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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친의 산소에 구멍을 낸 범인을 찾아라! - 덫에 걸려든 산다람쥐
1622년 2월 27일,
청명절(淸明節)
이었다. 김령은 아침 일찍 외조모의 기제사를 지내고, 부모님의 묘를 찾아가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살펴보니, 어머니의 산소에 쥐구멍이 나있는 것이 아닌가. 김령은 이곳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던 쥐구멍을 발견하고는 놀랍고도 괴로워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즉시 손질해서 고치려고 했지만, 날과 달의 거리낌이 고려되어 함부로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김령은 잠이 오지 않았다. 생일잔치에 초대받았지만, 음식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어머니 산소의 쥐구멍 때문이었다. 김령은 비 내리는 2월 29일의 아침, 다시 산소로 찾아가 쥐덫을 놓고 잡히기를 기다렸다. 지관에게 물어보니 산소에 난 구멍은
삼월절(三月節)
안에 손대서는 안 된다고 대답하였다. 답답하고 안타까웠지만, 쥐덫을 놓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쥐덫을 놓은 지 이틀만인 3월 1일, 날이 저물 무렵, 종이 쥐덫에서 잡힌 산다람쥐를 가져왔다. 옳거니, 김령은 어머니의 산소에 구멍을 뚫은 범인이 이 녀석일 거라고 확신했다. 그 뒤로도 매일 어머니의 산소에 찾아가 확인해보았는데, 더 이상 구멍 뚫리는 일이 없었다. 필시 산다람쥐로 인해 생긴 탈이었던 것이다. 김령은 일주일이나 더 확인해본 후에야 마음을 놓았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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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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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이야기
출전 :
계암일록(溪巖日錄)
전체이야기보기
저자 :
김령(金坽)
주제 : 제사, 선친 묘소
시기 : 1622-02-27 ~ 1622-03-07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경상북도 안동시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김령
참고자료링크 :
웹진 담談 7호
조선왕조실록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김령
◆ 조선시대 조상 묘의 관리
조선은 성리학적 격식을 중시한 신분제 사회이며, 예서를 통해 그 절차를 제시하고 있다 분묘란 시신을 매장하고 그 위에 흙으로 표식(封墳)을 만든 무덤를 의미한다. 조선시대 분묘는 시신을 안치한 매장주체부의 형태에 의해 석축묘, 토광묘,회곽묘, 옹관묘, 화장묘, 초분 등으로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 분묘의 유형은 치장(治葬) 절차에 의해 구분된다. 석축을 구성하거나 옹관에 매장하거나, 회곽을 구성하거나 하는 등 시신 처리를 위한 구조물을 만드는 과정이 치장(治葬)이다. 치장의 결과는 한 집단의 상장의례가 어떻게 구현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지표이며, 고고학적 조사를 통해 찾아진 유구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한 개인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장례절차는 사회적 신분에 따라 차이가 나며, 이는 고고학 자료를 통해 집단의 위계로 해석되곤 한다. 조선시대 분묘 가운데 가장 일반적으로 확인되는 유형이 토광묘와 회곽묘인데, 이를 예서에 나타난 치장의 절차를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분묘는 토광을 파고 매장 주체부를 위한 공간을 만드는 작업으로부터 시작된다. 