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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직되고, 파직을 청하다 - 당파 간의 진흙탕 싸움
광해군의 즉위 전, 선조가 나이가 찬 광해군을 폐세자하고 어린 영창대군을 새로 세자로 세우려 할 때, 영의정
류영경(柳永慶)
이 이에 찬성하였다. 그리고 대북파의 우두머리가 된 이이첨이 류영경(柳永慶)을 탄핵하고, 광해군의 즉위를 도왔다. 이때부터 벌어진 당파 간의 진흙싸움은 끊이지 않았다. 신하들이 서로 헐뜯고, 죄를 지우고, 변명을 하는 통에, 조정은 진흙탕과 같았다.
1614년 5월 23일, 사헌부
정언
류효립(柳孝立)
은 계사를 올려 부응교
한찬남(韓纘男)
의 죄를 물었다.
“부응교 한찬남은 거칠고 비루한 자입니다. 훈련
도감
의
도청(都廳)
이 되어서는 제멋대로 일을 결정하여 장인바치들을 부리고, 또 그들을 여기저기 아는 곳에 보내어 온갖 폐단을 일으켰기 때문에 이전부터 이를 주상께 아뢰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사간 이정원(李挺元)이 이를 적극적으로 막아 나섰습니다. 사사로운 무리를 비호하고, 공론을 무시하였으니, 이는 모두 신이 보잘것없어서 생긴 일이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스스로 파직을 청하였다.
한편 이정원은 “류효립은 자신의 발언을 공론이라고 하는데, 신은 의아할 따름입니다. 더 이상의 변론은 하지 않겠습니다. 신은 전에 이미 그의 아우 충립에게도 배척을 당하였고, 오늘 또 류효립에게 비난을 받았습니다.”라며 스스로 파직을 청하였다.
류효립은 다시 “한찬남이 일찍이 충청도 이산에 갔을 때 거문고를 잘 탄다고 하여 당시 충청감사였던 적신(賊臣)
이홍로(李弘老)
에게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는 역말을 타고 이홍로의 뒤를 따라다니며 마치 이홍로의 아전처럼 굴어 선비들에게 이미 버림을 받은 지 오래이옵니다. 그러나 이정원은 장황한 말로 그 일당을 비호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헌부에서 죄인 이정원과 저를 함께 출사(出仕)시켜 비교하다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라며 다시 한 번 파직을 청했다.
이정원도 지지 않고 류효립을 공격하며 한찬남의 편을 들었다. 광해군이 류효립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이정원의 자리를 박탈하였는데,
장령
박재가 또다시 계사하였다.
“한찬남은 주상의 즉위 이후, 역적을 토벌하는데 앞장선 자인데도 류홍립이 이를 공격하기에 급급하여, 아침에는 한찬남을, 저녁에는 이정원을 공격하니 저는 그 무리와는 논의가 달라 구차하게 영합할 수가 없사옵니다.”
라고 하며, 스스로 파직을 청하였다.
