그 모양이 더욱 여러 가지여서 표현할 수가 없다. 그 당간의 깃발과 부도 같은 것이 더욱 길고, 넓고, 높으며 크다. 또한 걸어서 4~5보를 가니 불상 같은 것이 있고 고승 같은 모양을 한 것도 있다. 또한 연못은 매우 맑은데 그 넓이가 수 묘가 된다. 가운데에 두 개의 돌이 있는데 하나는 깨끗한 떡 같고, 다른 하나는 수레바퀴 같다. 그 위와 곁에 드리워진 깃발 모양의 덮개는 모두가 오색이 찬란하다. 처음 생각엔 종유석이 엉긴 것이어서 그다지 단단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지팡이로 두들기니 각각 소리가 나는데 그 장단을 따라 청탁이 있어 마치 편경 소리와 같았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연못을 따라 들어가면 더욱 기괴하다.”라고 하나, 이산해는 이곳은 세속 사람이 함부로 구경할 곳이 아니라고 여겨 서둘러 나왔다. 그 양 옆에 구멍이 많은데 사람이 잘못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 그 사람에게 굴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아무도 그 끝까지 가 본 자가 없습니다. 어떤 이는 평해군(平海郡) 바닷가에까지 도달할 수 있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대개 그곳은 여기서 30여 리의 거리이다. 처음 들어갈 때 그을리고 젖을까 염려되어 아이종의 옷과 수건을 빌려서 들어갔다. 나온 뒤에 옷을 바꿔 입고 세수하고 양치하니 마치 꿈에 화서에서 노닐다가 화들짝 깬 듯하였다. 일찍이 시험 삼아 생각해보니, 조물주의 오묘함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많다고 여겼는데, 국도(國島)와 이 굴에서 더욱 그런 면을 보게 되었다. 이것은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인가? 아니면 일부러 이렇게 만든 것인가? 자연히 된 것이라면 그 기변의 교묘함이 어찌 이렇듯 지극한가. 일부러 만든 것이라면 아무리 귀공이나 신력으로 천만세를 다했기로서니 또한 어떻게 이런 지극한 경지에 이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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