광을 파고, 매장 주체부를 마련한 후 하관하고 주변을 채우고 덮는다는 점에서 예나 지금이나 큰 차이는 없다. 하지만 오늘날의 분묘는 짧은 빈의 기간을 반영하여 매장에 임박하여 광을 파고, 매장 주체부(棺)가 들어갈 공간을 만든 후 하관하고 주변을 채운 후, 상부를 덮고 봉분을 조성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조선시대 분묘는 국조오례의나 상례비요, 사례편람 등에 제시된 치장절차에 따라 조성되며, 회장이 굳을 수 있을 정도의 최소한의 시간을 필요로 하게 된다. 매장 주체부 공간은 피장자와 묘광을 구분하는 구조물에 의해 관(棺)·곽(槨)·실(室)로 구분되는데, 관(棺)은 피장자가 직접 안치되는 공간으로 운구(運柩)의 수단이 된다. 곽(槨)은 빈(殯)의 과정에 조성되며, 관을 포함하는 바깥 집으로 토층조사에서 확인되는데, 광의 폭이 상대적으로 넓게 만들어진다. 실(室)은 피장자가 안장되는 방으로 관(棺)과 곽(槨)을 모두 포함하는 공간으로 일반적으로 석축하여 만든 구조를 일컫는다. 가례의 적용으로 회곽(灰槨)이 조성되면서 실(室)의 개념을 대체하였거나 실(室)을 포괄하는 방향으로 변화하며, 이에 따라 부장행위도 함께 달라진다. 토광묘는 목관이나 목곽을 사용하고 흙으로 뒷채움한 무덤 유이며, 회곽묘는 회를 사용하여 곽(槨)을 구성한 무덤이다. 조선 예서(禮書)에 회곽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으며, 조사를 통해 일반적으로 확인되는 토광묘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는 예서가 성리학을 숭상한 사대부를 중심으로 작성된 까닭으로 이해될 수 있다. 또한 회가 귀한 품목임을 감안한다면, 사대부가에서도 회곽을 조성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때문에 회를 중심으로한 삼물을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흙으로 대체하여 조성하게 되었을 것이며 이것이 토광묘라고 칭하는 무덤유형이다. 묘광을 파고 매장주체부가 들어 갈 공간을 만드는 것이 빈(殯)의 시기에 행해진 치장(治葬)이다. 치장(治葬)은 광을 파고, 바닥을 정지한 후 곽(槨)을 설치하고, 묘광과 곽 사이 공간을 채우는 과정으로 진행되는데, 이때 채우는 재료로 회를 비롯한 삼물을 이용한 것이 회곽묘이며, 흙으로 묘광과 곽 사이를 채운 것이 토광묘이다. 토광묘는 광을 파고 하관한 후 주변을 채운 요즘 무덤 형태의 목관토광묘와 회곽묘와 동일한 과정으로 조성하되, 회 대신 흙으로 주변을 채운 목곽토광묘로 구분할 수 있다. 때문에 회격 혹은 회곽으로 불리우던 무덤은 넓은 의미에서 토광묘의 범주에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 토광묘는 회의 사용 유무에 따라 매장주체부가 들어갈 공간에 회를 사용한 무덤을 회곽묘로, 흙으로 충진한 무덤을 목관(곽)토광묘로 분류된다. 회곽묘는 곽을 사용하는 방식과 목곽이 없이 회장(灰墻)만 남아있고 내부에 목관이 안치된 방식 그리고 직장을 위한 공간을 만든 방식, 목관을 안치하고 주변에 회를 섞은 흙으로 채운 방식 등 다양하게 나타난다. 곽을 사용하는 방식은 가례(家禮)와 상례비요(喪禮備要)에 언급된 박판격지법(薄板隔之法)과 사례편람(四禮便覽)의 하곽이섭실지법(下槨而?實之法)을 포함하는데, 모두 거푸집을 이용하여 회곽을 조성한다. 곽을 사용한 방식은 회장벽에 6~12㎝ 두께로 쌓인 단면 층에 의해 알 수 있으며, 점차 층의 구분이 없어지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회곽묘 관재에 대한 연륜연대 값이 조선 전기와 중기에 해당된다. 국조오례의와 상례비요의 회곽조성 방식에서 재료의 선택이나 축조방법상의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 하지만 회곽 내에 목곽이 잔존하는 것과 목곽 없이 회장 내에 바로 관이 안치된 유형은 구분할 필요가 있으며, 이는 시간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된다. 관을 사용하지 않은 방식은 평면 형태가 모를 죽이거나 선을 꺾어서 서양식 관의 형태를 나타내며, 탈관 후 피장자만을 안치한 유형으로 곽을 사용한 방식에 비해 회장 폭이 넓고 높이가 낮다. 