결국 류효립마저 자리를 스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개요
배경이야기
원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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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이야기
출전 :
계암일록(溪巖日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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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령(金坽)
주제 : 당파싸움, 역모, 무고
시기 : 1614-05-23 ~ 1614-05-26
동일시기이야기소재
장소 :
일기분류 : 생활일기
인물 : 류효립, 광해군, 한찬남, 이정원, 박재, 이홍로
참고자료링크 :
조선왕조실록
◆ 광해군대 당쟁의 시말
북인은 광해군대에 정권을 잡은 당파로, 동인(東人)에서 남인과 북인으로 분파되었다. 갈라지게 된 동기는 정철(鄭澈)의 건저의 사건(建儲議事件)을 계기로 동인 내부에서 서인에 대한 강경파와 온건파간의 대립이 주요 원인인 것으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이는 주된 동기일 뿐, 전체적인 요인은 아니다. 즉, 서인에 대한 강경파와 온건파의 대립이 주요인이라면, 이를 발생시킨 것은 사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설도 있다. 전랑(銓郞) 천거 문제를 둘러싼 이산해(李山海)와 유성룡(柳成龍)과의 사적인 알력, 이발(李潑)과 유성룡과의 사적인 불화, 그리고 이발과 우성전(禹性傳)과의 평양기생 문제를 계기로 발생한 사감에 의한 분파설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감과 함께 세자책봉 문제로 문책을 받은 서인 정철에 대해 이산해를 중심으로 한 강경한 처벌을 주장하는 파와 우성전을 중심으로 한 온건론을 펴는 파의 대립 등이 복합되어 분당 작용을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동인의 남북분당은 집권당 안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흔히 벌이는 정치 현상으로 간주된다. 우성전과 유성룡을 추종하는 자들을 남인이라고 칭한 데 대해 이발과 이산해를 중심으로 하는 일파를 북인이라 하였다. 이 명칭의 유래는 이발의 집이 서울 북악 밑에 있었고, 이산해의 집은 한강 이북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분당 초기 북인은 이이(李珥)·성혼(成渾)과 교우 관계를 가졌거나 그 문하에 출입한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이들은 영남학파 중에서도 조식(曺植)의 문하생들이 그 중심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동인에서 분파된 북인은 정권을 잡은 뒤, 다시 분당되었다. 즉, 1599년(선조 32) 홍여순(洪汝諄)이 대사헌으로 천거되자 당시 정랑으로 있었던 남이공(南以恭)이 이에 반대하여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다시 갈라졌다. 이산해와 홍여순이 영도하는 당을 대북이라 하였고, 기자헌(奇自獻)·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허균(許筠)·한찬남(韓纘男)·이명(李溟)·이성(李惺)·백대형(白大珩)·구의강(具義剛)·홍식(洪湜)·유몽인(柳夢寅) 등이 이에 속하였다. 소북은 남이공과 김신국(金藎國)을 수령으로 하였다. 유영경(柳永慶)·유희분(柳希奮)·이경전(李慶全)·이유효(李維孝)·이효원(李効元)·박이서(朴彛敍)·성준구(成俊耉) 등이 이에 참여하였다. 