묘광을 굴착한 후 목관을 안치하고, 회를 일부 섞은 흙으로 목관과 묘광사이 공간을 채우는 방식도 확인되는데, 이는 회곽의 기능과 의미가 약화되었음을 나타내며, 회의 사용량도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조선 분묘 가운데 합장(合葬)한 경우도 많은데, 동일한 계획 하에 조영된 것과 추후에 덧댄 방식이 있다. 합장된 회곽의 내부는 목관[柩]을 넣은 것과 탈관 후 시신만을 모신 것으로 구분된다. 『사례편람(四禮便覽)』 치장(治葬) 성분조(成墳條)에는 무덤을 정비하거나 합장에 대비할 수 있는 배장방식을 설명하고 있다. 추후에 덧댄 합장 회곽은 회장벽에 관통 또는 반관통의 구멍이 확인되는데, 모두 회장이 굳은 뒤에 타격에 의해 뚫었다. 이 구멍은 혼백이 서로 통교할 수 있게 한 것으로 피장자 상호간의 부부 등 친밀감을 반영한 것으로 이해된다. 분묘(墳墓)의 형태(形態)는 시대(時代)와 나라, 지방(地方), 문화생활(文化生活), 계급(階級)에 따라 그 형식(型式)을 달리 하나 대개(大槪)의 경우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의거(依據)하여 설치(設置)한다. 산(山)을 뒤로 두고 앞으로는 물이 흐르며 좌측으로는 청룡(靑龍), 우측으로는 백호(白虎) 즉 좌청룡우백호(左靑龍右白虎)를 앞의 주산(主山)보다 약간 높게 위치(位置)하며 앞은 몇 층의 단상(壇狀)을 만들고 주위(周圍)에 호석(護石)을 설치(設置)하는 것이 일반적(一般的)인 형태(形態)라 할 수 있다. 사대부(士大夫)의 무덤 주위(周圍)에는 망주(望柱-무덤 앞에 세우는 한 쌍의 돌기둥)를 세우고 석인(石人-돌로 만든 사람의 형상)을 배치(配置)하였으며, 분묘(墳墓) 앞에는 상석(床石-제물을 놓기 위해 돌로 만든 상)과 묘표(墓表)를 두고 신도비(神道碑), 묘비(墓碑), 묘갈(墓碣)을 세우는 것이 보통이다. 고려시대(高麗時代)에는 불교(佛敎)의 영향(影響) 때문에 화장(火葬)을 많이 하였는데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와서는 유교(儒敎)의 영향(影響)으로 스님(僧)을 제외하고는 토장(土葬)을 하게 되어 분묘(墳墓)가 발달(發達)하였다. 합장(合葬)을 할 경우 남편(男便)을 오른쪽, 부인(夫人)은 왼쪽에 묻는데 이는 사자(死者)를 중심(中心)으로 하기 때문에 묘(墓)를 바라보는 사람은 정반대(正反對)가 되는데, 이런 영향(影響)은 중국(中國)의 영향(影響)을 받은 것 같다. (1) 묘소(墓所) 묘소(墓所)란 분묘(墳墓)의 소재지(所在地)를 말하는 것으로 족보(族譜)에는 '묘'(墓)자만을 기록(記錄)하고 좌향(坐向-묘가 위치하고 있는 방향, 방위)과 석물(石物) 등이 있을 경우, 또는 합장(合掌) 여부(與否)를 기록(記錄)하게 된다. 묘소(墓所)의 방향(方向)이 자좌(子坐)로 되어 있으면 고인(故人)의 머리 쪽이 정북 쪽으로 향(向)하고 있다는 뜻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묘지(墓地)의 방향은 정남향(正南向)이 된다. 좌우(左右)는 사자(死者)를 중심(中心)으로 하는 것이므로 묘(墓)를 바라보는 쪽에서는 정반대(正反對)가 되므로 좌(左)는 동(東)쪽, 우(右)는 서(西)쪽으로 보면 된다. 합봉(合封), 합묘(合墓)는 부부(夫婦)를 한 봉분(封墳)에 합장(合掌)했다는 말이고 쌍봉(雙封)은 같은 묘소(墓所)에 약간의 거리를 두고 두 봉분(封墳)을 나란히 만들었다는 것이다. (2) 묘표(墓表) 묘표(墓表)는 일명 표석(表石)이라고 하는데 고인(故人)의 관직(官職), 이름, 호(號)를 앞면에 새기고, 뒷면에는 사적(事蹟) 또는 비석(碑石)을 세운 날짜와 비석(碑石)을 세운 자손(子孫)들의 이름을 새겨 무덤 앞에 세우는 비석(碑石)이다. (3) 묘지(墓誌) 묘지(墓誌)는 일명 지석(誌石)이라고도 하며, 천재지변(天災地變) 또는 시간(時間)이 지남에 따라 묘지(墓地)를 잃어버리는 사례(事例)가 종종 있는데 그것을 방지(防止)하기 위하여 금속판(金屬板), 돌, 도판(陶板)에 고인(故人)의 원적(原籍)과 성명(姓名), 생년월일(生年月日), 행적(行績), 묘(墓)의 위치(位置) 등을 새겨서 묘 앞에 묻는 것을 말한다. (4) 묘비(墓碑)와 비명(碑銘) 묘비(墓碑) 앞에 세우는 비석(碑石)의 총칭(總稱)이며, 비명(碑銘)이란 비(碑)에 새기는 글로서 명문(銘文), 비문(碑文)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는 고인(故人)의 성명(姓名), 본관(本貫), 원적(原籍), 성행(性行), 경력(經歷) 등의 사적(事蹟)을 기술(記述)한 것이다. (5) 신도비(神道碑) 임금이나 고관(高官)의 무덤 앞이나 길목에 세워 고인(故人)의 사적(事蹟)을 기리는 비석(碑石)이다. 대개(大槪) 무덤 동남쪽에 위치(位置)하며 남쪽을 향(向)하여 세우는데, 신도(神道)라는 뜻은 사자(死者)의 묘로(墓路), 즉 신령(神靈)의 길이라는 뜻이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서는 2품 이상의 관리(官吏)들에게 세우는 것을 제도화(制度化) 하였다. 왕(王)의 신도비(神道碑)로는 건원릉(建元陵)의 태조(太祖) 신도비(神道碑)와 홍릉(洪陵)의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신도비(神道碑)가 있으며, 문종(文宗)은 왕릉(王陵)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우는 것을 금지(禁止)하여 그 이후에는 왕(王)의 신도비(神道碑)는 세우지 않았다. (6) 묘갈(墓碣) 묘갈(墓碣)은 신도비(神道碑)와 비슷하나 3품 이하의 관리(官吏)들 무덤에 세우는 것으로 머리 부분이 동그스름한 작은 돌로 만든 비석(碑石)으로 신도비(神道碑)에 비해서 규모(規模)가 작고 빈약(貧弱)하다. 분묘를 경칭하여 흔히 산소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 산소란 말은 단순한 언어의 개념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풍습과 정신적 도덕적인 개념까지를 내포하고 있는 말이다. 우리의 성묘습관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신라 때부터라고 한다. 그것이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그 민속(풍속)의 권위가 유교사상과 맞물려 절대적일만큼 대단했던 모양이다. 역시 기록에 보면 관리가 성묘를 하러 갈 때는 성묘휴가까지를 줄 정도였고 죄수에게도 성묘를 가는 동안에는 금형(禁刑)을 했다고 한다. 성묘는 반드시 추석명절에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한식에도 하고 단오절에도 하며 정월(설)에도 한다. 또 일정한 시기가 없이 제사를 지냈다던가 무슨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사정에 따라 수시로 할 수 있는 게 성묘다. 그러나 대체로 벌초를 하고 성묘를 하는 추석성묘를 제일로 쳤고 또 이때의 성묘가 가장 성묘다워서 옛 사람의 글에도 추석이 되면 거지들도 성묘를 한다는 글귀가 있을 정도이다. 선조의 묘를 찾아 살피는 성묘는 확실히 미풍양속임에 틀림이 없다. 후손으로서 또는 자식으로서 부모의 산소를 성묘한다는 것은 지극히 마땅한 도리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도덕적인 면에서도 더할 수 없이 바람직한 일인 것이다. 따라서 성묘는 얼마든지 장려를 해야 할 일이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돌아가신 선조들에 대한 추모의식이나 행사도 권장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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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번역
임술년(1622, 광해군14) 2월 27일 맑음. 아침 일찍 외조모의 기제사를 지냈다. 생질 설(偰)이 참여하였다. 밥을 먹은 뒤에 방잠의 재사에 가서 제수(祭需)를 살폈다. 오후에 선친(先親)의 묘사(墓祀)를 지냈다. 이날은 청명절(淸明節)이다. 기일(忌日)처럼 소식(素食)을 행하였다. 선비(先妣)의 산소 왼쪽에 쥐구멍이 있었다. 이달 들어 연이어 살폈으나 이것이 없었는데, 오늘 처음으로 이것을 보게 되었으니 놀랍고도 괴로움이 지극하여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즉시 손질하고 고치려고 하다가 또한 날과 달의 거리낌을 우려하여 우선 그렇게 하지를 못하였다. 날마다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二十七日. 晴. 早朝行外祖妣忌祭. 偰甥叅行. 食後徃岑舍, 治祭需. 午行先親墓祀. 是日淸明節, 以忌日行素. 先妣墳塋左傍, 有鼠穴. 此月內連審之無此, 今始見之, 驚悶之極, 方寸不定, 卽欲修改, 又慮日月之忌, 姑未焉. 當日日審察焉.