대북과 소북으로 갈린 뒤, 대부분은 소북을 몰아내고 선조 말에 광해군을 세자로 옹립, 정권을 굳혔다. 그러나 당시 영의정 이산해와 병조판서 홍여순 사이에 알력이 생겨 이산해를 중심으로 한 골북(骨北)과 홍여순·이이첨을 중심으로 한 육북(肉北)으로 또다시 분파되었다. 여기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위를 반대하는 중북(中北)이 탄생하였다. 유몽인을 수령으로 한 중북에는 기자헌·정은·정창연(鄭昌衍)·이경전·이명·박승종(朴承宗) 등이 이에 가담하였다. 한편, 대북에 밀려난 소북은 영수 격인 유영경이 영의정에 올라 한때 득세, 영창대군을 세자로 옹립하려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패로 돌아가자, 그 죄를 대북 정인홍에게 전가해 화를 면하는 듯했으나 광해군의 등극으로 몰락하게 되었다. 광해군 때에 소북은 영수 격인 남이공과 유영경 사이에 틈이 벌어져 다시 분당되었다. 전자를 중심으로 한 파당을 청소북(淸小北) 또는 남당(南黨)이라 하고, 후자를 중심으로 하는 당을 탁소북(濁小北) 또는 유당(柳黨)이라고 하였다. 선조 말에서 광해군에 이르는 시대는 여러 갈래로 분당, 대립된 대북 세력이 지배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대북의 전성기는 인조반정으로 끝나고, 소북은 일부가 서인·남인에 흡수되었다. 그리하여 인조 때는 좌의정을 역임한 바 있는 남이웅(南以雄)이 그 잔존 세력을 규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잔여 세력도 효종·현종 때 와서 남인에 흡수되고 말았다. 그리고 경종 이후로는 남인과 운명을 같이해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
원문 이미지
◆ 원문 번역
갑인년(1614, 광해군6) 5월 23일 흐림. 아침에 종 애상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어제 조보에서 정언 류효립(柳孝立)의 피혐계사(避嫌啓辭)에 “부응교 한찬남(韓纘男)은 본래 거칠고 비루하며 참람한 자입니다. 기세를 믿고 훈련도감의 도청(都廳)이 되어서는 제멋대로 일을 결정하여 장인바치를 부리고, 또 여기저기 아는 곳에 보내어 온갖 폐단을 일으켰기 때문에 논계(論啓)를 하고자 하였으나, 사간 이정원(李挺元)이 적극적으로 막아서 사사로운 무리를 비호하고 공론을 무시했으니, 이는 모두 신이 보잘것없어서 생긴 일이옵니다.”라고 하면서 스스로 파직되기를 청하였다. 이정원의 계사에 “신이 어찌 감히 구차하게 그가 자신과 다른 주장을 배척하는 것을 좇아서 일을 따짐에 진실을 잃는 죄악에 스스로 빠지겠사옵니까? 류효립은 자기가 발언한 것을 자기가 공론이라고 하니, 신은 괴이하게 여기옵니다. 그 말은 따지기에도 부족하니, 신 또한 많이 변론하지 않겠사옵니다. 신은 전에 이미 그의 아우 충립(忠立)에게 배척을 당하였고, 오늘 또 류효립에게 비난을 받았습니다.”라고 하며 스스로 파직을 청하였다. 헌납 박홍도(朴弘道)와 대사간 김치(金緻)도 피혐하였는데, 한찬남의 입장을 생각하여 이정원을 비호하였기 때문이다. 이정원의 방자함에 더욱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밥을 먹은 뒤에 승정원에 들어가서 자문에 안보하고 오시에 우소로 돌아왔다. 충의(忠義) 김덕부(金德孚) 형의 내자(內子)가 위어(葦魚)를 보냈다. 향제․향오․회백을 초대하여 회를 떠서 먹었다. 저녁에는 찰방에게 가서 보았다. 갑인년(1614, 광해군6) 5월 24일 흐림. 어제 조보에 “사헌부의 처치가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대간이 들었다면 논열論列하는 것이 상례요, 들은 것이 이미 다르다면 구차하게 동조할 필요가 없사오니, 청컨대 모두 출사하도록 명하소서.”라고 하였는데, 사실은 속으로 이정원의 무리를 편드는 것이다. 김치와 박홍도 등이 연달아 피혐하니, 사헌부에서는 대사헌 송순宋諄과 지평 류활柳活이 처리하였다. 밥을 먹은 뒤에 자문咨文 왜의 자문 을 아뢰는 일로 예조 판서, 이조 참판 류인길, 호조 참의 류의립의 집에 가서 모두 만나보았다. 대사간 김치의 집에 도착했더니 제사 때문에 원동院洞에 있다고 하였다. 돌아오면서 여흥군 댁에 들렀고, 다시 대궐에 들어가서 초기를 올렸다. 김치는 피혐 때문에, 경섬은 입직 때문에 대궐 안에 있었는데, 자문 초기를 올렸다. 경섬이 맞아들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물녘에 우소로 돌아왔다. 전성지全性之·김효백·김효중이 잇따라 왔고, 류실백과 홍향제도 와서 저녁까지 대화를 하였다. 경상 감사 권반權盼이 임기가 차서 체직되었고, 장만張晩이 경상 감사가 되었다. 권수지 영공이 수망首望이 되었으나 떨어졌다.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시언李時言이 부원수가 되었는데, 명나라에서 징병하는 사건 때문이었다. 애조관哀詔官이 또 나왔다고 하는데, 근심이 되면서도 한편 우스웠다. 갑인년(1614, 광해군6) 5월 25일 흐림. 아침에 어제 조보를 보았다. 류효립이 다시 피혐하면서 말하기를, “한찬남이 일찍이 이산(尼山)에 갔을 때 거문고를 잘 탄다고 하여 적신(賊臣) 이홍로(李弘老)에게 초대를 받았는데, 이홍로는 당시 충청감사였사옵니다. 역말을 타고 이홍로의 뒤를 따라다니며 마치 중방(中房)처럼 행동하여 선비들에게 버림을 받은 것이 오래되었습니다. 그가 훈련도감의 도청(都廳)이 되어서는 거칠고 비루하여 참람하게 제멋대로 일을 결정하고, 장인바치를 불러서 벌을 주는 폐단을 일으켰습니다. 신이 친히 들어 자세하게 알고 있으니 부득불 따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정원은 장황한 말로 막아 주고 그 일당을 비호하였습니다. 그 핑계가 한 가지는, ‘신의 말만 가지고는 따지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이요, 또 하나는 ‘저절로 공론이 된다’는 것이요, 또 하나는 ‘자기와 다른 것을 배척하였다’고 하면서 헐뜯는 말이 언급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신은 이정원과 서로 비교되는 것을 마음으로 매우 부끄럽게 여기옵니다. 대사간 김치가 어제 완석(完席)에서 신의 논계를 저지하려고 했으나 실패하였습니다. 그가 피혐계사에서 그에 관한 말을 많이 하여 사당(私黨)을 비호하였는데도 사헌부의 처치는 그 사이에서 모호하고, 아울러 모두 출사(出仕)하기를 청했습니다. 만약 신에게 죄가 있다면, 논핵(論劾)함이 옳거늘 어떻게 이처럼 할 수가 있습니까?”라고 하며 스스로 파직을 청하였다. 이정원도 피혐하면서 힘껏 류효립을 공격하였는데, “삼년 동안 초상을 치르면서 쌓은 것이라고는 사람을 상하고 물건을 해치는 것으로 마음을 삼았고, 언관(言官)이 되자마자 자기와 다른 생각을 배척하였으니 그와 더불어 비교되는 것은 신도 부끄럽게 여기고 있사옵니다. 대저 류영경(柳永慶)의 잔당들이 조정에 널려 있는데, 류효립은 한찬남이 거문고를 탄 것으로써 사람을 모함하는 함정을 만들려고 하였으니, 완전한 사람이 없을까 염려가 되옵니다.”라고 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류영경의 잔당은 아무개 아무개라고 지목한 것이다. 그들이 한찬남을 편들면서 류효립을 헐뜯고 배척하였다. 방자하고 사나운 기세가 조금도 꺼리는 것이 없었으니 듣는 사람이 모두 분노하였다. 김치와 박홍도도 피혐하였는데, 김치도 계사(啓辭)에서 그러한 주장을 낭자하게 하면서 한찬남은 곡진하게 보호하고, 류효립을 드러내 놓고 배척한 것은 이정원과 다를 게 없었다. 사헌부의 송순(宋諄)과 류활(柳活)도 피혐을 하였는데, 처치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이유로 삼았다. 밥을 먹은 뒤에 측간에 가서 하혈을 하였다. 이것이 무슨 까닭으로 말미암은 것인가? 일찍이 앓은 적이 없거늘, 온갖 병이 생긴다. 자문에 안보하는 일로 승정원에 들어갔다. 오시에 우소에 돌아왔다. 류실백(柳實伯)이 와서 ‘이강후와 약속을 했으니 이제 곧 올 것’이라고 하였다. 