임술년(1622, 광해군14) 2월 28일 맑음. 아침에 선영(先塋)에 가서 살펴보고 돌아오다가 서숙집 앞에 이르렀는데, 여희(汝熙)가 불러서 들어갔다. 대개 그의 생일이라 술과 안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선영 때문에 근심이 있어 고기는 먹지 않고 술만 조금 마셨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왔다. 듣자니, 선영의 쥐구멍은 막으면 또 뚫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산쥐일 것이라 생각하고 의심을 하지 않았다. 二十八日. 晴. 朝徃審先塋, 回至叔家前, 爲汝熙邀入. 盖其生辰有酒饌也. 余以先塋有患, 不食肉, 只少飮. 夕回家. 聞先塋鼠穴, 塞而復穿, 尤意山鼠也無疑矣.
임술년(1622, 광해군14) 2월 29일 비가 내렸다. 아침에 선영에 가서 살펴보았다. 쥐구멍이 틀림없을 것 같아 쥐덫을 놓아 잡히길 기다렸다. 二十九日. 雨. 朝徃省先塋. 以鼠穴無疑, 設機伺捕.
임술년(1622, 광해군14) 2월 30일 맑음. 아침에 선영에 가서 살펴보고 돌아왔다. 손질하고 고치는 일을 지관에게 물어보니, 다 삼월절(三月節) 안에는 산소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더욱 괴로웠다. 三十日. 晴. 朝徃省先塋而回. 以修改事, 問于術家, 皆言三月節內, 不可動塜云. 尤悶.
임술년(1622, 광해군14) 3월 1일 맑음. 아침에 선영에 가서 살펴보았다. 앞서 쥐구멍이라 하였던 것은 막아놓으면 뚫고 막아놓으면 뚫고 하여 더욱이 쥐새끼가 근심을 끼친 것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고통스럽고 답답함이 그지없어 쥐덫을 놓고 기다렸으나 이때까지도 잡히지 않았으니, 더욱 한탄스러웠다. 가묘의 삭천례는 근방에 병기(病氣)가 돌아 우선 멈추었다. 오후에 풍산(豊山)의 김두일 사탁(金斗一士卓)이 왔는데, 동성(同姓)이다. 대개 유사(有司)가 되어 일족모임을 의논하기 위하여 여기에 온 것이다. 우리 쪽의 유사는 이실(而實) 및 참(墋)이다. 술을 따라 그를 접대하였다. 참(墋) 및 김시익(金時翼)도 왔다. 술을 마신 후 밥을 먹었다. 밥을 먹은 뒤 손님과 참(墋)은 이실(而實)의 집으로 가서 묵으면서 일족모임의 절목(節目)을 의논하였다. 이날 저물 무렵에 종 학남(鶴南)이 잠산(岑山; 방잠 산소)에서 돌아왔는데, 하나의 물건을 가지고 왔다. 곧 산다람쥐[山鼯]였는데, 선영의 옆에 쥐덫을 놓아 잡은 것이었다. 생각건대, 그 구멍을 뚫은 놈은 반드시 이것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놈을 잡은 것이 아주 다행일 것인데, 우선 구멍을 막아놓고 기다려보면 알게 될 것이다. 一日. 晴. 朝徃省先塋. 前者鼠穴, 隨塞隨穿, 益知鼠子之作患也. 痛悶切切, 設機以伺, 而時未獲, 尤歎恨. 家廟朔薦, 以傍近病氣姑停. 午後豊山金斗一士卓來, 同姓也, 盖爲有司, 以議姓會至此. 此處有司, 而實及墋也. 酌而待之. 墋及金時翼亦至. 酒後飯, 飯後, 客與墋徃宿而實家, 議姓會節目. 是日向晩, 奴鶴南回自岑山, 持一物而至, 乃山鼯也. 先塋之傍, 設機獲之. 料其作穴者, 必此物也. 若爾深幸其捕之焉, 塞穴以竢可知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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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소 앞에서 제사 지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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