향제를 불러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조금 있으니 비가 내렸다. 이강후가 사람을 보내어 오겠다는 말을 전했는데, 이는 좌랑 강홍적(姜弘勣)의 집에 들렀다가 먼저 우리가 모이는 곳을 알아보려는 것이었으나 끝내 오지 않았으니 비 때문에 꺼려서일 것이다. 저녁에 류실백이 돌아갔다. 들으니, 장령 박재(朴榟)가 충주로부터 와서 피혐하였고, 김진(金搢)은 병 때문에 피혐했다고 하였다. 갑인년(1614, 광해군6) 5월 26일 비가 내렸다. 어제 조보에 장령 박경업朴慶業이 처치계사에서, “대간의 임무는 전적으로 규찰하고 탄핵하는 것을 일을 삼아서 그 들은 바를 발췌하여 일에 따라 따지고 열거하는 것이 언관言官의 체모를 깊이 살리는 것이옵니다. 말만 많이 하여 신구하려고 하면 일이 구차해지고, 이미 함께 간통簡通하였다가 다시 중지하는 것은 사건을 따지는 체모를 잃어버리는 것이옵니다. 청컨대 정언 류효립은 출사시키고, 이정원과 김치는 체차하고, 또 송순·류활, 정언 김진과 장령 박재는 출사케 하소서.”라고 하니, 모두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이사첨이 지나는 길에 보고 가고, 홍향제가 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물녘에 비가 개였다. 오숙우가 보러 왔다가 “요즈음 논의에 권점하는 날에 내가 이이첨의 집에 갔다고 하는데, 이는 아주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라고 말하면서 힘껏 변명하였다. 내 생각에도 만약 그가 갔다면 어떻게 감히 이처럼 하겠는가? 요사이 말들은 모두 뜬소문이 분명하다. 승문원의 계초를 올리는 일로 승정원에 들어갔다가 바로 돌아왔다. 저녁에는 손바닥에 열이 나고 기운도 고르지 못하여 밥을 먹어도 맛이 없었다. 향제·향오와 함께 버드나무 아래에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주부 류숙과 정자 류창문柳昌文도 왔다. 박재는 다음과 같은 계사를 올리고 스스로 파직을 청하였다. “정언 류효립은 부박하고 일 꾸미기를 좋아하여 한찬남을 공격하는 데 힘을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하오나 한찬남은 충성스럽고 분개하는 성품을 간직하여 역적을 토벌하는 상소와 차자가 그의 손에서 많이 나와 대의를 밝히고 왕법을 행했으니, 생각을 달리하는 무리들이 이를 가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지난 무신년에는 남몰래 류영경을 사주하여 어진 이를 모함하고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하려고 도모하며, 양쪽 사이를 갈라놓아 뒷날의 터전으로 삼은 자들의 흔적이 조정에서 이어졌습니다. 류효립이 이런 일은 놓아두고 따지지도 않고 도리어 역모를 토벌하는 사람을 공격하기에 급하여 아침에는 한찬남을 공격하고 저녁에는 이정원을 해치니, 전하와 국가가 끝내는 어느 곳에서 멍에를 벗을지를 알지 못하겠사옵니다. 이정원의 논의는 곧은 기세가 하늘을 가로질러 사람이 감히 범할 수 없거늘, 장령 박경업朴慶業은 위세에 겁을 먹어 처치가 애매하였고, 무고한 언관을 체직시키라고 주장하며, 스스로 가라앉았다가 스스로 떠올랐다가 하면서 그 사이에서 쥐새끼처럼 머리만 내밀고 엿보고 있으니, 마치 김진과 같은 무리라 말할 것도 없사옵니다. 신은 류효립 무리와는 논의가 달라서 구차하게 영합할 수가 없사옵니다.” 김진도 계사를 올렸으나 생기가 없고 겁을 먹어서 명백하고 시원하지가 않았다. 류효립도 인피引避하였는데, 통분한 마음이 말 바깥으로 드러났으나 또한 미진하였다. 박경업도 인피하였다. 이보다 앞서서 집의 이홍망李弘望이 정사呈辭하여 체직되었고, 김질간이 새로 제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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